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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덕면(龍德面)
용덕면 개요
용덕면은 경상남도 의령군의 행정면이다. 의령군의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동쪽 경계가 함안군과 닿아 있다. 수박, 멜론, 참외, 호박 등을 주력 생산하는 농촌 지역이다.
인구
세대수 887, 인구 합 1,448명 남 748명 여 743명(2024년 01월 현재)
행정구역
21리 13반 21마을
용덕면의 역사
용덕면의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관할 행정리
- 가미리 죽전리 정동리 이목리 신촌리 연리 와요리 운곡리 용소리 소상리 교암리 가락리
이하 마을 역사와 지명유래는 [의령군청 읍면안내 지명유래]에서 가져왔습니다.
용덕
용덕면의 용덕은 용암 마을의 용과 덕암마을의 덕을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가미리 가미마을
용덕면 소재지서는 의령쪽으로 나와서 북서쪽의 깊은 골을 따라 한참 들어가야 한다. 용덕면은 옛날 田太와 漁火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 뒤 德巖과 □巖으로 개명했다가 일제강점기에 통폐합 되면서 앞글자만 따서 오늘의 면 명이된 것이다.
지금 「가미」마을은 덕암골 중간지점에 있는 마을로 원래 소지명은 「가무네미(가무넘이)」라 했다. 순수 고유어이고 복합어 형태의 지명이다. 「가무(가모)」는 「가물다(旱)」의 변칙어간이면서 받침소리가 탈락된 말이며 「네미(넘이.너미)」는 「넘기다」「넘우다」「너므다」의 옛말로서 우리지방에서 흔히 쓰이고 있다. 뜻풀이로는 「가뭄을 넘기다」가 되며 지명의 유래로는 좀 특이하다. 민초들의 원과 한(恨) 그리고 삶의 소박한 애환이 담겨진 땅이름이라고나 할까. 옛날 이 지대는 모두 독재갈밭(돌자갈밭)이고 돌너드렁이라서 언제나 농작물이 가뭄을 타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샛말로 한발상습지대인 셈이다. 그러자니 「가뭄 넘기」가 생활의 큰부분이었고 전답에 물기만 있었어도 웃음꽃이 피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개답도 했고 개울보도 막았지만 물 헤프기는 여전했다.
그래서 논도가리마다 듬붕(웅동.웅덩이)하나씩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천둥지기 다락논 아니면 하늘받이 산전이나 다를바 없었던 그야말로 얼기미논(어레미논)이었던 셈이다. 다른 들논 논두룸(논두렁)이 무너지도록 비가 잦아야만이 동네서 큰웃음이 나왔더라니 보릿고개와 함께 숭년(흉년)살이 「가무네미」사람들의 정한을 읽을 수 있는 지명이다. 일제강점기 지명정비를 하면서 두음절 한자로 개명을 해야했으니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가미(佳美:썩 아름답다)로 정한 것이다. 아래위로 두 뜸이 있는데 웃깍단, 아랫깍단으로 부른다. 각단의 중간지점을 「망덕껄」이라 하고 널찍한 공터다. 아마 옛시절 큰맷돌9망도리)이나 연자매가 있었던 곳이라서 그런 지명이 붙은 것 같다. 동네 뒤안 골짜기가 「가무네미골」「갓재」「김아무개갓재」「터분이골」「뒤모골」등 토박이말로 된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동구밖 「솔징이」는 소나무숲이라는 뜻인데 「징(징이)」란 말은 정(亭)도는 정자란 뜻으로 다른 곳에서도 흔하게 쓰이고 있다. 경지정리와 용수로 설치때 솔숲이 많이 없어졌는데 이일로 해서 동네가 잘 안된다고 믿는 노인분도 있다.
속신 또는 미신으로 치부하기에 앞서 순박한 민초들의 자연숭배사상과 풍수에 대한 깊은 신심이라 보아야할 것이다. 서산 밑으로 흐르는 산골도랑에 동네보(洑)가 묻혀 있는데 이건 펜수보(편수보)라 한다. 보 옆에 불매깐(성냥간.대장간)이 있어서다. 동구밖에는 묘하게 생긴 선돌 두 개와 서낭나무가 있는데 정월 길일을 받아서 동신제를 올린다고 한다.
