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 망운면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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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운면(望雲面)

망운면은 전라남도 무안군의 면이다. 무안국제공항이 자리하고 있으며, 광주광역시와도 가깝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교통의 편의성이 좋은 곳이다.

  • 조선시대 : 영광군 목장면
  • 1910년 : 망운면으로 개칭
  • 1914년 : 군, 면 폐합에 따른 무안군 편입
  • 1971년 : 망운면 운남출장소 설치
  • 1983년 : 운남출장소를 면으로 승격, 운남면과 분면

행정구역

법정리 / 목동리 목서리 송현리 탄도리 피서리

행정리 21개

인구 1,841면 남 948명 여893명

[지명유래]1

○ 목동리

목동리는 망운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경면과 망운면을 연결하는 77번 국도가 목동리를 두 곳으로 나누며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목동 목남 주교 압창 해 동 등 5개 마을로 구성된 목동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된 망운목장을 관리하는 목관의 동쪽에 속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목남리 단교리 신촌리 해동리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조 때 병사용이나 관청용으로 말을 길렀던 국영 목장은 전국에 21개소로 그 중 무안의 망운 목장을 포함한 5개 목장이 전남에 집중해 있었다. 이곳에는 현감이 나 찰방과 같은 직급인 종6품 감목관이 배치되고 말의 수효가 많아지면 속장이라 하여 분소를 두었다. 이중 무안의 망운 목장은 세 군데의 속장을 갖고 있었다. 문헌으로 목동리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목동촌 목남촌으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주교리 해동 목동리로 나오다 1917년의 자료에서는 망운면 목동리 목동 목남 주교리 신촌 해동으로 나온 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는 현재의 행정구역과 같은 망운면 목동리 목동 목남 하주교 압창 상주교 해동으로 표기되었다

목동 마을
망운면 목동리는 목동, 목남, 주교, 압창, 해동 등 5개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설치된 망운목관의 동편에 위치한다 하여 牧東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시 대까지는 영광군에 속해 있었으며 인조 때 감목관 설치로 영광군 목장면에 속하게 되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도 목동촌, 목남촌, 목서촌, 목북촌 등이 나온 다. 이 모두가 목관을 중심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감목관이 있던 東軒 건 물은 일제강점기 천주교당으로 팔려 지금도 천주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실지로 예 전에는 목동리를 목관 또는 목내라고 불렀다. 원래 현경면 외반리 지역은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으로 망운 목장지대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매부리에서 동산리 애북 마을 밑 압창포까지 토성이 있었음을 알 고 있었다. 이 토성은 반룡동 토성이라 불렀는데 망운목장의 군마를 방목하기 위해 축조한 토성으로 당시 다경면과 현화면의 경계 지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민들은 성들, 성안, 성 너머, 목장 성터, 성등 등의 지명을 말하고 있다. 당시 망운에서 관할했던 목장지는 세 군데였다. 현재 모두 신안군에 속해 있는 데 자은 목장, 장산 목장, 압해 목장이다. 조선시대에는 망운이 영광군에 속한 지역 이어서 감목관도 영광군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해서 관할 목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송현리 조금나루를 통해서 영광군으로 실어 날랐던 것이다.

압창 마을
압창 마을은 목동2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근대에 들어서 형성된 마을이다. 왜냐 하면 조선시대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도 나오지 않고 1914년 일본인에 의해서 실시된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에도 나오지 않았던 지명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 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포구가 개발되고 1923년에 이곳 압창과 현경면 동산리간 뒤이어 압창 조산 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 성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의 마을 이름은 鴨唱(표지석엔 鴨蒼이라 쓰였다)이었다. 마을 앞까지 갈매기 떼가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많이 모여드는 지역이라는 의미다. 당시에는 갈매기 떼 가 들판을 덮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押倉으로 쓰고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곡물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하주교 마을
주교[舟橋]라는 마을 이름은 1789년에 제작한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 에 나온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비로소 망운면 주교리로 나온다. 망운면 소재지와 현경면 소재지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마을 앞이 바다여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 하여 배다리 [舟橋] 또는 배달이라 하였다. 현재 는 일제시대 때 두 차례의 간척사업 그리고 1980년대의 창포만 간척사업으로 바닷 물이 들어왔던 곳은 농경지가 되었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주교 마을로 불려졌는데 인구가 늘자 윗배다리, 가운데 배다리, 아랫 배다리로 나누어졌다. 이어 1980년대에 들어서 상주교와 하주교로 분리되었으며 하주교는 목동3리에 속한다. 下舟橋는 809번 지방도로 아래쪽에 있으며 원래 지명이 갈머리였다. 지형이 까 마귀를 닮은 형상이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다 1986년 가운데배다리[中舟橋] 와 합쳐지면서 현재의 하주교로 굳어진 것이다. 현경면 소재지에서 망운면 쪽으로 상주교를 지나면 나오는 마을로 망운면 소재지 바로

