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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류면(宮柳面)
궁류면 개요
궁류면은 경상남도 의령군의 면이다. 의령군의 북서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구는 1,102명이다. 면소재지가 있는 토곡이 주변 외에는 평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산지로 둘러싸인 곳이다. 우범곤의 총기난사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1
궁류면 역사
- 1895년 6월 23일(음력 윤5월 1일) 진주부 의령군으로 개편하였다.
- 1896년 8월 4일 경상남도 의령군으로 개편하였다.
- 1914년 4월 1일 합천군 궁소면을 편입하였다.
- 1933년 1월 1일 화양면, 상정면을 폐지하고 화정면을 신설하였다.
- 1979년 5월 1일 의령면을 의령읍으로 승격 하였다.
- 1983년 2월 15일 합천군 적중면 권혜리, 묵방리를 부림면에 편입하였다.
- 2003년 7월 16일 궁유면을 궁류면으로 개칭하였다.
궁류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관할 행정리
계현리 벽계리 운계리 평촌리 토곡리 압곡리 다현리
이곳에 소개되는 마을 역사와 지명은 [경남 의령군 읍면소개 지명유래]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따로 구분한 것은 필자가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
계현리 계현1구마을
궁류면소재지에서는 동남쪽 오마장 거리에 위치한 동네인데 법정동리는 계현리(계현 1구)에 속한다. 옛날에는「마구배미」「마구바데」이라거나 「제릅제」로 알려진 곳이다. 역시 거장산이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골안지역이다. 가장 위땀이「마구밭」「마구바테」이고 아랫땀이「제릅재」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까 법정동리명인 계현리는 계현과 마현을 포함한 것이고 행정동리명의 마현은 옛날 웃땀지명인데 근래와서는 두 땀을 다 보탠 지명으로 계현 1구로서 되어 있다. 윗땀「마구바태」란 지명이 명확히 풀이되지 않는데 산골짝이 길쭉한 골안의 가장안쪽 동네라는 점에서 보면 소마구깐의 뒤쪽이란 뜻의「마구발치」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한다. 마구발치 마구비치 마구바티(테)로 변음되었다고 보자는 것이다. 게다가 마을 뒷산의 생김새가 큰소의 덩어리같고 동네자리는 쇠구시(소여물을 담는 구유)에 해당된다. 그리고 한자로 마현(麻峴)인데 삼이 썩 잘되던 지역이고 아주 고운 삼베를 많이 생산했던 곳이라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삼의 껍질을 벗기고 난 속대가 겨릅인데 이 지역 말로는「제릅」또는「제릅뎅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동네가 제릅재였다. 행정구역 정비 이후 웃동네 이름이 제릅(麻峴)재가 되고 아랫동리는 엉뚱하게 계수나무재(桂樹)가 되어 버렸다. 옛날 이골짝에 들어서면 온통 제릅뎅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집채만하게 쌓여 있기도 해서 제릅댕이 동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도랑가에도 여러군데에 삼굿(삼을 삶는 큰 가마솥)이 있어서 「제릅재의 삼」또는 제릅재의 삼베라면 상품으로 쳐 주었다는 것이다. 마구바태로 들어가는 첫동네가 제릅재이고 산고개를 넘으면 유곡땅인데 보통 정실재니 새곡재라 부른다. 동네 앞들은 소나무숲과 개울이란 뜻으로 송개월 들이라 하고 뒷들은「해야붙들(해붙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앞뒤로 산이 막고 있다보니 햇볕받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애가 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를 붙들어야 농사가 된다는 뜻에서「해야붓들」또는「해붙들」이란 들이름을 쓰고 있다고 한다. 동네 앞은「새들」이고 뒤쪽으로 길따라 길게 붙어 있는 들이라고「진질들」이다. 마을 앞에는 큰 정자나무가 있으며 성영수수식행자목(成榮洙手植杏子木)이라고 새긴 돌표석이 있고 동네 초입에 계남정(桂南亭)과 계강정사(桂岡精舍), 경송재(景松齋) 등 큰 재실이 있는데 모두 창녕성씨 문중 것이다. 마현으로 부르는 마구바테에는 안악 이씨가 13세대 대성인셈이고 안·전·오씨등이 한두집씩으로 모두 18집이 살고 있으며, 계현(제릅재)에는 창녕성씨가 18세대로 가장 많고, 전·박씨가 서너집씩이고 정·최씨는 겨우 한두집씩으로 26세대가 살고 있다. 아래웃동네를 다 보태야 44세대 뿐이다.
계현리 계현2구마을
법정동리명으론 계현(桂峴)리 계현 2구로 돼 있다. 옛날 지명으로는 「진마리」라 했고 문헌에 장지동으로 나오고 있다. 마을의 모양이 길쭉하게 생겨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하는데 지금 당동 및 큰 길 바로 밑에 있는 떼밭새미부터 남향받이로 앉은 집이 꼭 줄을 세워 놓은 것 같이 길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마리(진: 길다)「마리」는 마을, 마실을 딴말인데 한자표기를 하면서 질다에 어조사를 하나 붙여서 장지(長旨)로 작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동네 앞이 거장산이고 뒤쪽으로 멀리 만지산이 버티고 있다. 석징이(석정)마을과 이웃하고 있는데 옛시절에는 조선종이나 소지종이, 장판종이 등을 많이 뜨던 곳으로 알려진 종오(종이의 와음)마을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닥종이 원산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종이를 뜨는 지통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 들 이름도「통골들」이라는 것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 솔밭 멧등이라 부르는 널찍한 묘역이 있는데 이곳은 안악 이씨 선산이다. 앞에 말한 「떼밭새미」의 주위 언덕에는 떼풀이 많이 자랐고 온동네 사람들이 이풀을 베어다가 떼우장(떼로 엮어 만든 비옷, 도롱이)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떼밭샘이 물은 약물로도 알려져서 이웃동네 사람들이 퍼 가기도 했다고 한다. 동네 주위로 대숲, 정자나무들, 멧등들 등의 지명이 남아 있고 새터니 대밭, 개무덤 등 옛날에는 여러집이 살았던 터라고 한다. 궁류 진마리의 지통이나 딱종이는 볼수 없게 되었고 떼풀 새미물도 탁해져서 마실 수 없는 논물일 뿐이다. 이 동네는 파평윤씨와 합천 이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전씨가 10집, 김씨 8집, 이씨와 곽씨가 서너집씩이고 허·표·성씨가 한두집씩 모두 35세대가 살고 있다.
