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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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면(七谷面)

칠곡면 개요

칠곡면은 경상남도 의령군 소재의 면이다. 가례면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6개의 법정리를 가지고 있다. 한과 엿기름이 유명한 곳이다. 신라시대장암현의 읍지였고, 조선중기때 칠곡면으로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2024년 1월) 기준 인구는 11,43명이다. 남자는 554명 여자는 589명이다.

칠곡면 역사

칠곡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내조리

[면소재지에서 약 1.5km쯤 되고 자굴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본동(큰동네), 양천, 아래땀, 솔밭등너머까지 네 뜸으로 된 대동고촌(大洞古村)인데 옛 이름은 「첸」「체인」으로 불러왔다.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신라때의 이두(□)표기의 동명을 쉽고 뜻이 좋은 글자로 바꾸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마을은 신라 때 우리고을 장함현의 읍지였다는 기록이 있고 서쪽 산밑에 허물어진 옛터가 있다니 마을의 형성 연대와 역사가 퍽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약 170여년전에 조직한 동안(洞案)즉 향약의 일종인 마을 자치규범의 명칭이「조연동절목(槽涎洞節目)」이다. 이를 보건대「조연동」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었다는 근거가 되며 이 절목에는 마을은 21성 89호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와우안식(臥牛安息)의 명지라는 바 큰 황소가 배불리 먹고 누워서 새김질을 하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지혈이라 보통 와우설(와우혈)이라 말한다. 자굴산이 황소 머리고 동남으로 억세게 뻗은 산줄기가 몸퉁이며 마을은 구시(구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내외조(內外槽)로 분동이 된지는 얼마 전의 일이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냥 「질우(길위)」「노상(□上)」이라고 불렀던 마을이다. 협동인「양천이」도 한땐 양천(□川)으로 썼다가 뒤에 양천(陽泉)으로 한자만 바꾼 것이라 한다. 읍지였을 때는 향교가 있었다고 하며 양반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래땀」조금 위에는 길 양쪽에 조산이 있고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홰나무가 서너그루 있다. 「조산껄」로 불리는 이곳은 동신제도 올리던 신성금기의 지역이었고 목장승까지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을「별신데이」라는데 옛날 당집(별신당)이 있었고 새각시가 신행 올 땐 반드시 제물을 차리고 통과례를 드렸던 곳 일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도 원행출타할 때면 꼭 잔을 올리곤 했다. 당집이 있던 터가 논인데「귀신배미」고 거듭되던 흉년에 칡뿌리를 캐다주고 얻었다는「갈근배미」, 굴밤 한말과 맞바꾼 「굴밤배미」, 찬물이 들어서 나락농사가 어려운「찬물배미」는 살사람도 없는 돌채도가리다. 마을 안에는「원터」「원새미」가 있는데 아득한 옛날 관아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죄인을 가두었던 집이 있었던 자리가「옥터밭」이고「망둥거리」「법수거리」등 모두 형옥과 관계되는 땅이름이다. 장(시장)이 섰다는「장태물」, 덜렁 들어 얹힌 밭이라고 「밭등때」는 서마지기 한 떼기 밭이다. 마을 서북쪽에「재골티」재는 모의골로 통하고「질미재(길마재)」는 운암상촌(굴바구)으로,「달분재」는 갑을로 넘어가는 잿길이다. 양천마을 앞산에는「그륵재(그릇재)」가 있는데 재라기보다는 언덕인데 도자기 부스러기가 많이 발굴되는 걸 보면 아마 도요지거나 고분자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논밭 다음으로 삶의 터전이었던 자굴산은 이 마을 사람들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무꾼, 풀꾼, 약초꾼들이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잠깐 쉬던 곳이라고「담배차미」(차미는 참(站)인데 쉴만한 곳을 뜻함)와「쉴보탄」도 있다. 아무리 추운 겨울철에도 눈이 쌓이지 않으며 바람도 비켜가는 볕바른 곳으로 오목하고 아늑한 자연지형이라 찾기 힘든 명당자리로 믿고 있는 「쉴보탄」이다. 또 「질미재」못 미친 중턱엔「약새미(약샘)」가 있어서 눈비가 내려도 얼지 않는 샘이고 생기한 풋내가 나는 물은 속병에 좋다고 소문난 약수다. 자굴산 등산로가 있는 「진등(긴등)」을 조금 오르면 호수설무덤(虎首穴墓)이라 해서 퍽 신기한 얘기가 전해진다. 통덕랑 허제(許梯)님의 묘로서 자손이 벌초를 하거나 성묘를 했다하면 그 날로 악질눈병이 생기고 돌까지 고생을 한다는 것이다. 한 두 번의 일도 아니라서 후손들은 면소재지에서 망배(望拜)성묘를 하고 있으며 벌초는 아예 타성사람께 맡겨놓고 있는 불가사의한 묘로 유명하다. 경주 김(金), 경주 최(崔), 나주 임(任)씨등 서너집이 머리(머루), 다래넝쿨 쳐내고 터 잡았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며 얼마 뒤 광산김씨가 들어와서 동네가 커졌다고 한다. 현재 담양 전(田)씨 35집, 경주 김(金)씨 8집, 밀양 박(朴)씨 5집에 다른 성받이는 서너집씩으로 1백호 넘던 대촌이 65집으로 줄었다. 동구밖에 경주 이(□)씨부인의 효부비가 있고 개울건너에 유서깊은 「죽림정사(竹林精舍)」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1

