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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면(鳳樹面)
봉수면 개요
봉수면(鳳樹面)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의령군의 면이다. 의령군청으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32 km 지점에 위치하며 북서쪽으로 합천군과 인접하고 동쪽으로 부림면, 남쪽으로 유곡면과 궁류면이 접하고 있으며 국가관리 지방도 제60호선이 면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1
현재 인구는 946명이다.(2024년 1월) 생활권은 부림면 신반이다. 신반에서 합천군 대양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며, 의령 중에서도 굉장히 외지 중의 한 곳이다. 마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차량이 아니면 어디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지역이다. 면소재지인 죽전마을에 가도 빈집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까지 인구가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10년만 지나도 이 지역은 지금 인구의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이런 지역은 겁난다.

이곳의 봉수면의 마을소개는 [경상남도 의령군 홈페이지 읍면소개]에서 가져왔습니다. 첨부 표시가 없는 것은 필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봉수면 역사
봉수면은 의령 군청으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32km 지점에 위치하며 북서쪽으로 합천군과 인접하고 동쪽으로 부림면, 남쪽으로 유곡면과 궁류면이 접하고 있으며 국가관리 지방도 60호선이 면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 지르고 있다. 봉수면은 고려 27대 충숙왕 3년(1316년) 봉산면(鳳山面) 및 가수면(街樹面)과 합천군 일부를 통합 봉산면(鳳山面)으로 개칭되었다가 충숙왕 5년(1318년) 한지의 원산지라 하여 지촌면(紙村面)으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수면(鳳樹面)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557호로 합천군 대양면 오산리 일부(음지부락 20세대)가 편입 되었고 봉수면 서득리 일부(31세대)가 부림면으로 편입되었으나 법정리 및 행정리의 변동 없이 1914년 이후 현재까지 7개 법정리에 14개 행정리동, 2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 졌다.
봉수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봉수면 관할 법정리
현재 7개의 법정리와 2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삼가리 서득리 서암리 신현리 죽전리 천락리 청계리
삼가리
삼동마을
이 마을은 옛시절 가수면(佳樹面) 지역이었다. 옛 문헌에는 가수(嘉樹)라고도 적혀 있는데 이 또한 가수와 똑같이 쓰이는 말이다. 다만 고유지명인 사풀에 대하여는 산에 자생하는 억새나 띠 같은 것을 아울러서 새, 샛대 또는 새풀이라고 하므로 마을 주위의 산이나 언덕에 샛대가 무성하여 새풀이라 했다가 변음이 되어 사풀이 된 것이다. 말끔히 포장된 한길 양쪽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고 앞쪽은 큰도랑이 길게 흐르고 뒤쪽은 높은 대봉산이다. 산골짜기 이름이 재미있는데「아침돌애비골짝」이라고 한다. 봉수면 소재지를 석갑이라거나 돌애비라는 지명을 썼는데 이곳은 아침이란 말이 덧붙여졌다. 산너머가 돌애비고 이곳은 아침 해돋이때 밝은 햇빛이 가장 먼저 드는 양지편이라서 아침돌애비 골짜기로 부른다는 것이다. 큰도랑에는 능금쏘라고 말하는 소(沼)가 있는데 옛날에는 상당히 깊었다고하며 명석골쪽에 있는 용쏘와 물길이 통해 있어서 한쪽 물이 마르면 따라서 말랐다고 한다. 안산에 있는 학덤은 학의 둥지가 있었다고 하고 질매목은 산고개 잿길로 지형이 소의 목에 얹는 질매(길마)같다해서 붙여진 말로 죽전마을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당시 이마을에 도화지(그림 그릴 때 쓰이는 종이)나 선지 등을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쪽에 노개방천이라는 도랑둑(제방)은 노씨가 부치고 있는 논물 때문에 개인이 방천을 쌓기 때문에 성씨를 붙인 지명인데 타성바지 사람들이 노씨 또는 노가라고 하지 않고 노개라고 하대 했던 관습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박개(박가), 짐개(김가), 이개(이가)등의 좋지 않는 호칭이 많이 쓰였던 것이다. 동네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깊은 골짜기를 명시골이라고 하며 이 골짜기에 큰 저수지가 조성돼 있다. 저수지를 지나서 솔찍한 계곡에 들어서면 기암괴석이 많고 숲도 좋거니와 물이 좋은데 명석골(明石谷, 明石洞)이 정확한 지명이다. 그리고 당대 학덕 높은 유학자로 널리 알려진 각재(覺齋) 권삼현(權□鉉)공께서 명석정을 짓고 사시면서 서당을 열어서 많은 제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고 한다. 자손들과 문하생들의 성력을 보태어 지금 신번 서동에 새재실을 지었고 현판은 옛것을 그대로 걸었다고 한다. 1998년에는 명시골 어귀에 각재권선생명석동장수유촉비(覺齋權先生明石洞藏修遺 碑)까지 세워서 선생의 학덕과 함께 유허지임을 알게하고 있다. 마을에는 담양전씨문중의 삼석재(森石齋)가 있다. 숲이 좋은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는 삼동은 옛지명의 뿌리를 찾는다는 뜻에서 삼가동(森佳洞 또는 森嘉洞)으로 했더라면 더욱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담양 전씨가 들왔다고 하며, 지금은 전씨가 19가구, 강·김씨가 서너집씩, 최·정씨가 두집씩이고 박·민·서씨 등은 한집씩 모두 34가구가 살고 있다.