벽계리 벽계마을
면소재지(토곡)에서 시오리쯤 되는 심산유곡 마을이다. 옛날에는 평촌(坪村), 운계(雲溪)와 함께 합천 궁소면이었으나 1914년 우리고을에 편입된 지역이다. 평촌마을 바로 위에 몇집 있는「오호땀」과 벽계저수지 때문에 없어진「정동(正洞)」마을 사람들이 이주 해 살고 있는「배애골」몇 집도 벽계마을에 포함된다.
이곳 사람들은 편의상「웃벽계」와 「아랫벽계」로 부르지만 뜸으로는 셋이다. 「오호땀」은 옛날 궁소면 소재지였다고 하며 풍수설에 다섯집 이상은 살 수 없는 터라는 말 때문인지 몰라도 여태껏 다섯집 이상은 살지 않아서 오호(五戶)가 소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정동마을이 있었는데 벽계저수지 때문에 수몰되면서 이주하고 마을이름마저 없어져 버렸다.
물건너 산자락에「경주김씨정동세거유허비(慶州金氏正洞世居遺墟碑)」가 서 있다. 조금 위 길게 내리뻗은 「빼쪽산(빽산)」끝자락에 없던 동네가 새로 생겼다.
정동마을 사람들 중 골밖으로 떠나지 못한 다섯 집 일곱 세대가 정착한 「배애골」새동네인 것이다. 옛날 백로가 떼지어 살았던 골이라서 백학동(白鶴洞)인데 변음돼서 「배애골」로 부르게 된 것이다. 벽계 못을 가로질러 긴 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산길인데 한참 올라가면 산중턱 양달에 오목한 마을「웃벽계」에 닿는다.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노인층은「벽언이」또는 「벽기」라 부르는데 한자표기나 어원은 알 수 없다. 벽언이 동네 앞에 산줄기 두 개가 있다. 동쪽이 한우산(寒雨山)인데「찰비산」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서쪽이 산성산(山城山)인데 보통 산성터니 성터라고 부른다. 이 두 산맥 사이 칠마장 정도의 계곡이 바로 「찰비골」이다. 한우동(寒雨洞)으로 적는다. 오뉴월 한더위에도 이 산, 이 골에서 맞는 비는 겨울비처럼 차갑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 산성산은 가야와 삼국시대 때 외침을 대비한 산성이 있었고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웃 합천군 문화유적소개에도 「주위 약 2km의 석축(石築)성지로 성내에는 다시 두루 2백m의 토축성(土築城) 두 군데가 남아 있으나 붕괴되었으며 왜병이 침입 때는 봉수대(烽燧臺)로 이용했다」고 기록이 있다. 또 마을 뒷산이 꾀꼬리봉인데 꼭대기에 있는 큰덤을 「망바구」니「망덤」이라 부르는데 이는「망(望)을 보는 바위」란 뜻이며 거기서면 사방의 몇 십리는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을 들머리 높이 솟은 산은 함박꽃 모양이라서 함박산이며 뒷산은 버들잎이 돋아 날때면 꾀꼬리가 둥지를 틀고 많이 살아서 황려봉이다. 동네 어귀의 밭언덕을「부추방」또는「부치방」이 있다. 그 옆에 「왕다실」「왕대실」「망다실」이란 들이름이 있는데 한자로 왕대곡(王大谷), 왕다실(王多失), 왕대실(王待室) 등으로 쓴다. 소(沼)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에 받혀서 골이 생겼다고 「용농굼티(굼턱)」도 있고 그 골의 약수는 알려진 물인데「집너매새미」즉 마을밖에 있는 우물이란 뜻이다. 마을을 지나서 서녘에 조상들의 신심이 서린 당산나무와 조산이 있어「조산껄」이라 한다. 거기서 찰비골로 접어드는 길목이지만 벌써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아득한 옛날 이 마을에 살던 백정(白丁)의 딸이 신분을 속이고 재너머 이진사(□進士)댁 도련님과 혼인을 했는데 시집가던 그 날로 속인 일이 들통나고 파혼으로 쫓겨오게 되었다. 이 계곡따라 신부행차가 오게되는데 화가 난 백정은 딸이고 가마고 모두 물 속에 밀어 넣고 난 뒤 자기도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순간 뇌성번개가 치고 억수비가 쏟아지고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말았다. 재너머 진사댁은 터도 없이 되었고 찰비골에는 없었던 바위돌이며 소(沼)가 여러 곳에 생겨났다. 신부가 빠진 자리가「각시소」, 농(□)과 가마(駕馬)를 던진 곳이「농소」와 「가매소」,「중신아비」와 백정이 죽은 곳이 「장개소」가 된 것이라고 한다. 찰비골 막마침은 가례와 대의로 통하는 「쇠목재」고 산성산 너머가 합천땅(쌍백)이다.
약 4백년전에 경주 김(金)씨가 먼저 터 잡았고 지금도 서른집 넘게 살아 대성이다. 달성 서씨 서너집, 경주 최(崔)씨 한집, 김해 허(許)씨 한집 등 세 땀을 통틀어 서른 여덟집이 살고 있다. 마을 바로 옆에 증승정원좌승지김녕김성배공(贈承政院左承旨金寧金聖培公)의 묘가 있고 벽산재(壁山齋)도 김씨종실이다. 저아래「배애골」에 현산재(峴山齋), 청금정(聽琴亭)은 김씨문중의 재실이다.