얼마전만 해도 조산도 있고 장승도 서 있던 신령스런 곳이었다고 한다. 또 논도가리가 서마지기인데 길쭉해서 진배미(긴 논배미)란다.
마을의 역사 또한 오래됐지만 어느 성바지가 먼저 정착했는지 승각이거리다. 지금은 김해김씨 25집, 남양홍씨 16집, 경주김씨 14집, 경주최씨 7집, 성산이씨 4집, 그리고 車, □씨가 두어집 모두 70여세대가 의좋게 살고 있다. 원모재(遠慕齋), 덕남재(德南齋), 한은재(閒隱齋)등 문중재실이 있다.
옛지명 「가무네미」를 모르는 세대가 많은데 이제 들밭논 할것없이 거의 다 옥답이 됐고 주위 산에도 유실수가 가득차 있어서 더욱 넉넉해 보인다. 산천도 시절도 그리고 인심도 다 가미로 변했다고 할까.
죽전리 상죽마을
용덕면 덕암골 들머리에 위치한 죽전마을은 법정 동리명이고, 행정조례상으로는 웃마을을 상죽(上竹), 아랫동네를 下竹으러 정했다. 일제 강점기에 지명을 작명할 때 편한 대로 가장 많이 쓴 것이 상중하(上中下), 一二三四, 또는 內外와 新舊등이다. 이곳 역시 「대밭골」을 죽전으로 했으니 전통 지명의 뿌리는 살린 셈인데 다만 행정 편의상 분할하면서 또다시 上下로 정함으로써 소박하고 유래 있는 마을 지명이 잊혀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상죽전, 하죽전인데 두음절 지명으로 하자니 田은 생략한 채로 엉뚱한 지명이 생긴 것이다.
옛날부터 불리어 왔던 「어룡골」「가는골」「서재골」등은 아예 잊혀진 땅이름이 된 셈이다. 어룡골은 동네 앞에 물조은 못이 있어서 수백 살 된 물고기란 놈이 살았다거니 이시미(용이 못된 이무기를 말함)가 용이 되어서 승천한 그야말로 양택으로서는 제일이라는 뜻이 담겼다는 얘기도 있으며, 가는골은 군내에도 더러 있는 지명인데 골안이 좁다란 것이 공통적으로 큰 동네가 아닌 작은 뜸임을 알 수 있는데 한자로는 細谷, 細洞등으로 적고 있으니 솔직하고 길다른 골이란 뜻이다.
서재터는 옛시절 한문글 배우던 서당겸 재실이 있어서 부르게 된 지명이고 또 이곳에는 덕암과 용암이 분리되어 있을 당시 면소재지였다고 한다.(지금 농협 창고 자리)그런데 지명을 부르면서 「어렁골」이니 「어언골」「어롱골」등 여러 가지임을 보면 이곳도 어언골이 연음이 되거나 와음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고 어떤 분은 얼음골, 의령골로 말하기도 하여 혼란스럽기도 했다.
할머니 세대의 택호도 어렁골띠기(‘ 띠기’는 댁이란 토박이 말)고 어렁골 양반이란 호칭도 남아 있었다. 성비골로 통하는 쪽을 보통「기빙이골」이라는데 이는「기봉」이란 사람이 살았던 터라 하대하여 부르는 지명으로 이같은 예가 더러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유명한 태암서원이 있고 그 뒷산이 황새등(황새봉)이라 황새의 몸통에 해당하는 대명당이고 상죽마을 뒷산이 황새의 발에 해당하고 가는골 뒷산은 가는등인데 황새주둥이(부리)에 해당된다는 속설이 있으며 가는등의 깊은골 안을「속굼티」라 부르며 그곳에는 물이 마르지 않는 작은 자연샘이 있다고 한다.