외조리

중촌마을

중촌마을은 의령군 칠곡면 외조리의 자연마을이다.

[면소재지 마을인데 옛날에는 노상 또는 질우마실(길위마을) 이라 했다. 그뒤 자굴산에서 내리 뻗는 산줄기의 모양과 지형지세 때문에 안쪽에 위치한 마을은 내조:안쪽 구시(구유)로 바깥쪽에 터잡은 마을은 외조라는 손쉬운 이름을 붙인것 같다. 우리 지명에는 이런 예가 허다하여 안팎자리 기준으로 내외를 많이 쓴 것이다. 정남향으로 앉은 마을은 동녘, 서녘, 웃땀 등 구별해 부르지만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중촌이 된 연유도 확실치 않지만 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또 큰길에 붙어 있는 뜸을 신당이라 부르는데 옛기록상으로는 신당이며, 서낭신을 모셨던 귀신집이 있었던 때문에 붙게 된 지명인데 이뜸에서 말할때는 중촌을 안땀으로 부른다.]2

도산리

수부마을

[칠곡면 소재지인 신데이(신당)서 약1km거리다. 제법 높은 산이 서남북을 에워싼 채 동쪽만 열린 골마을인데 꽤 오랜 역사를 가진 고촌이다. 기록상으로는 수동(壽洞)이라 돼 있는데 속칭「시부리」「시부령」이다. 연세 높은 어른들은 지금도 치실의 「시부리」라 부르고 있다. 농사짓기에 알맞도록 때맞추어 오는 비를 시우(時雨)라는데 이 시우란 말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앞 글자는 독음대로 읽고 뒤 글자는 훈을 따라 「시비」라 부른 것이 「시비리」·· 「시부리」·· 「시부령」등으로 연음된 것으로 보자는 설명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원래 물이 좋은 골이라서 수동(水洞)이라 했는데 풍수설 음양오행으로 보아 서북쪽이 막혀서 장수하는 이가 드물고 재물이 불어날 수 없는 곳이라 수(壽)로 바꾸었다고 하며 그런 뒤로는 살림도 늘고 수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뒤 오복 중의 버금복이란 부(富)를 덧붙여「수부동」으로 했다. 마을 앞으로 길게 흐르는「낙산도랑」은 여간 가뭄이 아니면 물길 끊어지는 일이 없다. 또 마을 서쪽「약새미(약샘)」물은 사철 그대로 솟는 물이며 여름철엔 얼음물이지만 삼동에는 「따신 숭냥(숭늉)」처럼 좋은 물이란다. 처음 마을터는 지금 동네위쪽 「야밭골 (또는 외밭골)」이었다고 하며 집이 늘어나면서 낮은 지대로 내려앉게 되었다고 한다. 동네 중간쯤 임자로 야트막한 산줄기가 뻗었는데 여러 대의 묘소이다. 그래서 「맷등(묏등)」이라 부르며 동구 밖에「새정지」라는 오목한 골은 옛날 큰 정자목이 있다. 그 아래「독재골」은 독산(禿山)으로 적고 있어 민둥산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을 조금 위에「부치골」이 있는데 한때 토기류 등이 발굴되었던 곳이라 그런 지명이 쓰인 것 같다. 마을 앞의 높고 긴 산골짜기가「뿔땅골」인데 아마 불교 번성기에 절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불당」이 된소리가 되어「뿔땅」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골안으로 들어가면「패랑마지골」이 있다. 옛날 잦은 난리를 당하여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숨겨 피란시켰던 피난(피란)골이란 말이 변음된 것으로 보이며 지형상으로도 피난처로서 적당한 곳이다. 골안으로 조금 더 가면 가파른 산고개가 가로 막는데 「질티골」「질티재」또는「감바구재」다. 진양땅 미천면으로 연결되는 옛 소로로 사람들 내왕이 많은 잿길이다. 또 마을에서 빤히 보이는 산고개가「고지미재」다. 확실한 뜻을 모를 고개이름이다.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 숯을 구웠던 곳이라「숯굴」(숯골),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솔밭골」, 큰 돌감나무가 있던 골짜기라「감남골」, 아주 솔직한 골이라「송골(손골)」, 산등대의 모양이 누에를 닮았다고「나비등」, 산이 울창했을 때 여우가 자주 나타나 울던 곳은「여시바구」라고 부른다. 치실 일곱골(일곱마을)중 역사가 오래된 동네에 속하며 서당을 겸했던 문화 류씨(□)재실 시우재(時雨齋) 가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 철거되었다. 마을 주위에 회산 황(黃)씨 선대 묘가 많은 걸로 보아서 가장 먼저 입촌한 것 같다. 허(許)씨 6집, 전(田)씨 3집, 김(金)씨 2집에 오(吳), 박(朴), 강(姜), 최(崔), 이(□), 여(余). 남(南)등이 겨우 한두집씩 분포돼 있다.]3