궁류면 마을 중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일찍 없어진 마을인데 일찍 없어진 동네가 바로 벽계리 정동마을이다. 벽계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수몰지역이 되어 버렸고 살던 사람들은 「배애골」「평촌」등 이웃마을로 옮겨 앉거나 멀리 이주했다고 한다. 동네 앞산이 삐죽하다고 빼족산 또는 빽산이라 불렀고 배애골산은 찰비산 찰비골로 이어진다. 옛 마을안에 양지땀 음달땀 그리고 「이지니터」라 부르는 지역으로 갈려 있었다고 한다. 양지와 음지땀은 흔한 예이고 다만「이지니터」가 재미있는 지명이다. 이 마을 지명의 어원과 유래는 알 수 없고 댓집이 살고 있었다는데 옛날 몇 대를 이어 오면서 경주 김씨 집안 하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동네 앞에는 욕탕처럼 길쭉하게 생긴 바위 웅덩이가 있었는데 어른이 들어가서 누우면 꼭 알맞을 정도였고 메기나 뱀쟁이(장어)가 많았던 쏘가 있었는데 이름이「홈통」이라고 한다. 물을 대기 위해 만든 홈 같기도 하지만 항시 물이 고여 있는 물통과 같다는 설명이다. 앞산 꼭대기에 가면 신선이 놀다가곤 하는 신선바우(바구, 덤)도 있고 옛날에는 몇 집 없었던 점대꺼리란 곳은 이주하는 분들이 몇 집 들어앉게 되었다고 한다.
궁류 정동은 50여호가 살았던 김촌이었다고 한다. 벽계저수지 중간쯤에 대밭이 남아 있고 감나무가 물 속에 잠겨 있는 그곳이 마을터였다고 한다. 정동마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면서 동네가 바로 보이는 길가에 「경주김씨정동세장유허비(慶州金氏正洞世庄遺墟碑)」를 세워 놓고 있으며 유서 깊은 청금정(聽琴亭)과 현산재(峴山齋) 등 경주 김씨문중의 재실이 잘 보존되고 있다. 특히 청금정(관리인 김동기씨) 곳간에는 옛날에 썼던 여러 가지 귀중한 유물과 생활도구가 많았는데 1993년 개관한 군립박물관 민속자료실에 전시자료로 기증해 주어서 전시 보관하고 있다.
운계리 운계1구마을
법정동리상 운계리(雲溪里)고 조례상 동리명은 운계일구(雲溪一區)이며 자연마을로는 신계(新溪)로 부른다. 옛시절 합천의 궁소면(宮所面) 관할지역이었다. 보통 새장터니 장터껄로 불렀던 마을인데 소재지인 석정(石丁)으로 장터를 옮기게 되어 옛날 장터라고 구장(舊場)터로 부르게 되었으며 6.25동란 후 다시 이곳으로 장터를 옮기게 되어 다시 새 장터가 된 셈이다. 원래 구름이 걸린 계곡이란 아주 낭만적인 지명이 쓰인 내력을 아는 분이 없고 다만 옛날 주막집이 있었던 곳인데 한길이 나고 사람이 많이 살게 되면서 새 동네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신계로 정했다는 것이다. 뒤로는 큰산자락이 앞으로는 큰 개울이 흐르고 있으며 운계2구로 돼 있는 어촌으로 가는 길과 봉황대를 지나 평촌과 벽계골짝으로 들어가는 길 또 석징이라 부르는 면소재지로 가게되는 세갈래 길이 있는 마을이다.
시골 장터로서는 그 규모나 시설이 제법 큰 편이고 토속음식을 파는 집도 몇 집 있는 곳이다. 깊은 산골에서는 장(시장)치고는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동네 뒷산이 꼭 떡시리(떡시루)모양이라서 시리봉이고 벽계골짝과 어촌골에서 내려오는 도랑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봉황대는 행정구역상 평촌마을에 속해 있지만 이 동네서 바로 바라다 보인다. 궁류 구장터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마을 안에 인동 장(張)씨문중의 인산재(仁山齋) 재실이 있고 처음 자리잡기는 합천 이(□)씨라고 한다. 지금도 이씨가 14가구로 많은 편이고 장·박·유·김씨가 각각 7집씩이며, 신·최· 전·곽·허·강·손·방·황씨가 두셋집씩으로 전체 66가구다.
- 궁류시장
마을 아픙로 유곡천이 흐른다. 마을 앞은 삼거리로 우회전하면 궁류면 소재지로 가고, 좌회전하여 직진하면 합천군 쌍백면으로 가는 길이다.
운계리 운계2구마을
법정리로는 운계리에 속하고 조례상 행정동리는 운계2구이며 자연마을이 입사(□士)인데 면소재지(석정)에서는 어린 십리길이다. 지금 마을 이름은「서있는 선비」라거나「벼슬아치가 나온다」는 뜻을 담는 아주 좋은 지명이랄 수 있는데 한때는 절로 들어가는 어귀라고 입사(入寺, □寺)란 지명을 쓰기도 했다고 하니 아마 정수암 들어가는 절동네라는 뜻인 듯 하다. 다른 이야기로는 지금 동네자리 조금 위쪽 정수암 바로 밑에 몇백석 하는 부자가 살았다고 하는데, 골밖에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를 겪고 난 흉년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골안으로 들어와서 부자집 일을 거들거나 절깐 일을 돌보면서 입살이를 하였다는 것인데 그래서 「입살이골」이「입사골」로 변음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고 또한 어떤 집 머슴이 머리 깍고 동자승이 되는 일도 있었다니 입사(入寺)란 말이 어울린다. 동네를 지나서 험한 너덜밭이 있고 앞산이 매봉산 뒷산이 진골산인데 갑을골로 넘어가는 험한 산고개가「버재」고 평촌을 통하는 것이 「도틀바구재」그리고 벽언이골로 통하는 재가「베아골재」다. 지금은 여남집이 살고 있는데 평산 신(申)씨가 8집, 경주 김(金)씨, 광산 김(金)씨, 각각 한집씩이며 토종벌이 잘되는 곳이다.
