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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산진구의 지리적 특성
부산진구(釜山鎭區)는 지리적으로 부산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서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부산진구는 모든 교통의 중심이자 부산 산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신발공장이 대거포진하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부산의 발전은 부산진구의 발전과 함께 한다해도과언이 아니다.
부산의 위성지도를 보면 터널이 뚫리기 모든 길은 서면교차로를 중심으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서면을 중심으로 서쪽은 북구, 사상구, 사하구가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동래구와 금정구가 있고, 동쪽으로 황령산에 막혀 있기는 하지만 연제우과 수영구, 해운대구가 자리한다. 남쪽으로는 동구, 중구, 서구, 영도구가 있다. 서면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평지가 나있고, 남쪽으로, 서쪽으로 나 있다. 유일하고 동쪽이 황령산에 의해 막혀있다.
부산진구는 부산시 진구가 아니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필자도 불과 수년전에다 그 사실을 알았다. 그곳에 살지 않거나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면 부산진구를 ‘부산시 진구’로 아는 이들이 꽤 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이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그런데 굳이 ‘부산’이란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도록 한 이유가 뭘까?
부산진구 법정동 및 행정동
부산진구 법정동
가야동, 개금동, 당감동, 범천동, 부암동, 부전동, 양정동, 연지동, 전포동, 초읍동
부산진구 행정동
부전1동 · 부전2동 · 연지동 · 초읍동 · 양정1동 · 양정2동 · 전포1동 · 전포2동 · 부암1동 · 부암3동 · 당감1동 · 당감2동 · 당감4동 · 가야1동 · 가야2동 · 개금1동 · 개금2동 · 개금3동 · 범천1동 · 범천2동
부산진구 지명유래
부산진구(釜山鎭區)
부산진구의 지명유래는 ‘부산진성’에서 왔다. 하지만 알다시피 부산진성은 동구 좌천동에 있다. ‘부산진’으로 사용되는 부산진성, 부산진역, 부산진시장 등은 모두 동구에 자리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서면도 동래구 서면이다. 그런데 서면이란 이름을 부산진구에서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 뭔가 이상한 동네다. 이러한 상황들을 보면 부산진이란 이름이나 서면 등은 이 지역이 부산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의 번화가, 정신적인 중심은 남포동, 광복동 주변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지금의 서면교차로 중심으로 점점 건너가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해운대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해운대로 화려함이 서서히 건너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서면이 외진 곳이었나? 물론 아니었다. 지금도 진양 교차로를 중심으로, 개금동에, 당감동에 수많은 신발공장이 있었고, 대부분의 공장들의 노동자들은 당감동과 서면 교차로 주변, 가야동 등에 살았다. 그들이 쉽게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서면 교차로 주변 번화가였다. 1980년대 태화 백화점 주변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다. 하기야 그 당시 붐비지 않았던 곳이 있기나 할까? 하여튼 그런 때가 있었다. 지금도 서면 교차로 중심으로 번화가가 형성되어 있다.
가야동(伽倻洞)
가야동은 서면에서 사상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하며, 부암동과 개금동 사이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가야면이었다. 정확한 지명유래는 없다. 몇 가지의 설이 있다.
- 고대 가야국에서 유래되었다.
- 수정동에서 넘어오는 감고개, 가모모개, 가마고개에서 유래했다.2
우리는 어는 것이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현재의 개금동과 가야동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가야’로 불렸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부분 농경지였으니 공장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변화 되었다. 지금은 공장은 대부분 사라지고, 주택지로 개발되고 있다.
개금동(開琴洞)
개금동은 조선시대 동래군 동평며 와요리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서면에 편입되어 ‘개금리’로 불렸다. 하지만 1959년 재편되면서 가야동에 속하게 된다. 그러다 인구가 많아지면서 1963년 분동되어 다시 개금동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개금은 ‘가야금’에서 왔다. 마을 모양이 거문고 같다하여 생겼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들려오는 가야금소리를 듣고 정착했던 설이 있다. 무엇이 옳은지는 분명치 않으나 거문고나 가야금과 인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상구와 부산진구의 경계에 있는 곳으로 행정적으로 부산진구에 속하지만 정서적으로 사상구에 속한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금과 주례를 한동네 취급하는 성향이 있다. 아마도 개금이 고개의 언덕에 자리하다보니 주택 외에는 별다른 부대시설이 없어 입지감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감동(堂甘洞)
당감동은 조선시대 동래군 동편면에 속하다 일제강점기 때 당감리가 되었다. 당감리는 ㄷㅇ리와 감물리가 합성된 단어다. 두 마을을 하나로 묶으면서 당감동이 된 것이다. 당리는 마을에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감물리는 당감천의 옛이름인 감물내, 감무천에서 왔다.