산남리

산북리

신포리

입암마을

4[칠곡면 소재지에서 의령쪽 1.5km쯤에 있는 마을로 가례면과 접경지이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옛날 지명은「선덤골」또는「선바구」라 불러오다가 한자표기를 하면서 서다(立)와 바구(바위.岩) 그대로 했으니 뿌리 있는 지명이라 할 것이다. 마을 뒤쪽 급경사지를 이룬 산골짜기의 중간지점 조금 위에 둑막이처럼 바위층이 가로막고 있다. 두 곳에 있어서 하나는「큰선덤」이고 하나는 「작은선덤」인데 여름철 우수기에는 볼만한 폭포(쏠)를 이루기도 한다. 이 덤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니 자연환경에 맞추어서 저절로 생겨난 소지명으로 분류될 것이다. 옛날에는 1백여 가호가 살았는데 특히 서너집씩 17개 성바지가 살아서 보기드문 동네였다고 한다. 남향받이 집이 대부분이고 북쪽반 자굴산 줄기로 막혀 있다. 마을 앞 제법 너른 들이 펼쳐져 있고 방갓산이 안산처럼 가깝다. 동네 뒤로는 운암상촌으로 통하는「기리재(기러기재를 줄인말)」내조 양천마을로 이어지는「첸재(체인재)」그리고 「바껏재(바깥재)」「안재(안쪽재)」등 산고개 잿길이 많았지만 이젠 흔적도 없이 잊혀져 버렸다. 「기리재」는 산줄기 모양이 기러기 같이 생겼다. 「기러기재」라 불렀던 것이 줄여서「기리재」가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 앞들을「버들」「질보들」이라고 한다. 이 마을과 이어지다시피 붙은 뜸이름이 「진목진」이다. 가례면 지역인데 동네 들머리에 기목나무 숲이 있고 조산이 있다. 동신제도 올리고 나들이하면서 돌도 포개면서 정신을 쓰던 곳이었다고 한다. 동네이름은 이 숲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기목 지목 진목으로 변음되고 「진」이란 끝자는 흔히 정(亭)을 쉽게 발음하면서 정 징이 진이로 변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결국「기목정」이 「진목정」으로 불리게 된 셈이다. 약 4백 년 전 청송 심씨(의령 심씨란 설도 있음)가 터를 잡았지만 다 떠나고 그 뒤 17성받이가 들어와서 큰 동네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경주 정(鄭)씨가 8가호, 김, 강, 남, 박, 서, 이씨 등 각 너댓집씩인데 12가지 성씨가 50여 호 살고 있다.]

칠곡면 역사, 여행지

자굴산

  • 칠곡면 내조리 일대

  1. [ ]의 내용은 경남 의령군 홈페이지 지명유래 ‘칠곡면 내조마을’에서 가져왔다. ↩︎
  2. [] 출처는 경남 의령군청 홈페이지 지명유래 칠곡면 중촌마을에서 가져왔다. ↩︎
  3. 경남 의령군 홈페이지 수부마을 ↩︎
  4.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입암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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