궁류면 소재지 못미쳐서 왼쪽으로 10리 가까운 긴 산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어촌(漁村)마을이 있다. 갯가 어부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뜻하는 지명이라서 우선 이상한 느낌이 든다. 옛 문헌에는 합천군 궁소면 지역이었고 1913년(대정2년)에 의령 땅으로 편입되었다. 원래는 어등화촌(於等火村 : 읽을때는「어등불말」이다)으로 신라형 지명으로서 음차(音借)지명이 아니고 훈차(訓借) 지명에 해당된다. 특히 신라 경덕왕16년(757)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정하는 한편 한자화 했으며 3∼4음절 지명도 2음절화 시켰던 것이다. 이때쯤 어등불말(어등불촌)의 가운데 두글자를 빼고 어촌(於村)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서 일제강점기에 앞 글자를 어부 어(漁)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된다. 웃땀(2구), 아래땀(1구)과 저 안골 입사마을이 협동이다. 마을뒤엔「살메기골」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보통 「살먹골」로 부른다.「대정들」은 불매간이 있었던 곳이라서 들이름이 됐고 「주개등」은 밥주걱 모양의 산이며, 「비신댕이」는 비가 서 있던 터를 말한다. 그리고「솔등이」란 산모퉁이에 옛날 광산 김씨가 여러 집 살았는데 「살목재」길을 내고난 뒤부터 집안에 액운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살목」을「싸리맥이」로 발음하고 있는데 앞서 말한 「살막」의 경음화 현상임이 확실하다. 마을 앞 「새정자」또는「사정지껄」이란 곳은 큰 정자나무 네 그루가 있어서 넷정자나무란 말이 줄여져서 사정지껄이 된 것이며 지금은 한 나무가 죽고 세그루만 살아 있다. 동구밖에 월계처사 의성김공유적비가 서 있는데 옛날 학덕 갖춘 선비로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쳤던 김창만공의 유적비가 서 있고 동네 안에 몽천재(夢泉齋)가 있는데 고령 박씨 재실이다. 몽천재 마당에는 운강공 박봉호(朴鳳鎬)공과 계은공 박재곤(朴在坤)공 두분의 묘표가 모셔져 있다. 광복 후에도 1백호를 헤아리던 대동이었으나 20여년전부터 이리저리 빠져 나가면서 지금은 60여 가호만 살고 있다. 박씨가 15집, 김·신씨가 각 13집씩, 이씨 8집, 강·표씨가 댓집씩 그리고 최·안·오씨도 한두집씩 살고 있다.
평촌리 대현마을
- 마을 뒤로 있는 한티재는 의령군 합천군의 경계지점이다. 의령군에서 가장 오지로 소문난 곳이다.
면소재지에서 시오리가 넘는 서북쪽 지점 해발 5백m는 될 엄청 높은 산꼭대기 마을이며 한번 가기가 여간 쉽지 않은 산간오지다. 이 곳 사람들은 「한태」또는「재한태」라 부르는데 마을 바로 뒤쪽에 있는 산고개 이름을 그대로 딴 지명이다. 높고 험하며 가파른 산고개란 뜻이라고 한다.옛날에는 이곳도 합천군 궁소면(宮所面)에 속했고 한말에 의령땅으로 편입된 곳이다.
동남쪽이 긴 골로 이어지면서 빠끔히 열렸을 뿐 온통 험한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아래윗마을로 나누어져 있으며 윗마을 어귀에는 세 그루의 나이 많은 신목(神木)이 서 있으며 최씨만 모여 살아 흔히 최촌(崔村)이라 부른다. 조금 아래쪽 마을에는 김씨만 살아서 김촌(金村)이라 하는데 양성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고 하며 13대째 살았으니 임란 때로 추정된다.
아름드리 노송의 묏등 도래솔이 아름다웠고 가파른 산등성이와 좁은 산골짜기에 차곡차곡 포개놓은 듯한 논과 비탈진 언덕에 드문드문 널려 있는 밭에는 온갖 곡식과 채소가 소복하다. 쌍백면 대곡(한실)으로 통하는「거무실재」가 있는데 옛날에는 사람의 내왕이 잦았던 소로였다고 한다.
마을 뒷산은 큰 황룡이 살았는데 너울춤을 추면서 하늘로 올랐다해서 용무산, 승천할 때 용의 꼬리에 받혀서 쪼개졌다는 전설이 있는 「째보덤」이 있다. 까만 독수리가 살았다는「수리덤」, 질그릇 물동이를 닮은「동오덤」, 쪽문만하게 구멍 뚫린 돌문이 있는「문바구덤」, 깊고 외진 골짜기라서「외고지골」, 큰덤 사이에서 흘러내려 까만 돌멩이에 물이 고여있는「거무새미」물은 속병에 좋은 천연약수로 이름나 있다고 자랑한다.
조산껄 부근은「조산들」, 저만치 밑에 붙은「아랫들」, 마을 가까이라「집앞들」등은 다정한 산과 들 이름이다. 논이래야 모두 하늘받이인데도 물이 넉넉해서 쌀 못 먹은 해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윗동네 최촌이 19가구, 이랫동네 김촌이 15가구로 두동네 다 같이 타성은 없다. 경주최문의 용산재(□山齋), 김녕김문이 성모재(誠慕齋)가 있을 뿐 다른 문화유적은 찾을 수 없다. 지난 세월 한때 50여가구가 넘었다고 하지만 생활환경의 취약성과 교육문제 등 때문에 이리저리 떠나기만하는 산촌이 된 것이다.
평촌리 예동마을
이 마을도 옛날 합천의 궁소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역시 「궁시」란 지명과함께「궁시아랫땀」으로 알려진 마을로 지금도 법정동리는 평촌리에 포함된다. 평촌을 웃땀(웃마실)로 부르고 예동을 아래땀(밑마실)으로 하면서 거부감이 있어서 행정구역의 정비와 함께 한자지명을 정하게 되자 어질고 예절바른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에서 예동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궁시(궁소)」마을 유래에서와 같이 신라시대 어느 왕이 머물렀던 행궁소 중 세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평촌, 예동, 벽계를 들고 있고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과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예동마을도 산자락에 위치하지 않고 들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셈인데 동네 옆으로 큰 개울이 흐르고 있고 앞뒤로 너른 논들이다. 큰보들(가장 큰보의 물을 대는 들), 새보들(새로 막은 봇물을 대는 들), 새들은 새로 개답한 들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동네 앞산에「개장골」이라는 곳은 옛날 어린아이가 죽게 되면 갖다 묻는 곳이라고 한다. 마을 앞 들가운데는 소나무와 기목등 숲이 우거진 둔덕이 있는데 「새청당」이니 새칭이 숲이라고 부른다. 이곳이 바로 당산나무가 있는 곳으로 동신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마을 뒤로 입살이 재를 넘으면 정수암이 있던 입사마을이고 도틀재는 갑을골로 통하는 잿길로 베틀에 딸린 도루마리처럼 생겼다는데서 만들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 옛시절 소꾼과 풀꾼들이 지겟자리로 삼았던 독덤이 재밑에는 화적패 두목으로 유명한 정광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정광태는 합천사람인데 정수암이 있던 입사골짜기에 은거하던 의적이었다는 설과 또 관가나 곡창을 털거나 장사꾼을 덥치는 큰 도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마을에는 1940년 11일15일에 개교하여 1991년 3월1일 분교장이 되었다가 1998년 3월 1일 폐교가 된 평촌초등학교가 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산밑에 문화류씨 문중재실인 첨모재가 있으며 가장처음 터 잡은 문화 류씨가 35집, 정·김씨가 3집씩이고, 서·고씨가 한집씩 모두 40세대 남짓한데 조금 떨어진 곳에 절경 명승지로 알려진 봉황대가 있다. 흔히 제2의 금강산이라고도 과장j하는 소개도 있지만 어지럽게 솟은 바위덤, 색문같이 생긴 석문, 울창한 숲, 소문난 약수천 등 경치가 썩 좋은 곳이다. 옛날 선비들이 모여서 시회도 열고 풍류를 즐기던 봉황루는 퇴락하여 볼품없이 되었고 그 아래 있던 성덕암도 터만 남았을 뿐이다.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봉황산은 한적하고 운치있는 경관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산밑에 전형식 면장의 송덕비가 서 있고 길 양쪽으로는 여러 가지 불교적인 조형물이 서 있다.
