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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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가북면(加北面)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개요

행정구역

우혜리 박암리 몽석리 용암리 중촌리 해평리 용산리

지명유래

우혜리(牛惠)

우혜, 백학, 상감월, 중감월, 하감월, 은사동, 어인의 7개 마을이 있다.

우혜(牛惠)마을

농부가 어린 것을 논두렁에 눞혀두고 일을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헤치려 하자 소가 호랑이와 싸워서 상하는 틈에 어린 것이 살았으므로 소의 은혜를 생각하여 우혜라고 이름 지었다는 말이 있다.

백학(白鶴) 마을

해발 700m의 높은 곳으로 개간한 땅에 참깨 농사를 많이 했으므로 깨밭골 이라 하였고, 마을 양쪽에 들이 있고, 가운데 산이 솟아 학이 나래를 편 모양이라 하여 백학이라 한다.

상감월(上甘月) 마을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내암 정인홍이 실각하여 처형되자 그의 친척들이 숨어 들어와 살면서 대를 모아 나무를 심고 감음대(甘陰台)라 한 것이 감월(甘月)이라 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 아래 감은사(甘隱寺)절이 있어서 감은리, 감월 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감월에서 가장 위쪽에 있어서 상감월이라 한다.

중감월(中甘月) 마을

350여년 전 마을에 감은사가 있었다 한다. 창밖 숲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워서 감월(甘月)이라 했다고 한다.

하감월(下甘月)

감월에서는 가장 늦게 생겼으므로 새터라 하다가 맨 아래 있으므로 아래 감월리라 한다.

은사동(隱士洞)

옛날 어진 선비가 숨어 살았다 하여 이름되었고, 300여년 전 금구 이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어인(於仁) :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고기가 놀았다 하여 고기어, 어질인 어인(魚仁)이라던 것을 에어(於)자로 바꾸었다.

박암리(朴岩里)

공수, 박암, 호암, 옥산, 신기의 5마을이 있다.

공수(孔洙)

중국 사기에 孔子設敎洙泗之上 “공자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가에서 가르쳤다.” 라는 글에서 인용한 이름으로, 유학의 마을 또는 선비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앞 냇가 바위가 물에 씻끼어 구멍이 뚫였으므로 공수라한다는 말도 있다.

박암(朴岩) 마을

마을 앞에 있는 박같이 생긴 바위로 하여 마을 이름이 생겼다.

호암(虎岩) 마을

마을 가운데 옛날 호랑이가 누었다는 높이 4m, 길이 7m의 큰 바위가 있어서 “범바위”라고 한다.

옥산(玉山) 마을

마을 곁의 산골짜기에 선녀인 옥녀가 누웠던 자리가 있다하여 “눌목”이라고 하며 옥산이라고도 한다.

새터(新基)

150여년 전 박암 마을에서 안동 권씨가 제금 나와서 이루어진 마을로서 “새터”라 한다.

몽석리(夢石里)

몽석, 덕동, 내촌, 강계, 명동 등 5개 마을이 있다.

몽석(夢石) 마을

임진왜란 때 영동에서 피난온 김영인 김이련(金以璉)이 반석 위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결이 도승이 나타나 이곳이 자손을 키우며 살만한 곳이라 하므로 살기 시작하고 마을 이름을 몽석이라 했다.

덕동(德洞) 마을

후백제 견휜왕의 후손이 이곳에 숨어 살면서 귀한 아들을 얻었다 하여 덕골 이라 했다고 전한다.
내촌(內村) : 소학(小學) 내칙편(內則篇)의 예의범절을 배우는 것이 사람되는 근본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강계(江界) 마을

본시 생강장, 터기, “강기(薑基)”였는데 강계로 바뀌였다.

명동(椧洞) 마을

마을 아래 논들로 물을 대는 홈통이 있어서 홈통명(椧)자 명동, “홈거리”라고 불리고 있으며 400여년전 전주 최씨가 최초로 거주한 곳이다.

용암리(龍岩里)

송정, 홍감, 용암, 상개금, 하개금, 장전 등 6개 마을이 있다.

송정(松亭)

처음 마을 터를 잡을 때 온 누리가 눈에 덮혔으나 이곳마은 솔숲에 가리어 눈이 없기에 터를 잡았다 한다. “소지이”라고 한다.