상주교 마을
주교[舟橋]라는 마을 이름은 1789년에 제작한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 에 나온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비로소 망운면 주교리로 나온다. 망운면 소재지와 현경면 소재지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마을 앞이 바다여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 하여 배다리 [舟橋] 또는 배달이라 하였다. 원래 는 주교 마을로 불려졌는데 인구가 늘면서 윗배다리, 가운데 배다리, 아랫 배다리로 나누어졌다. 이어 1980년대에 들어서 상주교와 하주교로 분리되었으며 상주교는 목 동4리에 속한다. 원래 舟橋는 과거에 河川에서 배를 엮어 다리로 이용하면서 불려졌던 명칭인데 자세한 기록이 전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 후기 정조의 화성(華城:水原) 行次를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한 경우이다. 이 이후부터 배다리라는 지명이 전국에서 쓰이게 되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육지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들어왔던 곳이 나 배를 이용해 물을 건너는 곳에 배다리라는 지명이 보인다. 일로읍 광암리의 배 다리라는 지명이 그런 경우이다.

해동 마을
해동은 목동5리에 속하는 마을로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면 방향으로 1㎞ 쯤 가 다가 고가도로 밑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원래 마을의 이 름은 밤까시[栗村 또는 栗洞] 또는 빵까시라 하였다. 마을의 지형이 밤알의 형국이 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이름을 강하게 발음할 때는 어감이 좋지 않았다. 또한 얼마 전까지 마을 군데군데 밤송이를 뜻하는 흙무더기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해서 100여 전 남씨들이 당시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바다를 생업의 터로 잡고 있 어서 마을 이름을 해동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원래 마을 이름이 갯마을 또는 바닷골을 의미하는 海洞으로 표기 하였으 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海東으로 바뀐 것이다. 이후 주 민들이 海洞으로 고쳐줄 것을 수차례 건의했으나 아직도 행정명으로는 海東으로 표 기되고 있다. 조선시대 문헌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이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 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海洞으로 나온다

목남 마을
망운면은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던 지역이 아니라 목장을 관할하던 관청인 감 목관이 있었던 곳이다. 목관 터는 현재 망운초등학교 체육관이 있는 자리에 있었으 며 당시 망운에서 관할했던 목장지는 세 군데로 지금은 모두 신안군에 속해 있는데 자은목장, 장산목장, 압해목장이다. 현재 망운면의 소재지는 예전에 목관 또는 목내 라고 부르는 곳을 사등분하여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목동, 목남, 목서, 목북으로 나 누어 부르고 있다.

○ 목서리

망운면은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던 지역이 아니라 목장을 관할하던 관청인 감 목관이 있었던 곳이다. 목관 터는 현재 망운초등학교 체육관이 있는 자리에 있었으 며 당시 망운에서 관할했던 목장지는 세 군데로 지금은 모두 신안군에 속해 있는데 자은목장, 장산목장, 압해목장이다. 현재 망운면의 소재지는 예전에 목관 또는 목내 라고 부르는 곳을 사등분하여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목동, 목남, 목서, 목북으로 나 누어 부르고 있다. 이 목내를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목성이라 부르기도 하 며 대체적으로 나무의 수령은 300여년이 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추정컨대 목관이 설치되면서 심은 나무들로 여겨진다. 나무로 둘러싸인 소재지는 오목한 분지의 형 태로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영광군에 속해 있었으며 인조 때 감목관 설치로 영광군 목장면으로 불리게도 되었다. 목서리는 목관의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목서, 내덕, 외덕, 장재, 목 북, 대곡 등 6개의 자연 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里의 중앙으로는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밖으로는 망운-현경 간 외곽도로가 지나고 있다. 처음엔 영광군 망 운면에 속했다가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목북리, 덕림리

