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마산(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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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역사

고대시대

마산의 고대사는 선사 시대부터 삼국 시대, 통일신라 시대를 거치며 한국 역사의 중요한 흐름 속에 자리 잡아왔습니다. 이 지역은 초기부터 동남 해안의 전략적 위치로 인해 다양한 문화와 정치적 변화를 경험하였으며, 고대 국가의 성장과 함께 중요한 지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선사 시대와 초기 마을 형성

마산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인간의 거주 흔적이 발견된 지역으로,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일찍이 인류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석기 유적이 많지 않은 반면,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은 해양 자원을 기반으로 한 어로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바닷가에 위치한 마산은 풍부한 해양 자원 덕분에 초기 인류의 생활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 시대의 마산

삼한 시대, 마산 지역은 ‘갑화양곡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소국으로 형성되었으며, 정치적 독립성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한 시대에는 소국들이 교역과 농경을 중심으로 경제 활동을 이어갔는데, 마산은 남해안에 위치해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인근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산회원구 일대는 고대 포상 팔국의 하나였던 골포국(骨浦國)이었다. 골포국은 포상 팔국 전쟁에서 패패하여 가야의 안라국에 병합된다. 가야는 다시 신라에 병합되어 본격적인 삼국시대로 들어선다. 신라 경덕왕 때 골포현을 합포현으로 개명하고 의안군의 영현이 되게 했다.

삼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마산은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라는 서기 562년 가야를 정복한 후, 경남 지역을 포함한 동남 해안 일대를 점령하며 마산을 그 영토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마산은 신라의 행정 체제 하에 편입되었고, 당시 신라의 주요 해상 무역 통로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통일신라 시대

통일신라 시대에 마산은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신라가 이루어지면서 마산은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하였고,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특히, 마산은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신라의 해양 방어선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신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이 지역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경제적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 마산은 해상 방어뿐만 아니라 해양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경제는 농업뿐만 아니라 해상 교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마산은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성장하였습니다. 마산의 지리적 위치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교역의 통로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외래 문물이 유입되고 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 시대의 마산

고려 시대에 마산은 해상 교역과 군사적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지역입니다. 고려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통해 전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마산은 그 지리적 위치 덕분에 고려의 해상 무역 및 군사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려 초기와 중기: 마산의 해상 교역

고려는 건국 이후 송나라와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해상 무역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마산은 고려의 남해안에 위치해 일본과의 교역뿐만 아니라, 중국 및 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국제 교역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산은 고려 시대에 활발한 무역 항구로 성장하였고, 상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며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습니다.

고려 중기에는 몽골의 침략과 그에 따른 방어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남해안 일대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주요 거점이었고, 마산 역시 몽골과 왜구로부터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 마산은 단순한 상업 항구 이상의 역할을 하였으며, 군사적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로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산의 합포현에 석두창이 있었다. 석두창은 낙동하류 지방의 세곡을 모아 두던 조창이었다. 고려사 식화지 조운조의 기록에 의하면 석두창에는 6척의 초마선을 배치해 김해와 함안, 칠원 등에서 수취한 6,000석의 세곡을 운송했다고 한다.

조창의 위치는 현재 인보숫붗갈비, 남성지구대 등이 있는 곳이다. 제일은행 앞에 ‘마산 조창’ 자리를 알리는 비석이 설치 되어 있다. 마산창의 위치는 [허정도와 함께하는 도시 이야기-마산창]을 참고 바람

고려시의 삼별초1

고려 시대의 삼별초 항쟁과 마산은 중요한 역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별초는 원래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형성된 군사 조직으로, 몽골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끝까지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1270년,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고 독립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후 남하하여 진도로 이동한 삼별초는 남해 일대에서 몽골과의 항쟁을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마산 역시 삼별초의 활동 무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삼별초는 경상남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고, 마산을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서 여러 전투를 벌였습니다. 마산은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서 삼별초의 남해 해상 방어망의 일부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부산, 김해, 마산 등에서 몽골군과 고려 진압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마산과 인근 지역이 삼별초의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삼별초의 항쟁은 1271년 진도에서 패배하고, 마지막으로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비록 삼별초의 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산을 포함한 남해안 지역에서의 저항은 고려와 몽골의 지배에 대한 민중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려 후기: 외국 상인의 왕래와 국제 무역의 발전