홍감(弘甘)

마을 앞에 가마솥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있어서 “홍가마”라고 부르던 것이 홍감으로 바뀌었다.

용암(龍岩)

마을 뒷산에 용의 머리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상개금(上開金)

큰골의 가장 북쪽끝에 있는 마을이다. 북동 2km에 경상북도 성주군과 맞닿아 있다. 옛날에는 앞뒤 산과 골짜기에서 금이 많이 나왔고, 지금도 금광 흔적이 남아있다. 금동 불상이 나왔으므로 “개금불(開金佛)”이라고 하였다는 말도 있다.

하개금(下開金)

개금골의 아래에 자리함으로 아래 개금불이라 한다.

진밭(長田)

마을 앞에서 마을 뒤까지 이어진 긴 밭이 있어서 “진밭”이라 한다.

중촌리(中村里)

불석동, 수재동, 심방소, 다전, 동촌, 산수동, 고비 등 7마을이 있다.

불석동(佛石洞)

가북면 작은골의 가장 북쪽끝 동리였는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다. “폭시기”라고 하였다. 수도사 부처를 다듬은 돌이 이 골짜기에서 나왔으므로 불석동이라 하였다.

수재골(秀材洞)

천재가 살았다는 전설에 따라 이름하여 “수잿골”이라 한다.

심방소(尋芳所)

고려말 신방(申肪)이라는 사람이 은거하던 곳이라 이름되였다. 뒷산에 땔 나무가 많아 신방(新方), 경치가 좋아서 심방 (尋芳)이라 쓰기도 했다.

다바지(茶田)

다바지라 하며, 한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선생이 만년에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쳤고,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였으므로 전국에서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였다. 중촌(中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오다가 1995년부터 다전이라 한다.

동촌(東村)

다전 마을의 동쪽에 있어서 동촌이라 한다.

산수마(山水洞)

산수 경치가 좋아서 “산수마”라 한다.

고비(高飛)

해발 700m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학이 높이 날면서 놀았다 하여 이름 되었다 하고, 고사리와 같은 고비 나물이 많이 나므로 고비라 한다는 말도 있다.

해평리(海坪里)

회남, 추동, 연곡, 월전, 양암 등 5마을이 있다.

회남(淮南)

희너미재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널무이, 판문동(板門洞)” 이라 했다.

추동(秋洞)

가래나무가 많아서 가래나무추(楸)자 추동이라 하다가 가래나무가 없어진 뒤에 가을 춧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뒷산의 큰 바위에 독수리가 살았으므로 ‘수리더미’라고 하며 수리란 고구려말 봉우리의 뜻이 있다.

연곡(燕谷)

마을 뒷산에 제비 모양이라 “제비실”이라 부르며 200여년 전에 송씨에 의해 마을이 열렸다고 한다.

월전(月田)

마을 뒷산이 닭이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닭밭이라 하다가, 앞들이 둥근 달과 같이 생겼다하여 “달밭”이라 한다. 달전(達田)이라고도 썼다.

양암(陽岩)

마을 앞 길가에 가로 12m, 세로 7m의 큰바위가 있다. 양씨가 이바위에서 놀았다하여 양성암(梁姓岩)이라 하고, 마을을 양성암리(陽城巖里)로 하였는데 양씨가 떠나고, 전씨, 김씨가 살면서 양암으로 바뀌었다.

용산리(龍山里)

용산, 율리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용산(龍山)

용산과 정봉 두 담으로 이루어 졌는데, 용산은 가야산에서 마을 뒤까지 남서로 뻗은 산줄기가 용같아서 용산이라 했다는 말도 있고, 옛날 중국의 맹가(孟嘉)라는 사람이 9월 9일 낙모대(落帽台)에서 술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 용산인데, 마을 근처에 낙모대가 있어서 용산이라 한다는 말도 있다.

율리(栗里)

옛날 마을 앞 냇물에 배를 맺던 곳이라 “배속골”이라 했다. 마을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서 율리라 한다는 말도 있고, 또 4~5세기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살았던 땅 이름이 율리 였는데 혹 지조높은 문장이 살았음인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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