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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
개요
용두산공원(龍頭山公園)은 부산시 광복동 2가 소재의 시민공원이다. 조선시대 초량소산 또는 송현상으로 불려지는 곳이었다. 초량왜관시절 일본인들이 이곳을 거주하면서 용두산이라 불렀다. 강제한일합방이 이루어지면서 일제는 이곳에 신사를 만들어 조선인들을 참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용두산(龍頭山)은 어디서 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초량왜관이 용두산 주변으로 옮기지면서 일본인들이 만든 이름이다. 부산에도 아직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친일적 이름이 산재하고 있음에도 전혀 개명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부산이란 지명도 친일적 성향이 깊이 배어 있는 지명이다. 부산 지명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용두산 이야기만 해 보자. 용두산 이야기를 하려면 ‘왜관’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는 왜관이 주제가 아니므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두모포1 왜관(豆毛浦倭館)
두모포 왜관은 지금의 부산시 부산진구 세무서가 있는 자리다. 두모포왜관은 선조 40년부터 속종 4년까지 일본 사자가 머물던 곳이다. 왜는 두모포 왜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웅천으로 옮기려 했지만 조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곳은 초량이었다. 두모포 왜관의 역사는 위키 실록 사전[두포모포왜관]을 참조 바람
초량 왜관(용두산)
1678년 두모포 왜관(수정동)을 버리고 초량 왜관으로 옮기게 된다. 초량 왜관은 지금 우리가 아는 초량이 아니라 용두산 공원을 말한다. 조선시대 초량은 현재의 부산진역과 남포동 주변까지 넓게 부르는 지명이었다. 결국 우리가 우리가 아는 초량왜관이 용두산 중심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두모포 왜관은 고관(옛 왜관이란 뜻)이 되고, 용두산 공원 주변 왜관은 신관이 된다.
초량왜관는 약 200정도 유지된다. 그러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거듭나게 되고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다. 이 부분은 일제 명치유신이나 역사를 살펴 보기 바란다. 메이지 유신을 결국 일본을 군대화 우경화했으면 엄청난 과학적 발전과 기술 발전을 이루고, 그것을 통해 당시 최고의 기술력으로 항공모함과 비행기를 만들게 된다. 결국 일제의 압력에 의해 조선의 항구들은 개항하게 된다. 이것이 개항장이다. 다시 초량 초기로 돌아가자.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초량왜관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큰 공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숙종이 즉위하고 공사가 재가 된다. 공사는 숙종 2년인 1676년 시작된다. 숙종 4년인 1678년에 완공된다.완공 당시를 기록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2
숙종 4년에 초량왜관으로 옮길 때, 왜인들이 다수 대마도 목수를 데리고 왔다. 1년에 3번 그들을 검사하여 성명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소요된 쌀과 수공비가 극히 많았다. 즉 쌀이 9,000석, 은이 6,000량이었다. 신관 건축 후 신관건물이 파괴될 때에는 수시로 우리 정부에서 지출하였다
중간에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면 이렇다. 두모포는 원래 울산 두모포였는데 이곳이 부산진의 수정동으로 옮기면서 두모포 왜관이 되고, 다시 초량(용두산)으로 옮겨지면서 신관이 된다.
그렇다면 용두산은?
용두산의 원래 이름은 초량소산(草梁小山), 송현산(松峴山)으로 불렸다.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는 소산 중산 등으로 불렸다. 그러니까 용두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878년 일본의 자료인 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에서 용두산이란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용두산은 소나무가 많아 송현산 송산으로 불렸던 곳이다. 아마도 해송(곰솔)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개항 이후 초량 왜관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일본인 마을을 만들어 나갔다. 그것이 지금의 부산을 이루게 된 것이다. 용두산 이름을 대마도 사람들이 지었다는 말은 상당한 일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량왜관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8할이 대마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용두산 정산에 신사를 짓고 조선인들을 참배하게 만든다.
용미산
용미산으로 불리는 곳은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있던 곳이고, 이전에는 부산시청이 있던 곳이다. 참으로 기가막힌 것은 용미산이란 지명도 일제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주용한 일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용두산과 용미산을 일직선으로 그어보면 머리는 대륙을 향하고, 꼬리는 일본을 향한다. 무슨 뜻인가? 이것이 대륙을 삼키겠다는 일본의 의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도 모르고 용두산이 옛날부터 있던 지명이고, 용미산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용미산이란 지명은 1874년 사카타모로토가 지은 <향한필휴>라는 책에 나타난다. 이 책은 일본 수산사들의 기록을 담을 책이다. 현재도 실제로 번역되어 판매되고 있다.
이근열 부산대 교수는 <부산의 일제지명 연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 일본의 조계지는 1976년 부산구조계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인 거류지로 바뀌고 이후 예전 왜관으로 그 영역이 제한되었던그들의 활동 범위를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왜관 중심부에 있던 초량소산을 용두산으로 바꾸고, 남쪽 끝의 있었던 동산을 용미산으로 바꾸었다.3
그런데 이러한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두산이란 지명이 고유한 지명이라 생각하고, 용두산 공원에 여의주를 들고 있는 용을 만들어 바다를 향하도록 한 것은 놀라운 창작력의 발현이라할 수 있는 것이다.

용탑 비문의 내용이다. 4
여기는 이 나라의 관문 국토의 정기가 서려 맺힌 곳 백두산 힘차게 뻗어 내린 금정산맥 앞바다 푸른 물결 태평양 맞물렸네!
첨성대처럼 곧게 곧게 치솟은 탑 위에 높이 올라 저 멀리 바라보라.
통일과 번영과 자유와 평화의 큰 길이 영롱한 햇빛 아래 눈이 부시고 그리로 밀물보다 더 거세게 달려가는 이땅 겨레의 의기에 찬 모습 우리는 무궁화 피는 나라의 국민 조국과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의 키가 여기 세운 이 탑보다 오히려 높다.
울분이 파도같이 벅차 오르던 어제의 피묻은 온갖 기억들 역사의 가시밭 고갯길 허위적거리며 고난을 참고 넘겨 오늘의 행진
그러나 우리는 어제와 오늘보다 차라리 다가오는 더 내일의 삶을 위해 가슴마다 의욕의 밑바닥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오색 진주알보다 더 찬란하고 왕관보다도 고귀한 땀속에서 인간의 즐거운 보람을 발견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속에서 지구위의 모든 민족과 민족을 위해 평화와 참뜻을 새겨본다.
1973년 노산 이은상 시
일중 김충현 씀
이순신 동산
용두산 공원에 이순신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격파한 조선의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상이 있는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신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이곳에 이순신 동상을 세움으로 항일정신?을 높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일제가 만든 공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이순신 장군상이라니….

- 두모포는 현지 부산시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포구이다. 두모포는 조선시대 기장현 구포(九浦) 중의 하나였다.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두모포진이 설치되었다. 이곳에 있던 두모포 만호영이 현재의 부산진역으로 옮겨지면서 ‘두모포왜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출처, 부산역사문화대전 – 두모포 만호영] ↩︎
- 출처, 네이버 블로그 “초량왜관과 두모포 왜관(豆毛浦倭館)” ↩︎
- 이근열, 지명학 39권, 2003 “부산의 일제지명 연구” ↩︎
- 출처, 용두산공원, 용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