신기마을
삼가리에 속한 마을로 보통 삼가 새터라거나 사풀새터로 부른다. 마을 뒤로 큰 길이 나 있고 동네 앞으로는 큰도랑물이 흐른다. 사풀의 세 숲가운데 이 동네 옆에 있는 것이 배껏숲(바깥숲)이다. 한길가에 붙어 있는 동네 뒤편에 일제강점기에 관솔로서 기름을 짜낸 것을 송탄유라 했는데 이곳에 송탄유굴이 있었던 터라고 한다. 이 송탄유 때문에 울창했던 동네숲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산의 큰솔은 모두 베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한길에서 조금 떨어진 산코숭이에는 큼직한 바위가 몇 개가 있고 음침한 굴이 있는데 꿀덤바구라거나 굴덤이라고 부른다. 덤위쪽 산언덕에는 벌집이 많아서 꿀덤이라거나 굴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동네 뒤의 산골짜기 이름에 「댓겡이골짝」이란 드문 지명이 있다. 이는 대나무가 많은 골짜기로 대의 겡이(옹이)를 댓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대나무 뿌리가 땅위로 나와 있어서 밟고 다니게도 되는데 이런 곳의 지명에 댓겡이재라거나 댓겡이골짝이라는 좀 보기 드문 토박이말이 쓰이고 있다(칠곡면 산북리의 죽공마을이 토박이말로 댓겡이로 부르고 있다) 이 동네앞 큰 도랑물이 흐르는데「가매쏘」란 제법 깊은 곳이 있다. 생김새가 꼭 가매솥(가마솥)같은 웅덩이라서 그런 지명이 붙었으며 또한 논물을 대기 위해서 보를 막았으므로 가매솥보라고 한다. 이 마을 뒤쪽 서재골은 옛날 서당(서재)이 있었던 곳이고 그쪽으로 소로가 있었는데 궁류로 넘어가는 잿길이었다. 이 마을에는 최씨와 윤씨 그리고 정씨가 같은 시기에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정씨와 최씨가 7가구씩이고 허씨가 셋집 나머지 표·박·김·오씨 등은 한두집씩으로 모두 24가구가 살고 있다.
서득리
서득마을
옛시절 가수(佳樹, 嘉樹)면 지역인데 한때는 신흥동(新興洞)과 서득동(西得洞)이란 지명으로 보림리에 속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역참제도(驛站制度)가 운영될 때 사근도(沙斤道)에 속했던 신흥역(新興驛)이 있었던 곳으로 서북으로 초계(草溪)의 팔진역(八鎭驛)으로 연결되었다. 신흥역에는 기마 2필과 복마 4필에 역리와 역노(역졸)가 35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의령에는 두 곳의 역과 9개의 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서득마을이 신흥역이 있었던 곳이라서 한때는 신흥동으로 기록된 문헌도 있다. 서득마을은 삼거리마을과 상암평, 하암평, 직금 등 네동네를 이루고 있지만 옛시절엔 짠디말(짠대말이라고도 함), 지금 덤들(웃덤들과 아랫덤들)이라고 불리워 온 곳이다. 짠디말은 역촌이라 말을 길러야 하기 때문에 널찍한 짠디 풀밭이 있어서 그런 지명을 썼다고 한다. 지금은 그냥 서득삼거리라 한다. 「지금마을」은 옛문헌에 지금제(地錦堤)가 있었는데 길이가 245척 넓이가 7척으로 정곡리(定谷里 :지금의 유곡면)소속으로 돼 있다. 제법 큰 제방과 함께 물이 좋았던 골짜기임을 짐작 할 수 있다. 그 뒤 옥녀봉 전설과 함께 풍수지리설 그리고 훗웅덩이(훗웅동)라 해서 골 깊숙한 곳에 있는 자연샘은 칠년대한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면서 산자락의 제법 높은 벼랑 밑에 있다. 이 동네서 나직한 산고개를 넘으면 유곡면 마장동리다. 