한편 첨모재 뒷산을 어은등(魚隱嶝)으로 적고 있는데 앞에 말한 어렁골과 이 어은등과의 연관이 있지 않아 싶다.
동네 앞 죽전 들에는 「열마지기굼티기」란 지명을 쓰는데 그 들 가운데는 칠성바구(일곱 개의 支石:고인돌)가 있었다고 하며「신꼴덤」이란 것은 생김새가 꼭 메신(짚신)앞쪽 모양을 한 큰 바위가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마을 위쪽에 유서 깊은 태암서원과 상덕사가 있고 안마당에는 경은전선생경학문비와 고려국찬성사 문원공 경은 전선생 계자시비가 서 있다.
또 어은등 산에는 담양 전시 입향조이신증숭록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사 행찬신교위부사과 운암전공지묘 내외분과 송와 전공휘자종지묘 내외분의 묘소아 있으며, 그 산 밑에는 첨모재 재실이 있다. 어렁골에 철성이씨 문중 재실인 황산재와 四愚亭등 유서깊은 향토문화 유산이 많이 있는 동네다. 언젠가는 족보 없는 동명을 쓰지 말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박이 지명을 되찾아 써야 할 것이다. ‘상죽마을’모다야 어은골, 돌은촌, 가는골, 서잿골 등이 더욱 친근하고 소박한 마을 이름이 아닐까 한다. 이 동네는 담양 전씨가 먼저 들어왔고 지금은 田씨 17가구, □씨 14가구, 姜씨 3가구, 그 밖에 한 두 집씩으로 모두 38가구가 살고 있다.
태암서원
죽전리 하죽마을
옛날의 전태리, 덕암리의 대밭골이었고 아래뜸이라서 고유지명을 버리고 하죽전으로정하고 그것을 또 줄여서 하죽이란 행정동리명으로 삼은 것이다. 경사재 비문에는 이곳을 의춘현 悳巖面 冠洞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悳자는 德자와 같은 자로 쓰인다. 관동이란 지명도 군내 몇 곳에 있는데 고유지명으로 갓골, 갓실, 갓땀, 갓말 등이 었던 것을 한자 표기를 하면서 대부분 冠洞, 冠谷으로 정했음을 볼 수 있다.
「갓」은 보통 「산」을 뜻하거나 변두리나 바깥쪽에 위치한 곳의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또한 양반의 의관인 갓(머리에 쓰는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른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산세가 양반들의 갓에 해당한다거나 날짐승의 볏이나 길짐승의 뿔을 연상케하는 지형 지혈이라서 그런 지명을 썼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옛 지명 갓솔은 유래도 모르는 채 완전히 잊혀진 지명이 된 셈이다. 다만 상노인분들께서 아랫대밭골, 웃대밭골이란 말로 구분해서 쓰고 있다. 도로촌이라서나 石村, 石隱村이란 지명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유래에 대해서도 막연하다. 다만 동네 앞 논들 가운데 선사유적인 고인돌(支石, 흔히 칠성바구로 부르는 큰 바위 7개를 말함)이 있었다고 하는 바 이 지석과의 연관된 지명인 것 같다.
이 지석은 그 뒤 경지정리와 도로 개설 등 개발이란 미명하에 묻히고 깨져서 없어진 것이라고 한다. 어느 분의 말처럼 큰돌(바구)을 파묻어 숨긴 마을이고 보니 돌은촌이란 말이 새삼 실감난다는 우스갯소리가 그럴싸하다. 어쨌든 이 칠성바구 때문에 유래된 지명일 것이라는 심증이 가지만 확인할 만한 증언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옛시절 마을 앞 논들이 긴 장마 때면 간혹 물에 잠기는 논들이라 돌로써 쌓아 만든 방죽이 있다는 뜻에서 石堰村이란 촌명을 쓰면서 앞 글자는 훈을 따서 돌로 부르고 뒷글자는 언이란 음을 따서 「돌언」이 된 것은 아닐까 싶었고 또 한 가지는 온 동네에 돌담부랑이 잘 쌓여 있어서 石垣이라고 하면서 역시 훈과 음을 섞어서 「돌원」으로 한 것이 아닌지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학실한 연유를 밝히지는 못했다. 특히 동네 뒤로는 옛날부터 대밭이 잘되는 지역이었다고 하며 왕대가 많이 나서 밑둥치를 자르면 자그마한 세숫대야나 물바가지 대용으로 썼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하고 있었고 지금도 대밭이 썩 좋다.
