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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지역개요
부산광역시 남구는 부산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현금융단지가 들어선 곳으로 부산의 서면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안리 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수영구와 닿아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으로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다. 남구 대연동은 현재 대연혁신지구로 지정되면서 점차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구의 법정동과 행정동
남구 법정동
감만동 대연동 문현동 용당동 용호동 우암동
남구 행정동
대연1동 대연2동(없음) 대연3동 대연4동 대연5동, 대연6동, 용호1동, 용호2동, 용호3동, 용호4동, 용당동, 감만1동, 감만2동, 우암1동, 우암3동, 문현 1동, 문현2동, 문현3동, 문현4동
남구의 지명유래
남구(南區)
조선시대 남면과 용주면 일대였다. 남구의 지명은 조선시대 남면에서 왔다. 동래가 중심있던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문현동과 대연동은 남쪽이다.
감만동 (戡蠻洞)
신선대 컨테이너 부두가 있는 곳이다. 감만의 뜻은 ‘오랑캐를 이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랑캐는 일본의 왜군을 뜻하며, 임진왜란 시절 조선수군이 부산포해전에서 왜적과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한 이름이다. 1979년 감만동에서 감만1동과 2동이 분동했다.
대연동(大淵洞)
경성대학교와 부산시립박물관, 유엔공원이 있는 곳이다. 옛 이름은 못골인데 대연은 못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못골은 큰 못이란 뜻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큰 못이 아닌 ‘많은 못’이라고 해야한다. 현재 못골시장을 주변으로 옛날에는 수많은 못(둠벙)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황령산 자락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현재의 대연동 자리를 흐르면서 많은 못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래부지에는 못골이 ‘생천언’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현동(門峴洞)
동천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으로 서면과 닿아 있다. 우암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한다. 문현이란 지명은 옛지명인 지겟골 또는 찌께골에서 왔다. 지게는 짐을 지는 지게가 아니라 마루나 바깥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곳에 문종이로 두껍게 싸서 바른 외짝문을 뜻한다. 즉 문현동은 문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현재도 문현교차로는 번영로로 올라가는 입구이기도하고, 터널이 없던 시절 남포동이나 서면등에서 광안리나 해운대로 넘어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그 첫 고개가 대연고개였다.
용당동(龍塘洞)
용당동은 지리적으로 남구의 거의 중심에 해당되지만 부산전체에서는 상당히 외곽에 속하는 지역이다. 동명대학교가 있고, 신선대가 자리한 곳이다. 신선대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이곳에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던 곳이다. 용당이란 지명은 용당리 중간 큰 못이 있었는데, 이 못을 둘러싼 산세가 용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도면 부산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의외로 많다. 용두산, 용미산, 용호동 등이 있다.
용당의 뜻은 용의 집이란 뜻이지만 용이라는 해신을 모신 집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2 화명동에도 동일하게 용당마을이 있다. 용에대한 상징적 의미들은 아래의 글을 참조해 보자.
용호동 (龍湖洞)
남구의 가장 남단이자 끝에 자리한다. 북서방향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바다를 접한다. 오륙도와 이기대가 있는 곳이다. 이기대는 한 때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1993년에서야 민간이 출입이 허가되었다. 조선시대 당시 분포리, 또는 분개(盆浦)3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분개는 염전을 만들 때 사용되는 큰 구덩이를 뜻한다. 현재는 전혀 예측할 수도 없는 모양새지만 매립되기 전에 아마도 큰 염전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용호라는 이름은 일본이 이 지역에서 나오는 소금을 수탈하기 위하여 ‘용호’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용호라는 지명은 원래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일제는 분개를 버리고 용호라는 다른 지명을 사용했다.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용호라는 이름은 용당의 다른 이름으로 용의 모양을 한 호수와 같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왜 아직도 일제가 만든 용호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용호라는 지명이 원래 있었다고 하지만 굉장히 불쾌하다.
우암동(牛岩洞)
남구의 남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한우를 빼가기 위해 우막을 설치한 곳이다. 해방 후 우막으로 사용된 곳은 집이 없던 사람들과 6.25 전쟁으로 인해 피난 온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되었다. 포구의 언덕에 소를 닮은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소바위로 불리면서 우암동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일제가 매축을 하면서 바위를 없앴다. 조선시대에도 이미 우암포라는 지명을 등장한 것을 보면 ‘우암’이란 지명은 꽤나 오래 된 듯 하다.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부산광역시 남구 ↩︎
- 용과 관련되 지명은 전국에 1261개로 전남 310개, 전북 229개, 경북 174개 순으로 많고, 부산에는 7개가 있다고 한다. ↩︎
- 분개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LG메트로시티(구, 동국제강) 주변이다. 현재의 용호1동과 3동 위쪽 지역을 분개라고 하였다. 바닷물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 모양의 염전이 있는 ‘갯벌’이란 뜻으로 분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출처 부산남구청 행정구역 용호동]
2013년 9월 6일자 “부산 용호동의 지명 유래 알고보니”에 1946년에 찍은 염전 사진을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