그리고 상암평과 하암평 마을은 옛시절에는 웃덤들과 아랫덤들로 마을 옆 큰바위(덤) 때문에 덤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또 한 이 지대는 온통 큰돌이 널려 있는 밭들이라 물을 대놓으면 금방 빠져 버리는 돌너드렁밭 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덤들 즉 바위가 널려 있는 논밭이란 지명은 썩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이 덤들이란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암평(巖坪)으로 했다. 그리고 웃뜸이라 상암평이고 아래뜸이라고 하암평으로 고쳐 쓰고 있는 것이다. 삼거리에서 지금쪽으로 쑥 나온 산줄기의 끝자락에 큰덤이 보이는데 수리덤이라 한다. 큰수리(독수리 또는 수리부엉이라고도 함)가 살았다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직금마을」의 동구에는 엄청 크고 나이먹은 정지나무(정자나무)가 네그루 있고 그 옆에 조산(막돌탑)이 두곳이 있다. 나무는 동신목(洞神木)으로 받들면서 마을밖 나들이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절을 하고 또 조산에 돌을 주워 얹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동양재(東陽齋)란 큰 재실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삼거리마을은 27호, 상암평 7호, 하암평 8호, 직금마을은 27호가 살고 있으며 김해김씨가 21집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 박(朴)·설(薛)·전(田)·한(韓)씨가 7집이며, 이(□)·허(許)·황(黃)씨등이 너댓집씩으로 네동네를 다하면 80가구다. 직금에 허씨문중의 동양재(東陽齋)와 상암평에 선산김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하암평에 법화종의 미타암 절이 하나 있다.
서암리
서암마을
봉수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0리길이다. 합천땅과 접경인데 옛날에는 봉산면에 속했고 마을 앞 도랑을 건너면 초계땅이었던 청계마을(현재는 의령지역)과 이웃해 있다. 서암이란 지명은 그대로 풀이하자면 서녘바위다. 서녘을 보고 컹컹 짖고 서 있는 개 모양이라는 개바구(개바위)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한다. 고을의 서쪽끝이고 국사봉 정상에 있는 개바구 때문에 마을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원래「개」란 말을 천시하고 기피하는 관습때문에 바구(바위)만 따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때 이 개바구는 어느집 헛간 담밑에 묻혀서 얘기로만 알려졌지만 애향심이 깊고 전통문화에 관심 높은 마을 유지분들이 노력으로 한지전시관 마당에 옮겨 세웠다. 국사봉이 마을 뒤로 감싸고 있으며 앞산이 만지산(어떤이는 망조산이라 부름)이 우뚝 서 있고 조선종이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대동사는 축대와 탑의 기단으로 보이는 장대석 몇 개만 남았을 뿐 흔적도 없다. 국사봉 정상의 까막새미(오정암(烏井岩) · 오두정(烏頭井)) 그리고 바위숲도 좋거니와 가을철에는 띠풀밭이 자랑이다. 옛날 가뭄이 심하면 이 국사봉 정상에서 무제(기우제)를 올렸는데 초계원이 주관했고 사흘안에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파평 윤씨가 먼저 자리잡았고 이어서 순창 설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박씨가 25가구, 강씨 22가구, 이씨 12가구, 최·김씨가 각 9가구씩, 노·허·정씨도 서너집씩인데 모두 1백5가구가 살고 있다.