목서 마을
목서 또는 원목서는 목서 1리에 속한 마을로 예전엔 서촌이라 부르기도 하였 다. 원래 목북 마을과 행정구역이 같았으나 인구 증가에 따른 1992년 행정구역개편 으로 분리되어 현재 목북 마을은 목서5리에 해당한다. 이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목내 의 다른 마을처럼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목관이 들어서면 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마을의 형성 시 기는 조선조 인조 [仁祖, 1595 – 1649]때에 목관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400여 년 전 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789년에 조선왕조에서 발행한 호구총수에도 영광 군 망운면 목서촌으로 나온다. . 분지형인 이 마을을 팽나무 와 느티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는데 목성이라 불렀으며 대체적으로 수령이 300여년 이 넘는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숲을 이루게 된 동기는 세 가지의 이유가 전 해지고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지형이 나무를 심어야 번창하게 된다는 비보설에 따라 나무를 심 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목내가 여성을 상징하는 모습이어서 숲으로 보호해야 집안 이 편안할 수 있다는 풍수설에 영향을 받아 심은 것이다. 세 번째는 말들이 도망가 – 22 – 지 못하도록 역할을 하는 울타리였다는 것이다. 해서 나무도 처음엔 대단히 촘촘히 배치됐었다고 한다. 오늘날 망운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면서 이곳을 보 면 이 목내 촌이 아늑하고 전형적인 전원도시의 이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현재 이러한 나무들 중 상당수가 고사되고 베어졌지만 이 마을을 비롯한 목북의 나무들은 많이 남아있다. 주민들의 관리도 있었겠지만 팽나무가 있는 부지가 개인 소유가 아닌 국가의 땅이기 때문에 보호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목동이나 목남의 나무들은 개인 소유의 땅에 심어졌기에 관리가 소홀해 졌다.

내덕 마을
내덕은 목서 2리에 속한 마을로 외덕 마을과 같이 붙어있다. 원래 내덕과 외덕 은 한 마을로 德林이라 불렀다. 덕림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德雲山에서 비롯되 었다. 마을이 형성될 때 입향조가 덕운산 아래에서 터를 닦았기 때문이다. 덕운산은 세항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김해김씨 조상묘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마을 주변 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많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마을 을 둘러싸고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도 덕운산의 德과 소나무 숲의 林이 만나서 덕 림이 되었다.

대곡 마을
대곡은 목서3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마을은 소쿠리 형으로 해안 쪽을 향해 오목 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학이 먹이를 찾아 날아가는 형국인데 마을 주변에 있는 뱀과 우렁이를 보고 쫒아가는 형국이다. 뱀은 마을의 해안선을 따라 왼쪽으로 뻗어 있는 능선을 말하는데 주민들은 머리 부분에서 끊어졌다고 보고 있 다. 이 끊어진 부분을 이으면 마을에 불구자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전해지 고 있다. 우렁이는 요강섬을 말한다. 마을유래기에는 이 마을의 유래를 ‘지세가 학 같은 모양으로 학이 집을 짓고 살 았다 해서 한실 또는 대곡이라 칭하였다’로 기록하고 있다. 즉 학(鶴)이 머무는 골 짜기인 학곡(鶴谷), 학실(鶴室)로 불리다가 한실로 발음되면서 이를 한자로 옮길 때 현재의 대곡으로 바뀌어 지지 않았는가 유추해볼 수 있다. 참고로 마을 이름은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자료부터 망운면 대곡으로 나 온다.

외덕 마을
외덕은 목서 3리에 속한 마을로 내덕 마을과 같이 붙어있다. 원래 내덕과 외덕 은 한 마을로 德林이라 불렀다. 덕림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德雲山에서 비롯되 었다. 이는 마을이 형성될 때 입향조가 덕운산 아래에서 터를 닦았기 때문이다. 덕 운산은 조그마한 산이지만 홍주 송씨 문산으로 한켠에 김해김씨 묘와 양성이씨 묘 가 있다. 지금도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많은 소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도 주변 환경의 영 향을 받아 덕운산의 德과 소나무 숲의 林이 만나서 덕림이다.