평촌리 평동마을
이 마을과 벽계·운계리 지역은 옛날 합천군 궁소면이었다. 1913년(대정2년) 당시 행정구역 조정시책에 따라 궁류면은 일류곡면(一柳谷面)과 궁소면(宮所面)을 통합해서 7개리로 편성되었다. 이웃 유곡면 은 이유곡면 (二柳谷面)과 화곡 일부지역과 능인, 정곡(정실)을 통폐합하여 11개리로 확정함으로서 일, 이유곡면이란 지명이 없어진 것이다. 이 곳 평촌은 신라시대 어느 왕자가 잠시 머문 행궁소(行宮所)였다거나 신라가 백제 또는 가야국과의 전쟁 때 왕이 직접 진두 지휘하면서 한동안 머물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얘기는 문헌 기록상으로는 확인 할 수 없었다.
동네 가장위쪽에「오호땀(오오땀으로 발음함」이라고 부르는 뜸이 있는데 이는 언제나 다섯집이 산다는 뜻이다. 여섯집이 되면 늦게 들어온 그 집이 우환이 겹쳐져서 결국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바로 이 터가 궁소면 때의 고을집터라 민소터(면사무소자리)라고 한다. 상노인 분들은 아예 궁시(궁소의 변음)동네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평촌마을은 오호땀과 여남 집이 있는 갱구땀(갱구는 갱변이란 토박이말로 시내, 도랑을 말함)과 큰 동네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평촌에서 왼쪽골짜기로 한참 가면 벽언이 동네와 찰비골이고 오른쪽 산고갯길로 오르면 재한태(대현)마을로 가게 되며, 갱구땜뒤「밤재」를 넘으면 토곡으로 가게 된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이름난 이곳은 신라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들 믿고 있다. 마을 양지땀에는 달성 서씨문중의 남덕재와 달성 서씨 삼충효비(서진성, 서진휘, 서진태공)가 서 있다. 이 마을에는 처음 밀양 박씨가 자리 잡았다고 하며 현재 서씨가 25세대로 가장 많고 다음이 김씨19세대, 박씨가 16세대이며 오·한·허씨는 서너집씩이다. 모두 62세대가 살고 있다.
토곡리 토곡마을
궁류면소재지 주변이 법정동리로는 토곡리고 행정동리로는 토동, 석정, 당동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토동과 토곡이 구별없이 쓰인다. 옛말에는 그냥 토꼴로 통했다. 흙이 좋다거나 땅심이 좋다는 뜻에다 산간분지로서 평평한 곳에 자리한 동네라는 유래가 맞을 것 같다. 한때는 이곳이 일유곡면으로 구획 돼 있었고 미요리(未要里)에 속했던 기록이 있다. 신라말기때부터 큰 동네를 형성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왕실을 비롯하여 양반집 필수품이던 병풍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이 동네 남정네들은 병풍과 조선종이(한지) 등을 짊어지고는 서울을 비롯하여 팔도강산을 돌면서 등짐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해서 토꼴 사람치고 붓글씨나 묵화 못치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네에는 민소터(면소터)라 부르고 있는 집터가 있는데 아마 일유곡면 시절 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인 것 같다. 동네 뒤로 밤재산과 앞쪽으로 거장산이 있으며 골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토동 큰못이 있고 그 위쪽 가파른 언덕에 허문창이라 부르는 동네가 있다. 꼭 허씨 성을 가진 사람이름 같은 땅이름이다. 이 깊은 골짝에 살게 된 양반이 허씨였다고 하는데, 그 시절 이 두메산골은 허접장 때문에 글이 창성해졌고 또한 과거 볼 젊은이들이 이곳에 틀어 박혀서 글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 뒤 청송 심씨가 여러 집 살았다고 하며 김녕 김씨가 들어와서 20여호가 살았다고 한다. 이 골을 지나 쌍백으로 통하는 쌍배기재, 삼가로 가는 골한티재, 범시골재, 봉수로 가는 장개터재가 있다. 하늘받이 논밭이라 개밀과 왜밀이 잘 되는 곳이라서 허문창 밀부재(부자)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큰 동네안의 김씨의 자양재, 오씨의 유천재, 손씨의 영모재 등 제실이 여러 채다. 토동에는 밀양 박씨가 먼저 자리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김씨 25집, 손씨20집, 오씨17집, 박씨 5집으로 큰동네라 할 수 있다.