오산마을
봉수면소재지(죽전)에서 서북쪽으로 십리가 좀더 되는 곳에 오산마을이 있다. 그 전에는 옆집에 가도 합천(대양면)가는 셈이 되고 샛도랑만 건너도 의령(봉수면)가는 길이 되는 곳이었는데, 금년초 바로 잡혀서 봉수땅으로 넘어 왔다. 저만치 우뚝 솟은「국시방」을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 내려다 보고 있다. 양지뜸, 음지뜸으로 나누어져 있고 두 뜸 사이는 좁은 들과 한길 그리고 도랑이 있다. 옹기종기 붙어서 퍽 아늑해 보인다. 옹달쪽을 보통「오산음지」라 부르는데 마을 뒷산이 까마귀가 두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 까마귀산이 동명의 유래라고 한다. 또 바로 밑 골짝에는 「골짝새미」가 있는데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국사봉의 「가는등」밑자락에 위치한「오산양지」는 까마귀산을 마주 바라보면서 남향받이 마을이다. 국시방 정상 조금 아래쪽에는 네폭짜리 병풍을 닮은「병풍바구」와 그 밑에「장군설」이 있다. 국사봉은 조선시대 임금이 대신이나 내시(內侍) 또는 지방관속을 시켜 명산대천, 서낭신에게 치재를 드렸던 국사당(國師堂)과 같은 연관 때문에 산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옛문헌에도 국사(國士)가 아니고 국사(國師)로 되어 있다.산꼭대기에 있는「까막새미(烏井岩 또는 烏頭岩)」도 얼른 보면 하찮은 구멍같지만 물이 고여있는 신기한 바위였다. 군계지점의「똥매산」은 동산이란 말이 경음화한 말이다. 이 곳에는「정헌대부전행동지중추부사(正憲大夫前行同知中樞府事)」김해 허공((許惺)의 묘역이다. 군계를 넘으면 합천군 대양면 오산마을이 있고 또「오소골」이니「오수골」이란 마을은 한자로 烏西로 적고 있는 걸 보면 이 지역은 까마귀와의 관련이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앞도랑은 오소골과 팔진도랑물이 합쳐지며 「은당보」가 아주 오래된 것인데 논물은 물론 수백년동안 물레방아를 돌게 한 넉넉한 봇물이었다고 한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그때 쓰던「돌호박(돌절구통)」이 한 개 남아 있다. 초계 팔진역(八鎭驛)과는 시오리 남짓해서 옛날에는 이곳의 논밭 일부가 역전(驛田)이었던 것 같다. 마을 주위의 산기슭, 밭두렁이 온통 딱밭(닥나무밭)이었고 접창호지(겹창호지)가 많이 생산되었던 오산마을은 지금도 수공으로 조선종이를 만든다. 양지뜸 한길가에 어질고 청렴한 목민관 이재준(□載駿), 이찬희(□贊熙) 두 군수의 선정비가 있다. 두 땀을 보태서 54호인데 김(金), 노(□)씨가 8호, 최(崔)·박(朴)·유(□)·강(姜)·이(□)·윤(尹)씨등이 서너집씩인데 밀양 박(朴)씨가 먼저 터 잡았다고 한다.
신현리
신현마을
옛시절 봉산면(鳳山面)지역으로서「담안」이라거나 새들(신평), 새말기(새말, 신촌)로 불리기도 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지금은 신촌(新村)과 장류(長柳)마을 과 또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국사봉 중턱의 획계(획기)란 뜸이 포함된다. 담안이란 지명은 신촌(새말)마을앞인데 옛시절 한집안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바깥으로 돌담부랑(돌담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장류는「진버들」로 불리우는 마을인데 개울둑을 따라서 길게 버들 숲이 있었던 곳이라 자연스럽게 동리명이 되었고 한자표기를 하면서 장류로 했다고 한다. 획계(획기)는 국사봉의 중턱의 큰골과 절골사이에 있었으며 협계(峽溪) 또는 협곡(峽谷)에서 비롯된 말이 변음 되어 쓰인 지명으로 추측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신현마을 뒷산은 필봉산이라는데 이는 산의 생김새가 붓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신촌마을도 이랫웃뜸으로 나누어져 있고 장류마을은 조금 떨어져 있지만 버들 숲처럼 길쭉한 형태다. 획계의 절골이란 곳은 대동사(大同寺) 큰절의 부속 암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기 불편해서 그렇지 그 자리는 집터로도 좋을 뿐 아니라 물이 더 좋다고 한다. 뒤로는 국사봉이 버티고 서 있고 동네 앞으로는 땅심 좋은 들이다. 옛날 의관(議官)을 지낸 신종희(申鐘禧)란 분이 살았는데 이분은 닥종이를 쳐서 서울이며 개성까지 가져가서 파는 종이장사였다고 한다. 이분은 돈도 많이 모았지만 인심이 후하여 이 지역의 어려운 민초들을 돕는 일을 변함없이 계속 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전의관신종희송덕불망비(前議官申鐘禧頌德□忘碑)를 세웠다고 한다. 또 길가에는 허건(許健)공의 부인 경주김씨의 포행비와 김동익(金東翼)공의 부인 밀양박씨의 효부비도 서 있다. 임란창의 18장중의 한분으로 널리 알려진 허자대(許子大)의병장을 추모하는 인익재(仁翼齋)가 있고 밀양손씨 문중의 일신재(日新齋), 장류에는 경주김씨문중의 계림재(溪林齋)가 있다. 원래 이 마을에 잇던 쌍절각(雙節閣)은 지정면 성산리 기강나루 쪽으로 이건 해 갔다. 이 마을에는 김해 허씨가 먼저 들어오고 뒤이어 여러 성바지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는데 지금은 신촌이 38가구, 장류가 19가구다. 경주 김씨 25가구, 허씨 9가구, 손씨 8가구, 최씨 4가구에 강·고·박·윤씨 등은 두어집씩으로 전체 56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이동리 뒤편 산자락에는 영모재(永慕齋)란 현대식 건물의 재실이 있다. 앞서 말한 신종희 공을 추모하는 재실이며 옆에 내외분 묘소가 있다. 묘비에는 행현릉참봉중추원의관(行顯陵參奉中樞院議官) 일범거사평산신공휘종희지묘(一帆居士平山申公諱鐘禧之墓) 배숙부인청송심씨(配淑夫人靑松□氏)라 새겨져 있다. 이 재실은 신학빈(申學彬)씨의 별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자기 부모님의 묘소와 재실이다. 그리고 신종희공의 제씨되는 분은 관희(寬禧)공인데 이분도 의령서동에 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일 때문에 서동동민이 세운 송덕비가 의령교회앞에 서 있다.