목북 마을
망운면은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던 지역이 아니라 목장을 관할하던 관청인 감 목관이 있었던 곳이다. 목관 터는 현재 망운초등학교 체육관이 있는 자리에 있었으 며 당시 망운에서 관할했던 목장지는 세 군데로 지금은 모두 신안군에 속해 있는데 자은목장, 장산목장, 압해목장이다. 현재 망운면의 소재지는 예전에 목관 또는 목내 라고 부르는 곳을 사등분하여 방위에 따라 목동, 목남, 목서, 목북으로 나누어 부르 고 있다. 이 목내를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목성이라 부르 기도 하며 대체적으로 나무의 수령은 300여년이 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무로 둘러싸인 소재지는 오목한 분지의 형태로 아늑한 느낌을 주는 지형이다

장재 마을
장재는 목서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마을이 형성된 역사가 짧다. 원래는 옆 마을 인 대곡과 한 마을이었으나 1980년대에 분리(分里)가 되면서 대곡은 목서3리, 장재 는 목서6리가 되었다. 조선시대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목서촌만 나오나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장재동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망운면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있어 ‘長子’ 로 불려오다가 후일 현재의 ‘壯才’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 은 어떻게 해서 장재로 불리게 되었는지 오히려 궁금해 했다. 마을회관 앞에는 부 자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현재는 빈자리로 남아있는데 왜 집을 짓지 않느냐는 물음에 주민들은 예부터 그 자리에 집을 지으면 孫이 없다 해서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 피서리

皮西里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져 있다. 간척사업(톱머리와 청계면 도대리의 머구리 섬과 연결)으로 농경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서쪽은 바 다와 접하여 있다. 피서리는 피란지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 되었다가 1914년 피동리, 조산, 도무리, 율리와 용교리 그리고 두모리 일부를 병합 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용교 조산 피동 피서 정착 용호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피동 피서 용호 마을은 무안국제공항 건설에 편입되어 버리고 현재는 용교 조산 정 착 톱머리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피서라는 지명은 避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조선중엽 국정이 혼란하고 민심이 소란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이 세 상을 피할 수[避世] 있는 곳이라 여겨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다 현재 쓰고 있는 皮西로 바뀌었는데 避世에서 皮西로 바뀐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피서리의 주산인 솔개산을 중심으로 하여 피난지의 동쪽을 나타내는 피동과 서쪽을 나타내는 피서로 구분되지 않았을까 추정 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해수욕장이 있어서 더위를 피하는 마을이란 뜻 의 避暑라 했다거나 주변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솔개산을 넘어서 서쪽으로 피난을 왔다는 의미의 避西 마을이라고도 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栗 里 皮東村 皮西村으로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무안군 망 운면 舂橋里 造山里 栗里 皮東里 皮西里 龍湖里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망운 면 피서리 舂橋里 造山里 栗里 皮東里 皮西里 桃茂리, 1987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피서리 용교 조산 피동 피서 정착 용호로 나온다.