고려 후기에 이르러 마산은 더욱 국제적인 항구 도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몽골과의 교류가 강화되면서 몽골 상인들이 고려를 왕래하며, 마산은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특히 해상 무역이 더욱 중요해졌고, 마산은 중국 송나라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교역로에서 중개 무역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마산은 고려 후기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마산의 경제적 번영은 이 지역에 다양한 외래 문물과 문화를 유입시켰으며, 이는 마산의 문화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의 대외 개방 정책과 활발한 무역 활동은 마산을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마산은 고려 시대 중요한 항구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산은 고려 시대에 교역과 군사적 방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발전하였고, 이는 오늘날 마산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마산의 지명유래

무산의 지명유래는 불투명하다. 용마산에서 마산이 유래 되었다고 하지만 마산 자체가 어디서 왔느냐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고려말 원나라 때에 원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목마장을 두었고, 실제 원군이 주둔했었다. 몽고정도 그렇게 생긴 이름이다. 용마산도 이 때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마산이 옛지명인 합포는 용마산 아래에 자리한 포구로 원군이 말들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사용하면서 말과 연관이 깊어져서 ‘용마산’이 되고, 이후 용이 떨어져 나가고 ‘마산’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부분 역사 허정도의 블로그를 참고 바란다.2

조선시대의 마산

조선시대의 마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안 지역으로서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조선 초기부터 마산은 해상 교역과 방어의 요충지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방어 거점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마산은 해군 기지와 군사적 요새가 발전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마산 일대에서 여러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특히 마산은 일본군의 주요 공격 경로 중 하나였고, 조선 수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해상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들에서 마산은 일본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 수군의 전략적 방어선 구축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또한, 마산은 조선 말기부터 외세의 침략과 개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과 함께 개항장이 된 마산은 외국 상인들과의 교류가 늘어났으며, 이는 지역 경제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마산은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점차 상업 도시로 변모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 지역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 마산은 군사적, 상업적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조선 후기 외세의 개입과 함께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마산

해방 이후의 마산

해방 이후 마산의 역사는 여러 중요한 시대적 변화를 거치며 발전해 왔습니다. 이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 직후 (1945년~1950년대)

해방 직후, 마산은 일본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마산은 경제적 재건과 정치적 변화를 마주했으며, 이 시기 마산은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혼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마산은 공업 도시로의 성장을 도모하며 국가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3.15 의거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마산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작된 장소로 유명합니다. 이 시위는 마산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번졌으며, 결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마산은 이 시기 정치적 의식이 높은 지역으로 자리매김하였고,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70~1980년대: 공업화와 산업 발전

1970년대 이후 마산은 자유무역지역으로 지정되며 본격적인 공업 도시로서의 성장을 시작했습니다. 마산 자유무역지역이 조성되면서 섬유, 전자, 기계 등 다양한 제조업이 발전하였고, 이를 통해 지역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었습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창원과 마산이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산업 단지가 조성되며 경제적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1990년대: 산업의 변화와 경제적 성장

1990년대에 들어서 마산은 공업 도시로서의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산업 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서비스업과 상업도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마산이 첨단 산업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며 지역 경제를 다변화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산은 공업뿐만 아니라 문화와 관광의 도시로서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창원시 통합과 현대적 발전

2010년, 마산은 창원, 진해와 통합되어 창원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통합으로 인해 마산은 더욱 현대적인 도시로 재편되었으며, 경제적, 문화적 발전이 가속화되었습니다. 특히 창원시와의 통합 이후 마산은 산업과 상업, 문화가 융합된 도시로 발전하며, 지역 경제와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참고 사이트

Colonial Korea Masan

디지털창원문화대전

  1. 마산과 삼별초 이야기는 디지털창원문화대전 “고려 시대 마산은 군사 도시였다“를 참고하십시오. ↩︎
  2. 허정도의 함께하는 도시이야기 “그림으로보는 마산도시 변천사(9)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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