사현마을
법정동리상으로는 신현리(新峴里)에 속하고 행정조례상 동리로서 사현마을이다. 옛날에는「모래듬」이니「모래등」이라 불리었다고 하며 역시 봉산면에 속했던 곳이고 한자로는 사등(砂嶝)이라 적었다는 것이다. 큰덩치의 국사봉(國師峰)의 줄기가 뻗어 내려와서 이 동네 뒤 (서북방)를 받치고 있으며 앞으로는 안산이 더 높아 보이고 산밑으로 큰 개울이 흐르고 골짝 논들이 제법 너르다. 비가오는 계절이면 경사가 급한 뒷산 계곡으로 토사(土砂)가 많이 내려오기는 하지만 모래와는 깊은 관련이 없는 마을이다. 그런데 어른들 말씀으로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동네를 이룰적에 온통 모래가 수북히 쌓여 있는 지대였다고 한다. 그래서 모래등이 흘러 내리는 지대임이 틀림없기는 하다. 이 마을도 동서방향은 트여 있지만 산촌이고 또한 국사봉으로 가자면 이 동네를 지나서 가파른 산고갯길이 계속된다. 동남쪽으로 빤히 보이는 산고개가「나부티재(나부티재)」인데 이 재를 넘으면 궁류면 다현마을이다. 「나부티」란 산고개 이름을 더러 볼 수 있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구구하다. 나비를 이 지역 토박이말로「나부」라 하는데 산고개의 지형지세가 나비가 날개를 편채 꽃잎에 내려 앉으려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어서 궁류나 유곡을 비롯해서 의령쪽 나들이를 했지만 이제는 포장된 도로가 있다. 처음 밀양 박씨가 터 잡았고 그 뒤 합천 이씨가 들어와서 큰 살림을 이룬 부자가 있었다고 하며 김해 김씨도 잘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박씨, 김씨가 7가구씩이고 허씨가 5가구, 강씨 4가구, 최·오·구·조씨등은 한두집씩 모두 34가구가 살고 있다.
죽전리
상곡마을
법정동리로는 죽전리(竹田里)에 속하고 행정동리상으로는 상산(上山)과 곡산(谷山)을 포함해서 상곡(上谷)으로 부른다. 상산마을이 더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고 곡산은 조금 아래쪽에 자리잡았지만 역시 깊은 산골짜기 마을이다.
해발 688미터의 국사봉(國師峯)의 품안에 있는 한적한 마을인데 억센 산줄기가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다. 새미질이라 부르는 개울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골안 깊숙이 들어가면 마을이 보이는데 동구에 자연샘이 있다. 이 새미물은 사시사철 그대로이고 오가는 사람들이 한모금씩 마시게 된다고 한다.
동네 좌우로는 큰새밭등과 너분등 띠딤이등이라고 부르는 산줄기고 깊은 골안에 자연샘이 있어 큰 새미골짝이라 부르고 그 옆은 새미뒤라고 한다. 좀더 들어가면 미리골이고 상당히 가파른 산길을 따라 잿길이 나 있는데 진등재로 합천(적중면)으로 이어지는 고개다. 잿길이 길고 험하여 진등(긴 산등성이란 뜻)재라 했다.
동네 앞산은 너분등이라고 부르는데 넓적하고 평평한 산등성이라서 그런 지명을 쓴다고 한다.