용교 마을
용교는 피서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에서 쓰는 이름과 행정에서 사용하는 이름 이 다르다. 마을에서는 용교라 부르는데 각종 행정 자료에는 춘교로 나온 것이다. 원래의 지명은 마을의 형국이 방아다리(디딜방아라고도 하며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 는 농기구를 말한다) 모습이라 마을 이름을 舂橋라 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 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입구의 지형이 디딜방아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 다. 그런데 한자의 舂은 ‘찧을 용’으로 ‘봄 春’ 字와 비슷하다. 해서 1912년의 지방행 정명칭일람이나 1917년 조선면리동 일람에도 심지어 1987년의 행정구역일람에도 피 서리 춘교로 나온다. 이 마을은 새터 방아다리 확골 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새터는 방아다리 옆에 있는 마을로 새로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확골은 용교와 조금 떨어진 마을로 정착 마을 옆에 있으나 용교와 한 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학동 또는 학골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표기도 춘교와 마찬가지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다. 확골 은 확돌(돌절구)에서 나온 말로 예전에 곡식을 갈거나 고추 등을 빻을 때 사용하던 것으로 둥그런 돌을 우물처럼 파내어 그곳에 곡식이나 고추 등을 넣고 갈거나 빻아 사용하는 기구이다. 확골이 현재의 학골로 변한 것은 발음의 편의성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며 臼(절구 구, 확 구)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산 마을
이 마을은 원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피 동리 조산 도무리 율리와 용교리 두모리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 재 피서리에는 용교, 조산, 정착, 톱머리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조산은 율리 (밤골)와 함께 피서2리에 속한다. 造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숲이 형성되어 산을 이루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속설 때 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목내에 있는 통샘이 여성의 성기를 닮 아 비보를 하지 않으면 목내의 남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해서 통 샘에서 마주 보이는 이 마을에 우뚝 솟은 산을 조성했는데 그 이름이 조산이다. 마 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마을 가운데에 산이 있고 그 산 속에 절이 있어서 경관이 훌륭하다 하여 ‘造山’ 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 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정착 마을
정착마을은 망운면소재지에서 운남 방면으로 1㎞ 쯤 가다가 좌회전해서 공항 쪽 으로 가면 나오는 마을로 망운국제 공항 비행장 활주로와 병립해서 마을이 위치하 고 있다. 행정구역명은 망운면 피서3리 정착마을이다. 원래는 당산끝머리라는 이름 의 마을로 정착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세 가구가 살았었는데 현재는 한 가구도 남 아 있지 않다. 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피난민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한국전쟁 이후 대체로 북 쪽 서해안 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내려와 무안을 비롯한 진도나 목포 등 전남 각지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1956년 보사부의 피난민 입주 정책으 로 망운면 피서리 산 69번지 98정보의 땅에 100세대 497명이 정착하면서 건설된 마 을이다. 원래 이 마을 주민들은 정착이라는 이름을 싫어해서 정착농원이라 부르던 때도 있었다

톱머리 마을
톱머리는 피서4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용호동과 같은 행정구역이었다. 용호 동이 무안공항 부지로 편입되면서 2000년대에 분리되어 나온 마을이다. 이곳은 톱 머리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해안은 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 펼쳐지는 끝없 이 넓은 백사장과 보호림으로 지정된 울창한 해송 숲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 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창포만 간척으로 인한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톱머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당농원 쪽에서 공항로를 따라 오다가 보면 톱머리 해수욕장과 무안국제공항으로 가는 삼거리가 있다. 그곳 에서 해수욕장으로 들어오는 언덕을 넘어 오른쪽에 바위산이 있었는데 이곳에 길이 나기 전에 이 바위의 모습은 동물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코뺑이’라고 부 르는 이 바위가 거북이 머리라고 보기도 하고 토끼머리라고 보기도 하는데 많은 사 람들은 토끼머리라고 했다. 탱크의 모습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톱머 리는 토(兎)머리에서 비롯된 음운변화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1917년 일제강점기 때 펴낸 조선면리동일람에서 망운면 桃茂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의미로 본다면 복숭아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는 마을이라는 말인 데 추측컨대 당시 과수농장에서 비롯된 지명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후의 자료에는 桃茂리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고 2,000년대에 와서야 독립된 마을로 표기되었다

피서 마을
皮西里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져 있다. 간척사업(톱머리와 청 계면 도대리의 머구리 섬)으로 농경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서쪽은 바다와 접하 여 있다. 피서리는 피란지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인할 수 없 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피동리, 조산, 도무리, 율리와 춘교리 그 리고 두모리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용교 조산 피동 피서 정착 용 호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피동 피서 용호 마을은 무안국제공항 건설에 편입되어 버 리고 현재는 용교 조산 정착 톱머리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피서라는 이름은 避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조선중엽 국정이 혼란하고 민 심이 소란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이 세상 을 피할 수[避世] 있는 곳이라 여겨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현재 쓰고 있는 皮西로 바뀌었는데 避世에서 皮西로 바꾼 정확 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용호 마을
龍湖는 피서4리에 속하는 마을로 지형의 특성을 따 붙여진 이름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마을에 솔개재라는 곳이 있는데 톱머리 쪽으로 뻗어 나와 마치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하단 좌우편으로 바다를 끼고 호수와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하여 용과 호수의 유래에서 龍湖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 다. 즉 마을이 용머리에 해당하고 꼬리가 톱머리 부분으로 뻗어 있으며 용머리 좌 우에 호수들이 있어서 용호라 불렀다는 것이다. 용호동은 성하시라고도 불렀는데 성하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피동 마을
皮西里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져 있다. 간척사업(톱머리와 청 계면 도대리의 머구리 섬)으로 농경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서쪽은 바다와 접하 여 있다. 피서리는 피란지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피동리, 조산, 도무리, 율리와 춘교리 그리고 두모리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 군에 편입되었다. 용교 조산 피동 피서 정착 용호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피동 피서 용호 마을은 무안국제공항 건설에 편입되어 버리고 현재는 용교 조산 정착 톱머리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피서라는 지명은 避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조선중엽 국정이 혼란하고 민 심이 소란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이 세상 을 피할 수[避世] 있는 곳이라 여겨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현재 쓰고 있는 皮西로 바뀌었는데 避世에서 皮西로 바꾼 정확 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피서리의 주산인 솔개산을 중심으로 하여 피난 지의 동쪽을 나타내는 피동과 서쪽을 나타내는 피서로 구분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해수욕장이 있어서 더위를 피하는 마을이란 뜻의 避暑라 했다거나 주변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솔개산을 넘어서 서쪽으로 피난을 왔다는 의 미의 避西 마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현재 쓰고 있 는 영광군 망운면 栗里 皮東村 皮西村으로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 칭일람에는 무안군 망운면 造山里 栗里 皮東里 皮西里 龍湖里로 나온다.