도로촌에는 처음 함안趙시가 터를 잡았고 한참 살았으나 어째서인지 가세가 기울고 자손이 귀하게 되어 모두 다른곳으로 이주했다고 하며 이어서 의령余씨가 들어 왔다고 한다. 동네 앞에는 어룡골들,가는 골들이라고 하며 아래땀에 근년에 지은 경사재가 있고, 바로 뒷산에는 「증자헌대부판중추부사 행군자감판관 담양전공지묘」라는 내외분의 묘역이 있는데 이분은 남행(南行:과거를 거치지 않고 웃대 어른의 덕으로 얻은 벼슬)으로 전자성공인데 학덕이 높았던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옛날 유곡의 판곡 앞에 있었고 유서 깊은 서당 겸 재실이었던 수회재는 당대 학덕 높은 선비로 존경받던 수회재 여진선처사께서 제자를 양성하던 곳인데 400여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퇴락했을 뿐 아니라 수호하기가 어려워서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수회재의 내력을 보면 이종영(진사),이운기(진사), 이동주(진사), 전호우(진사), 문익창(진사)공 등 쟁쟁한 인물들이 여처사 문하에서 수학한분들이라고 한다. 수장회곡(水長廻曲:긴강물이 굽이돌아 흐름)을 생각하게 할 뿐 인걸도 산천도 너무 많이 변했음을 느끼게 된다. 이 마을은 함안조씨가 떠난 후 바로 의령여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도 13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田씨가 10가구, 김씨,강씨,박씨,정씨,하씨 등 여러 성바지가 있지만 겨우 한 두 집씩 뿐이다.
더골
서지골
정동리 산학마을
용덕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고촌인데 보통 우무실(우물실)로 부른다.
옛문헌에는 현의 동쪽 10리 지점에 우물곡부곡(于勿谷部曲)이 있었다는 기록과 강씨와 이씨(광주)가 살고 지금은 부자마을로 물이 逆水하고 마을앞에 汚池가 있고 남쪽에는 漁江院터가 있으며 仁山亭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部曲이란 말은 권문세가에서 사사로이 거느렸던 私兵을 뜻하기도 하지만 신분상 하층에 속했던 기능공 즉 匠人이 모여 사는 곳에 붙였던 이름이라고 한다.(일본의 部落과 같은 것) 그리고 우물곡은 이두 표기의 지명인 것 같고 그 뒤에 와서 石澗洞으로 부른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쓰는 지명은 원래의 우물곡을 우물(샘)로 보고 谷은 洞으로만 고쳐 지은 지명이라고 생각되며 칠년대한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큰새미(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물좋은 동네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네 서쪽에 나질막한 산고개를 무덤티라고 하며 이 고개가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데 하필 무덤이란 말이 쓰인 것이 이상한데 이는 고개넘어 산자락이 옛날 애장(아이무덤)과 외봉(외빈)을 했던 곳이라서 그런 지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사방이 산으로 쌓여 있는 좁은 골안이지만 남쪽이 트여서 너른 들판과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지역이다. 동네에서 동쪽을 좁은 골짝을 각시골로 부르지만 원래 강씨가 터잡아 살았던 곳임을 생각하면 강씨골로 부르다가 씨족간의 갈등과 시기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각씨골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웃뜸을 웃골로 아래쪽 작은 뜸은 아랫골 또는 각시골로 부르고 큰 재실이 있는 곳은 우무골이고 조금 떨어진 새골, 각골, 서재골 등이 있다. 우물골은 옛날 성냥깐(풀무깐 또는 대장깐이라고도 한다)서재골과 강당터는 옛날 재실겸 서당이 있었던 때문에 그런 지명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옛날 역참제도가 있을 때 어강원이라 부르는 국가기관이 있었던 곳이다. 院은 驛과 역사이에 공무로 여행하던 관원을 위해서 숙식을 할 수 있도록 한 여관과 같은 것을 말한다)이 동네에서 뒤쪽 산고개를 넘으면 매새골(한자로는 山鶴)골인데 매새란 말은 뫼(산)와 새(날짐승이거나 사이를 뜻함)로 된 복합어로 보면 그 골짜기에는 산새만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서 뫼새가 매새로 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던 분에 따르면 이 골짝에 오래된 매실나무와 살구나무가 있어서 梅山으로 불렀던 것이 변해져서 매새가 되었다고 한다.