옛날에는 곡산(曲山) 즉 꼬불꼬불한 산길따라 한참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서 그런 지명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곡(曲)자는 곧지 않다거나 구석지다 또는 사람 사는 동네란 뜻을 가지고도 있으며 곡산곡수(曲山曲水) 즉 골 돌아 깊은 산골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산골짜기 물이란 말이 있으니 이동네의 지형을 잘 드러낸 지명인 셈이다. 그러다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이 곡산(谷山)으로 바뀌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26호만 남아 있다고 한다. 김해 허씨문중의 의산재(宜山齋)가 있다.
죽전1구 마을
이곳 역시 옛날 봉산면(鳳山面) 구역으로 법정동리로는 죽전리로서 죽전 1구와 죽전 2구, 상곡(上谷) 등 세동리가 포함된다. 행정동리 명칭을 정하면서 서쪽마을은 1구, 동쪽은 2구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에서도 석갑과 돌애비란 지명이 나오는데 확실한 유래와 뜻을 아는 이가 없다. 일설에는 이곳의 지형지세로 보아서 석암(石巖) 또는 석애(石崖)란 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란 설명과 석합(石合) 또는 석압(石岬)으로 한 것이 변음이 되거나 와음으로 서갑(석갑)으로 부르게 된 것이란 설명이 있다. 그런데 삼백년도 더된 침간정과 봉양제 재실 기문에는 봉산(鳳山)의 석촌(石村)으로 돼 있다. 봉산은 옛 행정구역상 봉산면 지역이기 때문이고 석촌은 역시 돌이나 바구(바위)가 지천인 곳이란 뜻인 것 같다. 이곳도 자연환경과 지형지세로 보아 돌말로 불렀던 모양이다. 한편「돌애비」란 지명에 대하여는 그 유래가 불확실하다. 이곳은 광복후까지도 야생닥(닥)을 원료로하여 수공업형태로 만든 전통한지(조선종오)의 주산지였다. 당시만 해도 나락가실(벼 수확)과 보리갈이를 한 뒤부터 내년 6월경인 보리가실(보리수확)때까지 이곳을 비롯하여 궁류, 유곡 등 인접지역의 사람들이 등짐을 한채 전국을 돌면서 「종오장사(종이장사)」를 하는 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 동네 큰 개울가 자갈밭에는 온통 종이를 떠서 말리는 곳이었고 집집마다 종이를 뜨고 말리며 남녀노유 할 것없이 일류기능사였다. 개울건너의 동긋한 산을 농덤이산이라 부르는데 이는 농짝만한 바위가 늘어 서고 포개져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하며 깊은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도랑물은 그야말로 청정한 석간수(石澗水)였다. 바위절벽이 있는 뒷산은 진등산(긴등대의 산줄기란 뜻)이라 부르며 마을터는 남향받이로 앉아 있다. 개울옆 길가에는 큰나무 숲이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다. 동네안에는 지금으로부터 330여년전인 1883년경에 지었다는 허씨문중의 침간정(枕磵亭)은 오랜동안 서당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마을 안에 진양강씨의 봉양재(鳳陽齋)가 있다. 침간정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어른들은 골내릴 방이라고 하는데 골짝도랑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원래 파평 윤씨와 밀양 박씨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 김해허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허씨가 31집으로 대성이고 이씨와 최씨가 6집씩이다. 정·서·전씨등 나머지는 서너집씩으로 모두 98가구가살고 있다.
죽전2구 마을
봉산면(鳳山面)의 석촌(石村)이면서 보통 호칭은「돌애비」고 한시절 지촌(紙村)이란 지명을 쓰기도 했던 지역으로 전통한지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이 지역의 토박이말은 군내 다른 지역과는 다른점이 더러 있다. 바깥말(배껏마을)을 베개몰이라거나 마을(마실, 말)을 말기라고 하는 등 독특한 말이 있다. 이 마을도 서쪽의 일구마을과 이어져 있으며 면소재지라 여러기관과 단체사무실이 있다. 마을안에 허씨종중 재실인 추원재(追遠齋)가 있고 김해허씨가 28집으로 역시 허촌인 셈이다. 그밖에 최씨 2집 강·김·이·오씨등 여러 성바지가 있지만 모두 한 두집씩 뿐이며 전체가 47집이라고 한다.
천락리
천락마을
옛시절 가수(佳樹 또는 嘉樹)리의 천락동(天□洞)이었는데 한때는 보림리(寶林里)의 천락동이었던 적도 있었다는 문헌기록이 있다. 서득 삼거리에서 깊은 산골짜기로 십리쯤 들어가야 한다.