토곡리 당동마을
행정구역상 토곡리 당동마을인데 면소재지에서 1km 남짓하다. 당(唐 : 나라이름, 둑, 제방, 쿠다, 정자, 작은 길의 뜻)으로 적힌 문헌도 있기는 하지만 주위 환경이나 입지적 조건 그리고 오랫동안 「못골」로 불러온 것 등을 생각하면 당(塘:연못, 작은못, 둑, 방죽의 뜻)으로 한 것은 그런대로 뿌리있는 지명이라 할 것이다. 동네의 뒷산너머가 허문창이라 소로가 여러 개 있는데 희낫갓, 중허리길, 큰재라 부르고 허문창 사람들은 당동재라 부른다. 마을 앞으로는 장지마을과 대숲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큰 덩치의 거장산이 높게 보인다. 마을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새뚝이니 개골창이라 부르는데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다는 샛도랑으로 물길이다. 마을 앞에「동새미」라는 좋은 물새미가 있는데 그 밑에 자그마한 소류지가 있어서 동네이름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또 동네 앞 길가에는「뗏밭새미」라고 하는 논두렁밑 솟아나는 물이 있으며 진마리쪽으로 흐른다. 엉골짝(얼음이 늦게야 녹는 음달골짝이라서) 그 위가 작은 재로 역시 허문창 동네로 가는 소로다. 마을 뒷산을 「뒷뫼」라고 부른다. 앞으로 흐르는 토동(토곡)과 경계를 이루는 도랑을 구시골도랑이라 부르고, 도랑 옆에 위치한 논들이라서 고랑들 (도랑, 시내의 방언)인데 보리를 해 먹을 수 없는 굼든이 마을에는 담양전씨가 먼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여 28집으로 대성을 이루고 있고 그외 이씨5집, 김씨 5집, 기타 성씨 한두집으로 42세대가 살고 있다.
토곡리 석정마을
궁류면 소재지와 서쪽산 밑 새편마을 그리고 대숲 등 세뜸인데 토곡리 석정마을이다. 옛지명은「돌징이」또는「석징이」라고 불렀다. 면사무소 옆에 당산이 있고 작은 연못이 있었고 큰 돌매(연자방아 또는 연자매라고도 함)가 있었기 때문에 사철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 조금 떨어진 곳에 400년은 넘었다는 큰 정자나무가 있고 동네 뒤로 왕대숲이 우거진「대숲」이란 큰 동네가 있다. 그래서 돌매와 정자나무를 붙여 만든 지명인 것 같다. 돌정자란 말을 쉽고 편하게 부러자니「돌징이」로 변음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이 지명을 한자표기를 하면서 돌(石)과 정(亭)으로 했다. 또 토곡마을 옆 산자락에 「세편」이라는 동네는 서편(서쪽)에 자리잡은 뜸이라서 서편이란 말이 변음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조금 이 흔적은 보이는데 면사무소 자리는 약간 나질막한 고개였고 큰 도로 쪽은 「장터껄」이니 「주막껄」이란 불렀는데 주막 몇 집이 있었으며 한참 뒤에 이곳은 면단위의 작은 궁류장터가 되었으므로「새장터」라 불리워지기도 했다. 동남쪽 저만치에 신통하게 자리잡은 거장산이 막아 서 있고 토곡쪽은 시리봉(시루봉)산인데 다른 동리와 다르게 이곳은 들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동리 들머리에 임란창의때 큰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이운장(□雲長)장군의 순절비와 안악 이씨 종실인 우산정사(愚山精舍)가 있다. 동네에서 동남으로는 비탈진 지대이지만 제법 너른 들이 있다. 대숲이라 부르는 동네는 소재지와 장지(진마리)마을 사이에 있는데 동리명이 한자 표기 때, 옛 지명대로 죽림으로 했다. 지금 20여세대가 살고 있으며 줄었고, 한길가 주막껄(장터껄)에 여러 기관이 있어서 30여세대로 불어났다고 한다. 광산 김씨가 먼저 들어와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석정 새장터는 운계쪽(구장터라고 부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석정보다는 운 계쪽에 장터가 먼저 섰던 탓이라고 한다. 현재는 손씨가 15세대, 강씨13세대, 김·이·임씨가 7∼8세대씩이고, 박·오·전씨가 각 대여섯집씩으로 모두 70세대가 살고 있다.
압곡리 압곡1구마을
면소재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인데 법정동리명은 압곡리(鴨谷里)이고 행정상으로 압곡 1구에 속하는데 자연 마을 지명은 압실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더러 있는데「실」이란 지명을 한자화 할 때 대개 곡(谷), 동(洞), 실(室) 또는 실(實), 곡(曲) 등으로 표기한 예가 많이 발견되고 있으므로 동네(땀)의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한길을 사이에 두고 큰 압실(큰골로 부르기도 함)과 길밑에 작은 압실(작은 골) 그 옆에 새터니 덕석골이란 지명을 쓰고 있는데 요즈음 와서 상압, 중압, 하압으로 부르고 있다. 동명은 한자로는 압실 (鴨谷 또는 鴨實)을 구분 없이 쓰고 있으며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약간 혼란스럽다. 동네의 생김새가 물오리 모양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네 마주보는 산의 생김새가 오리가 물에 떠 있는 것 같다해서 그렇다거나 또 상압실 마을앞 논도가리가 꼭 오리모양 같다해서 「오리배미」라고 부르는데 이 오리배미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도 한다. 큰골(상압실)쪽에 사람이 먼저 살았고 길밑 작은골(중압)과 새터, 덕석골은 조금 뒤에 형성된 동네라고 한다. 덕석골이란 지명이 재미있는데 이는 곡식을 널어 말리는 방석(짚방석)의 토박이 말이 덕석이다. 큰덕석 한 장 펴놓을 정도밖에 안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 큰 골앞에는 장수무덤이라는 고총이 있었는데 개답작업과 도로확장 공사 때 발굴이 되었다고 한다. 또 동네 앞산에「통시덤」이란 큰 덤이 있는데 바위의 생김새가 옛시절의 뒷깐(변소)처럼 사람이 올라앉아 뒷일 보기 좋게 생겼다고 한다. 「가매덤먼당」이란 곳도 있는데 새각시가 시집갈 때 타고 가던 가마모양을 한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그리고 마을어귀에는 아주 나이 많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서 아주 인상적인데 옛날 이곳은 당산터였다고 한다. 동네 뒤쪽에는 말대가리산이란 억센 산줄기가 길게 뻗혀 있는데 산너머가 유곡 송산이라고 한다. 이 동네에는 안악 이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며 세 땀에 26세대, 창녕성씨가 12세대이며, 김·전씨가 각 7세대이고 최·주·박·강·한씨 등이 두어집씩 모두 60여세대가 살고 있다. 중압밑 한길가에는 전효열부 창녕성씨 기적비(전영수씨 부인)가 서 있고 계와 성일준공의 묘소도 그 옆에 있다.