각시골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옛날 아주 인물이 절색인 새각시가 죽었는데 이곳에 그의 묘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각씨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매새동네는 지형지혈로 보아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 동네서 정곡 중교로 통하는 산고개길을 「잔치재」라 부르는데 이는 산길이 너무 멀어서 긴고개란 뜻이고 치는재(고개, 티로 쓰기도 함)란 말이기 때문에 재를 붙이면 겹문자가 되는 셈이다. 아주 긴 산고갯길이란 풀이가 옳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곳은 천석지기 큰부자가 있었는데 □道載공이다. 이분은 고을안에서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으며 천재지변으로 민생이 어려울 때 재물을 헐어 민초들을 구휼했던 일 때문에 몇군제에 선행 송덕비가 서 있기도 하니 재물얻고 인심얻은 부자라 할 것이다. 이 부자집은 원래 각시골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떠나면서 집도 없어졌고 산정(인산정을 말함)도 헐어 버렸으니 큰부자의 자취를 찾기 어렵게 돼 버린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이동네에 들이름으로 웃간돌배기니 아랫간돌배기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말은 조금 너른 들논이나 빹을 부를 때 간돌이나 간드리로 부르며 배기나 박이(배이)는 어떤지역(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장승배기(배이)란 말에서도 볼 수 있는 말이다. 결국 웃논들, 아랫논들이란 말로 보아야 할 토박이 말일 것이다. 그리고 동네 앞쪽 서쪽 산등성이에 널찍하게 조성된 묘역이 있는데 진양강씨 선대묘소가 있다.
매세골 어귀에는 사인창원황기선처 열부유인김해김씨 행적비가 서 있다.
이목리 이목마을
이목리는 덕암저수지를 지나 윗쪽에 자리하고 있다.
옛 행정구역상으로는 田太里, 그 뒤에는 또 德巖面에 속했던 「배목촌」이다.덕암골의 맨안쪽 마을로서 큰산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가례와 유곡땅을 접하고 있다. 상노인들은 「덕암골 배목촌」이란 말을 그냥 쓰고 있다.
「절티재」밑 번덕에 아주 큰 돌배나무가 있었고 그 곳이 원래 마을터였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생 돌배나무(산돌배나무)가 마을의 상징이 되었고 또한 촌명이된 것이다. 배(□)와 木에 村의 합성어인 셈이다. 마을 뒤로 높은 재가 있고 논밭길도 멀었을 뿐 아니라 화적떼가 자주 출몰해 괴롭혀 지금의 마을터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옛마을 자리에는 농막 한채만 있을 뿐이고 초목이 우거져 있다. 고개먼당에 큰길이 있어서 「절티재」인데 그 재를 넘으면 능인상촌(지금의 유곡상촌)에 닿고 아랫등을 넘으면 갑을양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남쪽 「질매재(길마재)」를 넘으면 상용소로 통하고 그아래 「옹구짐이재」를 넘으면 하용소「옹구짐이」「군무덤이」마을이다.
