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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사하구 지역 개요
사하구는 부산의 서남단에 위치한다. 강서구가 부산으로 편입되기 전에 부산의 가장 서쪽이자 남쪽에 해당됐다. 신평과 장림은 공단지역이라면, 다대동은 일찌기 주거지역과 관광지역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소외된 지역이었다.

사하구 법정동 행정동
사하구 법정동
감천동, 괴정동, 구평동, 다대동, 당리동, 신평동, 장림동, 하단동
사하구 행정동
괴정1동 · 괴정2동 · 괴정3동 · 괴정4동 · 당리동 · 감천1동 · 감천2동 · 다대1동 · 다대2동 · 구평동 · 장림1동 · 장림2동 · 신평1동 · 신평2동 · 하단1동 · 하단2동
사하구 지명유래
사하구(沙下區)
사하라는 지명은 조서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낙동강의 하류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다대동에 몰운대가 있다. 낙동강에서 흘러오는 모래가 계속해서 쌓이는 삼각주이다. 현재는 수질개선으로 많이 좋아 지기는 했지만 낙동강지역의 개발로인해 수많은 악취와 똥물이 모두 낙동강을 타고 내려오면서 심각한 상태로 된적이 있다. 1970년대 이후 다대포 해수욕장은 사람들이 싫어할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은 많은 수질 개선을 통해 다대포 해수욕장이 좋아지고 있으며, 낙조분수로 인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감천동(甘川洞)
감천동은 감내라는 옛 지명에서 왔다. 감천동의 지명유래를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설은 감(甘)이 ‘검’에서 왔으며, 검은 ‘신(神)’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신선들이 살았다는 동네라는 뜻이다. 두 번째 설은 이곳의 시내가 물이 좋이 좋아 달달하다는 뜻으로 감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복개되어 보이지 않지만 태극도마을(감천문화마을)에서 내려와 감내로를 따라 흘러 감천항으로 흘러가는 시내가 있다.
사하구청에서 소개하는 지명유래는 아래와 같다.
감천동(甘川洞)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감천(甘川)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이며, 감(甘)은「감」,「검」에서 온 것으로「검」은 신(神)이란 뜻이다.「川」은「내」를 말하며, 그 이전에는「內」를 적어「甘內來里」이며, 감내(甘內) 또는 甘來라고 하였고, 다내리(多內里 : 多大 안쪽 마을)로도 불렀다. 감천의 나이 많으신 분 중에는 감천은 물이 좋아서 甘泉 또는, 甘川이라고 했고, 많은 선박들이 옛날에 이곳에 들어와 급수를 받았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이것은「검내」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감천은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살았던 지역으로 추측되며, 고인돌(支石墓)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소도(蘇塗)와 같은 신역(神域 : 聖域)으로 추측된다.[출처 사하구청 홈페이지]1
괴정동(槐亭洞)
괴정동은 사하구 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취락 조건이 굉장히 좋은 곳이다. 오래전부터 주택가로 사랑을 받았고, 현재도 대부분 주택가이다. 강점이자 단점인 곳이기도 하다.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지나는 곳이기에 오래전부터 대중교통 또한 편리한 곳 중의 하나다.
괴정의 유래는 괴정 마을에서 유래한다. 괴목으로 알려진 수백년 된 회화나무를 베었던 그곳에서 8개의 가지가 나와 마을 사람들은 놀란다. 나무 뿌리에서 샘물이 흐르고 있고 그곳에 우물을 만들고 식수로 만들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괴정동의 이야기는 사하구청 홈페이지를 참조하자.