옛날에는 골안마을을 구별없이 천락동이라 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아래윗동네로 나누어졌고 웃뜸을 상천락(上天□), 아래뜸을 하천락(下天□)으로 정하자 큰 갈등이 생긴 것이다. 아래 하(下)를 붙이는 것은 신분이나 지위의 낮음을 뜻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웃마을은 상천락(줄여서 상천)으로 하고 쓰게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보통 부를 때는 아랫 천락이라 하기도 한다.
골안 깊숙히 들어 앉아 있고 남향받이 산비탈터에 계단식으로 집이 들어서 있다. 마을뒤로 봉화산이 있고 서쪽 산꼭대기의 부무재가 보인다. 마을 뒤로 산고개 잿길이 있는데 옛시절에는 손바닥만한 산전 논도가리가 많았고 산골 도랑물을 끌어서 농사를 지어야 했으니 논마다 홈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홈골이란 지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 큰 덤은 나발모양이라고 나발덤(나팔덤)이다. 동네 앞들 이름이 끽기들이다. 옛날 큰부자집 논을 소작으로 부치던 터이라 일보는 마름(사음)에게 잘 보여야 소작료를 적게 내기 때문에 작황을 둘러보게되는 때에는 온마을 사람들이 마름을 따라 다니면서 비위를 맞추어야 했고 푸짐한 술자리를 마련하는 등 야단스러웠고 드디어 소작료가 많이 탕감되자 모두가 기뻐서 한바탕 매구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논붙이는 민초들이 기꺼워 했다는 뜻에서 들이름을 끽기들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네 건너 산자락에 뿔쥐덤(뿔찌덤)이란 큰 바위가 있는데 덤밑의 굴속에 뽈찌(뿔쥐: 박쥐)가 살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동네 주위에는 딱나무(닥나무)가 지천이었지만 요즘 와서는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닥나무 보기가 어렵다. 마늘과 담배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다.
물 좋기로 첫번째라 그런지 천락골은 장수하는 노인이 많기로도 손꼽힌다. 처음 들어온 문중은 김해김씨지만 지금은 장씨가 14가구로 가장 많고 서(徐)·김(金)·이(□)씨가 너댓집씩이고 권(權)·정(鄭)·최(崔)·조(趙)·임(□)씨 등은 한집씩 모두 34세대가 살고 있다.
양지바른 언덕배기터에 자리잡은 천락마을, 낙천지(□天地)로 여기면서 터전을 잡은 웃대분들의 여유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지명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 동네 앞들 가운데 느티나무(당산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축대에 글이 새겨진 돌비(자연석)가 박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강압에 의해서 세웠던 황국신민서사지단(皇國臣民誓詞之壇)이라 새겨져 있다.
상천마을
봉수면소재지서는 이십리길이고 신반 서득에서 가면 시오리쯤 된다.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천락(天□) 마을 두 뜸이 있는데 상천마을은 「웃천락」「상천락」이니 줄여서「상천」이라 한다.
옛날 봉산과 가수면으로 분리돼 있을 적에는 가수면 지역이고 동명도「지경」또는「지경마」라고 불렀다. 초계 땅과 의령고을의 경계가 바로 이 마을이었던 때문에 지경(地境)이란 소지명을 쓰게 되었고 「마」는 마을, 마실의 준말인「말」(또는 몰)이 다시 받침소리의 탈락현상으로 「마」로 굳어져 쓰인 것이다.
지경촌(地境村) 지경말 지경마 또는 더 줄여서「직마」「직말」로 변천된 것이니 좀 특이한 예가 될 것이다. 또다른 지명인「천락」은 고친 시대와 연대는 알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골안에도 뜸이 여럿 생겼고 위쪽을「웃천락」(상천락), 아래뜸을「아래천락(하천락)」으로 구분했는데 「아래」또는 「하(下)」란 말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웃천락은 「상천」으로 했고「아래천락」은 원래 골이름인 「천락」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상천마을 조금위에 가면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짝 도랑이 있고 개울옆 길가엔 큰 덤이 무겁게 앉아 있다. 이 덤이 바로 고을의 경계지점이고「새덤」또는「새이덤」이라 부른다. 「지경덤」이라고도 하는데 그 밑이 유명한「용쏘(□沼)」또는「용쏘또랑」이다. 시대의 변화로 「용쏘또랑」도 저수지안에 묻혀 버리게 되었다. 마을뒷산 중턱에 「북덤」이란 큰 바위 세 개가 서 있다.
삐쭉한 선돌 두 개사이에 북채 모양의 또다른 바위가 있는데 흔들면 양쪽 선바위에 부딪히면서 북소리가 난다는 신통한 바위다. 북덤의 소리가 크고 우렁차면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불행한 일이 생기기 않는다는 속신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 앞 뒤 산자락에는 닥나무가 지천이었고 손으로 떠서 만든 조선종이도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마을 안에는 전주 이씨 문중 재실인 백암재(白巖齋)가 있고 이씨가 20여호로 대성이었다. 김·권·정·오씨는 겨우 두서너집씩이다.