「배목촌」옛 마을터로 가자면 신통한 돌다리가 있는데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배목촌에 살던 어느 노파가 저아래 개울에서 다듬이돌로 쓸만한 큰돌을 이고 올라가는데 난데없이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샛도랑을 건너야 하지만 워낙 물이 세어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생각 끝에 이고 온 그 돌로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크나큰 적선이었으니 사람들은 「할매독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그 돌다리 밑에서 쳐다보면 할머니 머리가 닿았던 부분이 옴방하게 확이 패여 있어 더욱 신기하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돌로 다릿발을 만들었으므로 힘이 얼마나 셌으면 그런 다리를 놓았을까 싶어서 장사항매의 독다리로 알려져 있다.
앞뒷산이 모두 신던산(옛문헌상 德山 또는 神德山)의 줄기이며 남동쪽만 빠끔히 열어 놓았을 뿐 두루 산이 에워싸고 있다. 산골 논이지만 군내서는 가잘 값비싼 땅이라 이목 논 한마지기 팔면 의령 들논 두마지기를 살 정도였다고 한다. 일꾼들을 불러놓고 우리 「진배미(긴배미)」논서마지기를 아침나절에 다갈아 뒤비거나(뒤집다), 두룸(논두렁)다 바르기만 하면 내 사위로 삼겠다는 내기를 걸었던 유명한「진논배기」가 있다.
이목 저쉬 바로 밑에 큰덤과 자연동굴이 있는데 멀찌감치서 돌을 던져 그 둘에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돌이 들어가지 않고 떨어지면 딸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는데 옛날에는 애기밴 임부들이 돌던지는 의식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마을 앞 못이 없을때만해도 80여가구 살았고 덕암골안에서는 제일 부자마을이었다고 하며 인심 후한 곳이었다.
소나무 숲옆이라「송징이들(송정들)」.마을위에 있다고 「웃들」뒷골은「뒷들로」부르며 미질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란다. 신덕산의 修道寺는 신라 문무왕때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기록이 없다. 절뒤에 있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수백명의 불제자와 함께 수도좌선을 했으므로 절이름도 수도사로 명명했다고 전한다. 극락교, 극락전, 칠성각이 있으며 동쪽 산허리에 浮屠 8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찰임이 사실이다. 임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유정(惟政.사명대사)이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 양지뜸과 음지끔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양뜸이 똑같이 22집씩이다.
언젠지는 확실치 않는데 새터에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경주崔시 16집, 충주池씨 7집, 김해金씨 6집, 宋씨 3집외 吳, □, □, 田씨가 각각 한집씩인데 옛날에 비하면 반도 더 줄었다고 한다.
동구밖 길옆에 독립투사 최병규님 추모비와 해주오씨 효자비가 서있다. 회관옆에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옛적에는 당산과 함께 신목으로서 동신제도 올렸는데 요즘와선 그것저것 사라져 버린채 그저 정자나무로 부르고 있을뿐이다.
수도사석탑 및 부도군
- 경남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157
신촌리 성비마을
용덕면 소재지와는 거리가 조금 있고 덕암골 어귀를 조금 지나서 나직한 산고개를 넘어가면 왼편에 위치한 마을이 성비다.
보통은 「소리비」동네로 불러 왔으며 옛시절에는 동네 주위에 배나무 과수원이 많이 있었던 작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배곡재도 옛기록에는 二所峴으로 되어 있으며 쌍봉낙타의 등처럼 아주 가가운 거리인데도 두 개의 고개가 연이어져 있는 희안한 곳이다.