구평동(舊平洞)
구평의 옛 이름은 구서평, 구시평이라 불렸다. 조선초부터 만호영 직 서평포가 설치되어 있던 군사적 요충지다. 감천에서 신평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자리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5일장인 독지 장시가 열렸다고 한다.
당시 장림은 김과 소금이 많이 나와 독지장시에서 많이 팔렸다고 한다. 크지는 않았지만 이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회집장소와 같은 곳이었다.
혀재의 구평동은 감천항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은 구평가구단지는 소멸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편한 아파트가 최근 들어 섰지만 입지 조건은 꽤나 열악한 편이다. 바로 앞에 YK Steel(옛 한보철강)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변에서 직장이 있다면 이곳에 거주하는 것을 추천한다. 구평 주변은 교통이 너무나 열악해서 출퇴근 시간이 되면 거의 꼼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출퇴근 하는 데 하루 2-3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다대동(多大洞)
다대동은 다대포항이 있는 곳이며, 부산의 8대2인 몰운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대에는 해운대보다 물운대가 훨씬 인기가 많았다. 다대진이 있었던 곳이기도하고, 부산에서도 외진곳이라 북한이 한참 설칠 때 간첩선이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1983년 12월 4일 북한 무장 간첩선이 다대포항을 통해 들어오려다 발각되어 격침되고 2명의 간첩은 생포된 일도 있었다.3 믿기지 않겠지만 1990년대까지도 다대포 해안의 상당부분이 철조망으로 가려져 있었고,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다.4 하지만 후에 이 부분은 안기부가 전두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작 사건인 것으로 드러났다.5 이 부분에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다대라는 표현은 많은 ‘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여 왜놈들이 다대포를 침입해 와 큰 싸움이 일어났고, 왜놈들은 패하여 도망갔다. 이후 왜놈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사호,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행정을 재편하면서 다대동과 홍치동을 합하여 ‘다대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당리동(堂里洞)
당리의 지명은 제석골에서 제석단을 쌓고 기우제를 지냈다하여 생겼다는 설과 제석골에 사당을 짓고 여신을 모셨다는 데서 기원했다고 했다. 두 기원 모두 무당 또는 하늘의 신에게 제사했다는 내용이 겹치고 있다. 아직도 이곳에서 당산나무가 있어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 유독 당리동은 무당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대부분이 개발되어 높은 고층빌딩이 들어서 있다.

신평동
신평은 새로운 평지라는 뜻으로 1939년 현재 신평에서 장림까지 둑을 쌓으면서 생겨난 곳이다. 하지만 신평이란 지명이 제방을 쌓기 훨씬 전인 조선시대에도 기록된 것을 보면 제방과 상관 없이 버려진 곳과 같은 곳을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생겨났기에 ‘새롭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된다. 지명유래는 더 이상 밝혀진 것이 없다.

장림동(長林洞)
장림동은 지형이 길고, 숲이 우거졌다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 장림포구를 중심으로 위로는 신평동, 아래로는 장림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행정구역상의 구분이고 장림은 아미산 북쪽과 현재의 롯데마트 지역 일대를 일컬는다. 이곳은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사람들이 장림 뻘밭에서 김 양식을 했다.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낙동강 하류에 속하기 때문에 김맛이 굉장히 독특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서서히 공업화가 되고 낙동강 하구언이 건설되면서 옛 장림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낙동강 하구언 설치는 장림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단동
하단은 낙동강의 끝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오해가 있는 듯하다. 옛 문헌을 보면 괴정동을 용호머리이고, 괴장 뒷산을 따라 내려가는 곳이 아래몰리로 몰렸다. 하단을 ‘아래치’ 또는 ‘끝치’라고 물렀는데, 용호머리에서 시작된 줄기의 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래는 낙동강의 끝이 아니라 괴정에서 시작된 줄기의 끝, 또는 평지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갈치의 ‘치’도 자갈이 많은 곳이란 뜻이기에 ‘끝치’는 끝에 있는 평평한 곳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하단동은 ‘평림’으로 불렸는데, 신평의 평과 서로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감천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항도 두송반도와 송도암남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막고 있어 굉장히 깊게 파여 있다. 이러한 여건들을 보면 고대 시대에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사하구 홈페이지를 참조 바람 사하구청 홈페이지 ↩︎
- 부산의 8대는 해안 팔대(海岸八臺)를 말한다. 해안의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8곳이란 뜻이기도 하다. 부산의 해안8대는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신선대, 이기대, 연대, 시랑대, 첨이대이다. ↩︎
-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多大浦武裝間諜浸透事件)으로 불린다. 이 부분은 [위키백과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사건]을 보라. ↩︎
- KBS뉴스 ‘낙동강 하구 철조망 19년 만에 철거’ ↩︎
- 중앙일보, “83년 다대포 간첩, 북파공작원들이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