압곡리 압곡2구마을
법정동리는 압곡(鴨谷)리이고 조례상으로는 압곡 2구 마을이다. 매곡(梅谷)과 임천(□川) 두 뜸을 이루고 있다. 면소재지 못미쳐 거장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윗마을이 매곡인데 보통「매실」이라 부른다. 마을 뒤 골짝이「매소골」(매수골, 매시골로 들린다)인데 옛날엔 자생하는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고 한다. 처음 담양 전(田)씨가 한집이 정착하였는데 어른들이 밭일을 하는 어느날 꼬맹이 두 놈이 배 아프다고 뒹굴면서 야단이었다. 무엇을 먹었나 싶어 물어보니 골안에서 새파란 열매를 주워 먹었다고 했다. 얼른 가서 보니 곯아떨어진 풋매실이었다. 이때부터 마을이름이 매실(梅實, 梅谷)로 된 것이다. 아래땀 임천(□川)은 원래 소지명이 숲안(林內)이었는데 「수반」으로 변음되어 오다가 나중에 숲 좋고 냇물 좋으니 숲내로 바꾼 것이다. 마을 뒤는 역시 큰 거장산(주민들은 거창산이라 부르고 있음)이고 앞은 넓고 긴 하천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에서 보이는 산은 시루모양이라서 시리봉(시루봉)이고, 옛날 장터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들이름이「돌구지들」이다. 길쌈할 때 쓰는 돌곳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또 밭언덕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대추밭들」이란다. 의동중학교 밑 가파른 산중턱에「장수덤」또는 「싸덤」(싸더미)이라 부르는 탑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신성시하고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는 곳이다. 「싸덤」과 함께 건너 압실마을 앞 밭가운데 이름 모르는 큰 무덤이 있어 이 묘가 임장군묘라고 전해 왔다고 한다. 매실은 담양 전(田)씨가 터줏대감으로 15집이고 이(□)·김(金)·서(徐)씨가 각각 네댓집씩이다. 전(田)씨 문중재실인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임천은 창녕 성(成)씨와 담양 전(田)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정착했다고 하며, 금년이 정착한지 1백년이라고 하니 1890년(고종 27년)쯤 마을이 생긴 셈이다. 옛 서재로서 인근마을 학동들이 붐볐던 서암정(棲巖亭)은 텅빈 재실로 변했고, 한길 가에 계와(桂窩)공의 묘소와 나란히 효열부 창녕성씨 기적비가 서 있다.
다현리 지동마을
궁류면 소재지에서 봉수가는 길따라 조금 올라가면 서쪽으로 골안 깊숙이 들어앉은 동네다. 옛날엔「절골(寺谷)」이라는 동네인데 법정동리로는 다현리(多峴里)에 속한다. 동네 뒤에는 만지산이 있다. 이 동네에서 시집간 부인네들의 택호도「절골댁」이 많았는데 근대에 와서「지동댁」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유교적 관습 때문에 사곡(寺谷)이 좋지 않아서 웃대어른들께서 덩치 큰 만지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만지동으로 부르다가 다시 줄여서「지동」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골말이라 부르는 웃동네와 아랫말(배껏땀) 그리고 주막껄 등 세 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네 뒤 뒤정지 맷등이라는 너른 묘역은 노씨 선산이라고 하며 만지산 중턱으로 여러개의 소로 잿길이 있었고 자그마한 폭포가 있는 곳에 큰절이 있었다하고 원래는 골말쪽이 집터였는데 동네가 커지면서 아랫땀과 길가의 주막집, 가게집이 생겼다고 한다. 동네안에는 일원재(一源齋)라는 안악 이씨문중 재실이 있고 재실안에는 고려 검교문화 대승상장군 이견(□堅)공을 비롯하여 봉선대부전객 이정림(□挺林)공, 봉림대부 예의판서 좌찬성 이흥부(□興富)공, 정순대부판서 운관시 이흥인(□興仁)공, 광정대부문하 찬성사 이의만(□義萬)공, 예조참의 이(□)세공, 자헌대부 예조판서 이호(□灝)공 등 일곱어른의 제단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 문중이나 마찬가지지만 위선숭조의 정성은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팔계 정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안악 이씨가 17세대로 대성이고 밀양 박씨가 웃동네에 7집, 김·여·정씨가 두어집씩이고 서씨가 한집으로 모두 30세대가 살고 있다. 옛기록상 만지산하사곡(萬芝山下寺谷)이라 했지만 이제는 만지산하지동(萬芝山下芝洞)으로 바뀌어진 셈이다.
다현리 다현마을
궁류면 소재지인 석정에서 서북쪽으로 오리쯤 떨어져 있는데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네 옆으로 꼬불 잿길이 나 있는데 봉수로 통하는「나붓재(나붓티·나붓고개)」다. 신작로가 나기 전 이 동네 주위에는 온통 험준한 산고개 잿길 뿐이었고 골밖 나들이가 퍽 어려웠던 곳이다. 옛날에는 일류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단재」로 부르는 고촌이다. 동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다현(多峴)」이 된 것 같고 산고개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름이 같다보니 구별하고자 「원다현(元多峴)」이라 한 것 같다. 큰갓등을 넘어 봉수 청계쪽으로 통하는 재가「단재재」인걸보면 재이름과 마을이름이 같았던 것은 확실하다. 백여년전만 해도「유곡단재」와 「초계편단재」로 불러왔으니 좀 색다른 지명이라 할 것이다. 마을에서 보면 남동쪽이 열렸지만 역시 깊숙한 산골이다. 서남쪽에 덩치 큰 만지산(맹건산, 망조산)이 바라다 보이고 동북 서로 이어지는 산줄기에는 잿길이 많다. 서암쪽의 「단재」, 사현쪽의「나붓티」삼동으로 통하는「참나무재」, 쌍백으로 이어지는「서나무재」등 그야말로 사통팔달의 옛소로가 많다. 그래서 많고 많은 고개라「다현」으로 이름 지어진 것이라 믿어진다. 일제강점기 국토측량을 하면서 세운 깃대때문에「깃대먼당」이란 산이름도 있다. 한여름 잿길을 오가는 이들이 땀을 식히고 잠깐 쉬어 가도록 두꺼운 나뭇그늘을 만들어 주는 아름드리 참나무와 서나무를 재이름으로 삼았다. 이 마을 앞들 가운데 낮은 곳에 제법 큰 늪(못)이 있었다고 하는데「황수정」이라 했다고 한다. 또「건닝고랑(건넝고랑)」이란 개울이 있었다는데 이는 골 밖 나들이를 하자면 꼭 건너야 할 도랑(꼬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진양 강(姜)씨가 살았고 뒤이어서 윤(尹)·정(鄭)·박(朴)씨가 들어와서 큰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지금은 40여세대 뿐인데 박씨가 20집이고 정·전·이씨가 한두집씩이다. 박씨문중 재실인 단양제가 아담하다. 단제(丹濟)는 우리 고유지명과 아무 연유 없이 지어다 붙인 것이다.