○ 송현리

松峴里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면 쪽으로 2㎞ 가량 떨어져 있으며 좌우로 바 다와 접해 있다. 이 지역은 소나무가 우거진 재[峙] 주변에 있다하여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하였는데 두모, 용동, 원송현, 성동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 대는 영광군 망운면 지역이었다. 이후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 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종리 성동리 두모리를 합하여 송현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789년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 斗毛村 儒宗洞 所落只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망운면 斗牟리 儒宗리 松峴리 星洞으로 표기되었다. 이어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망운면 송현리 유종 리 송현리 성동 두모리로 그리고 1987년에는 망운면 송현리 두모 용동 송현 성동 유종동으로 나온다.

두모 마을
두모는 월곡과 함께 송현1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큰 마을 작은 마을로 불려지기 도 하는데 작은 마을에 해당되는 월곡은 200여년 전에 파평윤씨 月谷 윤상은 윤참 봉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윤은보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하나 마을 앞 파평윤씨 집안의 무덤에 있는 비문과 월곡이라는 마을이름을 볼 때 윤상은 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파평윤씨의 족보를 볼 수 없어 서 더 이상의 확인은 할 수 없었다. 마을 앞에는 재잣등이라는 산이 있으며 산 아 래에 확골이라는 들이 있다. 큰 마을에 해당하는 두모 마을은 김해김씨 金瑞甫(1584 – 1642)에 의해서 마을 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터를 닦은 연대는 경상도 김해에서 이곳으로 온 16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에 주변의 풍광과 풍수적인 지형을 봤을 때 좋은 터였음 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이름의 한자 표기가 잘못 되었다. 마을 유래지에는 ‘토지가 비옥하여 보리 가 많이 생산된 지역으로 마을 근처에 조금나루가 있어 國稅를 바칠 때 각처의 大 麥을 이 마을로 가지고 와 말 소작했다 해서 말 ‘斗’자와 보리 ‘牟’자를 합해서 斗牟 라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지세를 바탕으로 한 이름인 斗毛라 해야 한다 는 것이다. 즉 마을의 지형이 꿩이 엎드린 형국[伏雉]이기 때문이다. 현재 곰솔나무 주변의 창령조씨 무덤이 복치 형국이다. 비행장으로 편입된 피서리의 일부가 솔개 – 59 – 재에 해당하는데 그 솔개가 꿩을 노리고 있어 이 마을의 꿩은 비상하기 위해 엎드 린 자세로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斗牟가 아니라 斗毛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알고 있듯이 斗毛雉(두모치 – 두무치로 음운 변화) 마을이다. 꿩알바위 도 있다. 주민들은 공알바위라 부르기도 하는데 풍수적 지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당산나무 옆에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斗毛村으로 나온다. 그 러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부터는 무안군 망운면 斗牟里로 나온다