범천동(凡川洞)
범천동의 유래는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범천에서 유래했다. 범천의 현재 이름은 동천이다. 동천은 부산진성 동쪽에 흐르는 천이라하여 붙여진 것이다. 범내골과 접하고 있으며, 동일한 호랑이 범을 사용하며, 기원 역시 동일하다. 이하는 동구의 범천동을 참고 바람.
부암동(釜岩洞)
부암동은 암은 바위 암岩을 사용하고 있다. 서면교차로 서쪽에 자리하면 당감동과 가야동을 접하고 있다. 진양교차로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지명이 말해주듯 부암동은 바위가 많은 곳이다.
모든 지역에 바위가 많았던 것이 아니고 현재 초읍에서 당감으로 넘어가는 새부암고개 근방에 거대한 바위들이 잇었다고 한다. 현재 미주아파트가 지어진 주변이 수많은 바위가 즐비했다고 지역 주민들은 회상하고 있다.
큰 바위들이 많아 풍광이 좋아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에서 유랑을 즐겼으며, 이곳을 신선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산 아파트 위로 있는 산동네를 신선마을로 부르고 있다.
부전동(釜田洞)
부전동은 부산의 밭이란 뜻으로 전포동과 더불어 ‘서면’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두 곳 지명 모두 밭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서면 교차로를 중심으로 평평한 밭이었음을 말해 준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서면 교차로 중심을 보면 대부분 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평지가 유난히 적은 부산에서 서면은 매립을 하지 않았음에도 너른 평야를 가지고 있어서 중요한 터로 인식 되었다. 교통의 중심이자 농사를 하기 좋은 곳이었다.
부전이란 지명은 부현에서 왔다. 조선시대 동편면 부현리에 속했다. 부현이란 지명은 양정에서 당감동으로 넘어가는 부암고개에서 유래했다. 이곳에 있던 바위들은 가마솥을 엎어 놓은 듯하여 가마고개라 불렸다고 한다. 가마고개를 한자로 표기하면 부현이 된다.
전포동(田浦洞)
서면교차로 동쪽길인 동천로를 중심으로 서쪽은 부전동, 동쪽은 전포동이다. 부전동이 번화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전포동은 자잘한 공장과 선반, 기계 공구 등이 있던 자리였다. 현재는 다 몰아내고 식당과 카페거리로 만들어 놓았다.
서면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함에도 최근까지, 일부지역은 지금도 열악한 주택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발전이 되지 않은 곳 중의 하나이다. 문현동에서 넘어와 양정으로 이어지는 진남로는 산복도로라고 하기는 모호하지만 마을 위로 나 있는 높은 도로이다.
전포동의 지명유래는 황령산 서쪽에 자리하면서 수많은 논과 밭이 자리하고 있어서 생겨난 것이다. 이 지역을 밭개라고 불렀고, 동천에 배가 들어왔으므로 갯가이기도 했다. 밭개를 한자로 전포리로 표기했다.
양정동(楊亭洞)
양정동은 서면과 동래를 잇는 길목이다. 현재도 동쪽으로는 황령산 아래로 망미동과 수영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양정이란 지명은 수양버들이 많아 버드나무 양자가 사용되었다는 설과 과거 지명인 양지골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연지동(蓮池洞)
연지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 연못이 많아 생긴 것이다. 연지동의 북서쫑에 해당되는 성지곡에는 옛 성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지곡은 양산으로 넘어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차가운 물이 나오는 냉천이 있었다고 한다. 현지도 성지곡은 수원지가 있으며, 물이 맑은 곳으로 유명하다.
초읍동인 연지동에 속해 있다 1963년 성지동이던 이름을 연지동과 초읍동으로 분동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연지라는 지명 자체는 초읍동과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초읍동
초읍은 연지동에서 분동하여 나왔다. 초는 갈대이며, 읍은 터다. 갈대밭이란 뜻이다. 조선후기에도 이곳은 동래군 서면 초읍리로 불렸다. 백양산 자락과 화지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