다현리 신기마을
지동마을과 지척에 있는 들가운데 위치한 마을로 고유지명은「새터」다. 동쪽에 거장산(해발 381m미터)이 막아서 있으며 마을터와 논밭도 언덕배기 지형이다. 마을이 형성된지는 오래되지 않았고 큰동네에서 동떨어진 곳에 서너집이 사는「포구징이」또는 「포오」라는 작은 땀이 있다. 이 마을은 덜렁 들어 얹힌 지대의 풀밭이었다고 하며 인근마을 사람들이 들어와서 논밭을 일구고 농막을 짓고 농사를 짓게 되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새로 형성된 지역인 이곳도「새터」로 불렸고 한자로 신기(新基)로 정했다고 한다. 웃동네인 소화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다현과 지동쪽에서 흐르는 냇물이 이 동네 앞에서 합수가 되기 때문에 그 지점을「모두배기」라고 부른다. 이 곳「모두배기」밑에 있는 논들을「개무덤」이니「개무덤들」이라는데 이 말은 개(浦)와 「모둠」이란 말의 복합어인 것 같다. 즉 큰도랑 물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물길 모둠 곳이란 뜻에서「개모둠」으로 불렀는데 이 말이 변음돼서「개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포오」란 뜸이름은 큰 또랑 건너 뜸이다. 개(浦)와 밖(外)이란 말을 붙여 쓰자니 「개바께」「갯밖」이라 했다가 한자명으로 바꾸면서 포외가 되었고 발음상「포오」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포구징이」는 큰포구나무가 있었거나 아니면 물가동네란 뜻에서 쓴 것으로 보이나 확인할 수 없다. 「사창들」이란 들 이름과「사창먼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옛날 각 고을의 요지마다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이른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걷이때 받아 들이는 사창제도로서 지금의 읍·면 지역마다 2∼3개소의 큰곳집(창고)이 있었던 자리라는 뜻인데 우리 고을에도 「사창들」「창골」「창땀」「사창골」등 지명이 여러군데서 쓰이고 있다. 이 동네 앞에 「딱독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는 옛날 딱나무 종이를 만들 때 큰돌팍(딱껍질을 찧는 돌 또는 절구)이 있어서 닥나무와 돌절구(돌(石): 독) 즉「닥돌」이란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네 안에는 담양전씨 문중의 자산정(紫山亭)이 있고 길가에는「효자통정대부 만은 안악이공 유허비(이일승공)」가 서 있다. 담양전씨가 먼저와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씨가 15세대, 남·김씨가 8세대, 그 밖에 정·성·강·노씨가 두어집 씩이고 나머지 윤·장씨가 한집씩 모두 40세대만 남아 있다.
다현리 소화마을
궁류면 소재지서 십리거리이다. 옛「단재」(지금의 다현)에 속한 섭동(협동)으로 정남향으로 앉은 마을인데 「골안(안땀)」과「양지골」로 나누지만 뜬 마을이 아니고 길게 이어져 있다. 서북쪽에 봉수로 넘어가는 험한 잿길이 있는데「나부티재」고 서남방이 확 트였으며 동네 뒤 대밭이 무성하다. 마을 이름치고는 희한한데「소부실」이「소화(所火)」가 됐다는 것이다. 또 한땐「소하」로 고쳐 썼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옛 이름과 훈음이 비슷한 한자를 고르면서 「소화」로 정한 모양이다.
그리고「학산」은 이 동네 바로 뒷산이「황새등」이며 마주보는 산이「고딩이산」이다. 황새란 놈이 고동을 쪼아먹고 있는 지혈지형이라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작명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소하(沼荷)」란 지명을 쓰게 되었다. 상노인들이 호감을 갖는 이 동명은 우선 화기를 다스려 막으면서 동네 주위 자연환경과 어울린다는 것이다. 소지하화(沼池荷花)라 연못에 핀 아름다운 연꽃이란 뜻이니 썩 좋은 의미인 것이다.
마을 동쪽 산고개를 넘어 신반 나들이길이 「참나무재」다. 잿길 주위에 온통 참나무가 우거져 있고 재먼당엔 수백살된 고목 참나무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란다.「깃대먼당」이란 산꼭대기는 일제강점기 세부측량을 하면서 측량말뚝을 꽂았던 일이 있어 그런것이고「선덤」은 방석만한 바위가 높다랗게 서 있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 또 새풀(억새풀)이 무성한 골이라서「새밭골」, 피나무(단목)가 많아서「피밭골」에「성지곡」「어분골」등 재미있는 옛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마을앞 가늘게 개울이 흐르고 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소나무가 세 그루 서 있는데 바로 그곳이 당산터였다고 한다. 이곳엔 일찍이 경주 최씨, 광주 노씨, 달성 빈씨등이 자리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해주 오씨 16집, 김·노·안·빈씨가 너댓집씩. 최·이·손씨가 한두집씩으로 모두 40여가구다.
소화골
황새골
기관 유적지
궁류초등학교
벽계국민관광단지
봉황대
일붕사
의령예술촌
한우산
- 우범곤 총기 난사사건은 1982년 일어난 사건으로 벌써 40년이 지났지만 개인이 저지른 범죄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으로 범죄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루에 무려 90명의 마을 사람을 살해한 잔악무도한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