용동 마을
용동 마을은 망운면소재지에서 운남면 방면으로 3㎞ 쯤 가면 나오는 마을로 망 운 – 운남 간 도로 옆에 형성되어 있다. 행정 구역명으로는 망운면 송현2리 용동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용동’ 마을 이름의 유래를 ‘마을의 형태가 용이 S자 모 양으로 누워있는 것처럼 길쭉하게 생겼다하여 용골이라 하였다가 지금은 龍洞으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도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솔고개 마을
송현(松峴)은 원송현 마을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송현3리에 해당한다. ‘솔애기’ 또 는 ‘송악’으로 불려지다가 현재의 이름인 송현으로 바뀌어졌다.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쪽으로 3㎞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우회전 하여 다시 2㎞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송현은 송림이 많은 고개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솔고개’ 또는 ‘솔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금은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소나무를 많이 없애버려 마을 뒤는 민둥 고개가 되었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소나무는 과거에 울창했던 소나 무 숲을 연상케 한다. 실지로 마을 앞 조금 나루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성인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 쌀 수 없는 크기의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림자만 해도 200평이 넘는다는 나무였 다. 그런데 일제 말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강제로 송진 채취를 하게 되어 이 소나무 도 그때 피해를 입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이 소나무를 일본인들이 자를 때 소나 무가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소나무는 인근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 의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며 마을 이름을‘松 峴’이라 하는 원인 제공을 하기도 하였다

성동 마을
송현(松峴)은 원송현 마을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송현3리에 해당한다. ‘솔애기’ 또 는 ‘송악’으로 불려지다가 현재의 이름인 송현으로 바뀌어졌다.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쪽으로 3㎞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우회전 하여 다시 2㎞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송현은 송림이 많은 고개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솔고개’ 또는 ‘솔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금은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소나무를 많이 없애버려 마을 뒤는 민둥 고개가 되었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소나무는 과거에 울창했던 소나 무 숲을 연상케 한다. 실지로 마을 앞 조금 나루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성인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 쌀 수 없는 크기의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림자만 해도 200평이 넘는다는 나무였 다. 그런데 일제 말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강제로 송진 채취를 하게 되어 이 소나무 도 그때 피해를 입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이 소나무를 일본인들이 자를 때 소나 무가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소나무는 인근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 의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며 마을 이름을‘松 峴’이라 하는 원인 제공을 하기도 하였다. 星洞 마을은 조금나루길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있다. 마을의 형성은 유종동 마을보다 늦었다. 최초의 입향조는 김해김씨로 250여년 전에 들어왔다. 원래의 마을 이름은 풍수적 지형을 바탕으로 鼠隱洞이라 하였는데 마을 의 지형이 쥐가 숨어있는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실지로 맞은편 마을인 운남면 하묘1리 두곡 마을이 고양이 형국(족제비형국이라고도 한다)으로 상극을 이루고 있 다. 이런 이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부르기 좋게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실지로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처음으로 星洞이란 지명이 나온다.

○ 탄도리

탄도 마을
탄도는 송현리 조금나루에서 직선거리로 3㎞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이다. 면적은 16만여평, 해안선 길이는 4.5㎞. 그리고 남과 북의 길이는 1㎞ 정도이며 지질은 대 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행정구역명으로는 망운면 탄도리 탄도 마을이다. 마을 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배가 물때(아침 저녁으로 조수가 들어오고 나가는 때)에 따라 하루에 두 차례씩 조금나루와 연결되고 있으며 소요시간은 10분에서 20여분이 걸린다. 문헌으로 지명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자료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현화 면 炭島리로 나온다. 이후 일제강점기 자료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다 1987년 행정구역일람에서 망운면 탄도리 탄도로 나온다. ‘탄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보면 원래 나무가 무성하여 숯을 많이 산출하므로 탄 도(炭島)라 하였다고 이야기들 하나 지명의 한자 표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섬의 크기로 봤을 때도 숯을 만들 만큼의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고는 볼 수 없다. 문헌상으로 炭島라고 표기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식으로 표기할 수는 없었을까 생각해본다. 지형상으로 봤을 때 탄도를 사이에 두고 서해안의 물줄기가 운남면과 망운면으 로 갈리어 나가는 여울목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원래 지명이 ‘여울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숯섬’을 뜻하는 ‘炭島’ 보다는 ‘여울목’을 뜻하는 ‘灘島’가 적합한 표기라 여겨진다.

  1. 출처, 이 글은 무안문화원에서 작성된 [망운면보고회]를 대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자료는 무안군 홈페이지(http://www.muan.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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