두 곳의 나직한 고갯길이라서 그런 지명을 쓴 것 같은데 「소리비」란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증언이나 자료를 얻울 수 없다. 옛날에는 마을 어귀에(한길옆) 큼직한 장승을 세웠던 장승베이(장승박이)터가 있었다고 하며 골 안 들머리를 윗비석골과 아랫비석골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무슨 비석인지는 모르지만 큰 돌비가 서 있었던 자리라고만 알고 있을 따름이고, 그 비석이 다른 곳으로 이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성생원이 있는 곳을 소리비 아랫마을 또는 바깥성비라 부르고 깊숙한 안동네를 안성비니 소리비 안마을로 부르고 있는데 소리비란 지명의 유래를 밝히고자 많은 사람들을 면담했지만 역시 풀지 못한 채 후일의 과제로 남기게 되었다. 다만 옛시절 물이 들고 가뭄이 이어지게 되면 이 골찌기는 논밭도 적은 동네라 흉년을 타면서 한 쌍의 솔개란 놈이 날아왔지만 한 마리는 곡식 낟알 한두개 주어 먹을 수 있었으나 다른 한 마리는 헛탕을 치고 날아가면서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이 얘기는 무듬이 논밭이 있거나 강변 마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우스갯소리인데 지명 유래로 보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것 같다. 한편 너도밤나무과에 속하는 야생나무로 굴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과 한 종류인 소리나무가 주위산에 많이 있어서 소리나무골짝으로 불렀던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고, 또 콩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나무껍질은 전통 물감으로 쓰이는 나무인데 산자락에 만히 자생하는 솔비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우리나라 지명중 마을 주위에 자생하는 식물 이름을 그대로단 것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가래실(가래나무), 노촌(갈대), 대밭골(대나무) 솔징이(소나무숲),행정(은행나무),등을 예로 들수 있다. 따라서 「솔비」를 쉽고 편하게 부르자니 한 음절 덧붙여 솔비→소르비→소리비가 된 것은 아닐까 한다. 어쨌든 미확인 지명이고 요즘 와서는 부르지 않는 동네 이름이 되었다. 그러면 省飛는 전통 지명인 소리비가 한자 표기를 하면서 유래도 무시한 채 비슷한 소리에 뜻이 나쁘지 않은 것을 취해서 작명한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의미가 있거나 역사성이 있는 지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동네 조금 못미쳐 덤붕이골을 지나 산고개를 넘으면 잿길이 있었고 도 안성비 마을 뒤로는 팔봉재가 있는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아이들의 학교 가는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또 새미골은 산 밑에 샘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고 「얼골」은 음달쪽 골짜기라거 해동을 해도 한참 동안 얼음이 녹지 않은 깊은 골이라고 한다.「장꼬」는 의령 닷새장을 보러 다니는 산고개라서 장고개인데 줄여서 장꼬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런 지명은 아주 흔하다.
마을 뒤로 더 들어가면 빈터이골, 웃밭골 등 유래도 확실하지 않은 지명이 쓰이고 있었다. 저수지 위의 남향받이 산등대에는 세 기의 큰 묘가 줄지어져 모셔져 있다. 맨 위에는 「가선대부행강원감사예조참판 성재옥공지묘」이고 바로 밑에 배정부인순흥안씨이고 배정부인밀양박씨의 묘인데 안씨가 본부인이고 박시가 후취부인이라고 한다.
성재공은 正隱 옥사온공의 작은 아드님으로 자는 象琛 호는 醒齋시고 성삼문, 박팽연공들과 친교가 두터웟으며 홍문관 박사를 지내셨교 강원감사와 예조참판을 지내신 玉潤공이시다. 오랜 동안 관직에 있었지만 청렴 강직한 선비로서 존경을 받았고, 강원감사 시절에는 청덕선정을 베풀어서 관직을 떠난 뒤에 백성들이 세운 청덕선정비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소리개란 놈이 날아오게 되면 배부르게 먹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살기 좋은 마을로 변하였고 아랫동네는 군내서도 규모가 대단한 양계단지라 소득 또한 높은 마을이다.
그리고 안동네도 죽전에서 넘어가는 샛길이 나 있어서 교통도 아주 편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김해 김씨가 먼저 자리 잡았다고 하며 드 뒤로 박씨, 전씨가 들어왔다는데 지금은 김씨가 16가구, 박씨와 전씨가 너댓 집, 강씨,이씨,임씨, 최씨등 여러 성바지가 한 두 집씩으로 모두50여가구가 살고 있다.