청계리
청계마을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어린 십리길, 서암마을 건너에 있는 제법 큰 동네다. 큰 도랑에 맑은 물이 흘러 청계가 된 건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초계군(草溪郡) 백암면(柏巖面)의 다현(多峴)마을이었는데 1914년에 우리고을에 편입되면서 청계로 지명이 바뀐 것이다. 「단재(댄재)」「막대골」이라고도 부르지만 그보다는「초계편」이란 소지명이 더 많이 쓰인다.
개울 독다리(돌다리)만 건너면 의령땅이라서 서암쪽 사람들이 「초계편」으로 부르게 된 것이며, 그 역사는 꽤 오래다. 단재도랑(지금은 청계도랑)을 경계로 해서 해마다 줄땡기기(줄쌈) 민속행사가 벌어졌고 해거름 파장에는 결국 가벼운 실랑이가 생겨서 돌자갈을 던지거나 메신짝을 던지기도 했던 것이다.
「단재」란 지명은 재(산고개)가 많다는 뜻의「다현」의 풀이말인데 이상하게도 재너머는 궁류 다현이고 이쪽은 초계 다현이다. 이런 예는 썩 드물다. 또 이 지역에는 의령권 방언에서 볼 수 없는 토박이 말이 더러 보이는데「말기」란 말이다. 「아랫말기」「웃말기」「말기밖」등이다. 「마을(마실)」을 「말기」라 한다. 「막대골」은 너덧집 있는 작은 뜸인데 오래된 각단이다. 초계 땅의 끝 즉 막다른 동네라서 그렇게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방골 골짝 들머리 오른쪽 첫각단이라「막대골」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골안 한참 들어가면「한실재(또는 배애재)」가 있다. 초계 ·삼가쪽 나들이 소로인데 재너머 쌍백면 대곡(한실)마을이름 그대로 딴 재이름이다. 마을 뒤에는「망조산」(만지산의 변음)이 제법 높고 앞쪽 안산이 「황새등」이고 좀 멀리 우람한 국사봉(國師峰)이 마주 섰다. 그래서 지형상으로「고딩이설(고동혈)」이라 별로 좋찮은 터로 여기기 쉽지만 마을앞에 「못새미」라는 자연우물이 있어서 액기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황새와 고동, 물 넉넉한 개울 반양반음의 마을터라 하찮은 곳은 아니다.
마을 앞쪽은 「단재들」, 방계쪽은「장배기들」「도장골」등 옛지명이 남아 있다. 황새등 자락에 대청암(大淸庵)이란 법화종의 작은 암자가 있다. 서암마을에 딸린 것이지만 청계마을과 관계 깊은 「개바구(개바위)」이야기를 해야 겠다. 옛날 국사봉 장수와 만지산(망조산)장수가 힘자랑을 하면서 이 돌을 던지고 또 되받아 던지다가 그만 떨어져 꽂혔다는 것이며 생김새가 개(犬)모양이라서「개바구」라 한단다. 그리고 옛날 가뭄때 국사봉 무제(기우제)는 초계원이 주관하고 「초계편」사람들이 동원되었던 유래도 있었던 바 우리고을 산이 된지도 얼마 안 된 역사다.
가장 처음 파평 윤(尹)씨가 들어왔고 이어서 문화 류(柳)씨라는데 현재 함평 노(□)씨 25집, 김(金)·박(朴)씨가 5집씩, 최(崔)씨 3집, 강(姜)·손(孫)·전(全)·류(柳)·윤(尹)씨는 겨우 한두집씩 뿐이다. 전라도 함평서 이곳(영남)으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이름 붙인 영평재(□平齋)는 노씨문중 재실이다.
방계마을
방계마을은 법정리로는 청계마을과 함께 청계리의 자연마을 중의 하나이며, 행정리동으로는 방계로 독립되어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방계마을은 다시 세분되어 상계마을, 하계마을, 방동마을로 나뉘어서 불리고 있다. 처음에는 합천군에 속하여오다가 1316년 봉산면, 가수면 및 합천군 일부를 통합하여 봉수면으로 개칭시 편입되어 지금의 청계리와 서암리 막대골과 합쳐 청계리라 칭하여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칭때 윗말기는 상계, 아랫말기는 하계, 방골은 방동으로 개명하고 이들 3개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방계마을이라 불리우고 있다.
현재는 3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