신촌리 신촌마을
용덕면 소재지 못미쳐서 덕암골이 있는데 바로 들머리 동네가 신촌이다. 고유지명은 「새말」「새몰」이라 불렀고 한자로는 鳳과 마을(里.村)로 적었던 것인데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정비와 동.리명의 한자화를 강행하면서 쓰기도 쉽잖은데다 뜻도 고상하다보니 의도적으로 改惡한 지명이 됐다. 옛시절에는 동네 옆과 앞쪽에 무성한 솔숯이 장관이었다 한다.
그래서 봉리송파(鳳里松坡:봉황이 깃드는 동네에 소나무 숲언덕)라 하니 얼마나 낭만적이냐 말이다. 긴 숲도 없어졌고 삭막한 환경이고 보니 봉황이 어찌 깃들것인가. 오랜 전통을 가진 동네가 그만 새로 생긴 마을로 변해졌는데 그 사연을 아는이가 있는지 조차 궁금하다. 진양강씨 시조를 모신 봉산사 사우의 이름에서 새(鳳)를 따서 지은 소지명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강씨가 주인인 마을로 알려져 왔다.
부드러운 산줄기가 멀리서 흘러왔는데 이 마을 끝쯤에서 멈춰선 지형이고 집들은 얼추 다 서향으로 앉은 셈이다. 옛시절 큰 서재가 있었다고 「서재골」. 앞산에 있는「매산이굴」「부엉이굴」은 안가태평에 자손들 명길라고 치성을 드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밭들 나들이 고개는 「바태꼬(밭고개)」였고 의령장 보러 넘나들던 잿길은「장고개」라 불렀다.
전설적인 「배곡재」는 인제 큰길 국도가 돼버렸으며 동네앞 논들에 박혀있던 칠성바구(칠성바위)로 부르는 것들은 대개 선사유적인 고인돌로 흔적없이 묻히고 깨져 버렸다. 개발독재시절 문화유적은 무참히 파괴되었고 전통민속등「우리것」마저 마구 없애 버렸으니 지금에사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들을 건너 앞산 고리부분을 「나발바구」(나팔모양의 산줄기라서)도 길 때문에 이리저리 다 뜯겨나가고 작은 섬처럼 남아 있다. 10여년 전만해도 그곳에 몇집 살았다. 옹기장사아 거지등이 살았는데 지금은 집터만 남았고 옆에 「호쟈밀양박공성권행적비」한개가 슬쓸히 서있다.
배곡재 먼당에는 꽃집이며 돌비가 여럿있지만 새망구역에는 「효자김해김공주찬지비」가 서있다. 지금으로부터 1백50여년전만 해도 서재골에는 고반정이란 서재가 있었다고 한다. 상례집요란 책을 남기신 우계 강윤 선생이 지키던 곳이다. 의춘고을의 은덕군자로 불리었던 큰선비였다고 한다.
대를 이으면서 비운 마음에 바른 행실 게다가 충효심이 남달랐던 후손분들이 끊이지 않았다니 자랑할만하다. 유서깊은 고반정, 동네지킴이었던 칠성바구, 인상적인 솔나무숲등 이젠 옛 얘기가 돼 버렸다. 다만 마을 어귀 정자나무 밑 축대에는 「봉리송파」새긴 큰돌이 박혀있어서 옛시절 마을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강씨가 12집, 담양전씨가 여남은집, 김.이.홍.정.남.성씨등은 모두 한 두 집씩이라 이곳 역시 강씨촌인 셈이다. 그리고 동구밖에 절부 유인포산곽씨 행적비가 서 있다.
연리 상연마을
이 마을도 용암골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정곡과 경계를 이루는 삼봉산이 있고 동네 뒤의 골짜기를 뒷골로 부르고 정곡의 오동골로 통하는 잿길이 있는데 역시 뒷골재로 부른다.
제법 큰동네가 상연인데 옛날에는 역시 「못골」「못실」淵洞으로 부르던 지역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댓집이 남아 있는 뜸이 「구무덤이(군무더미)」로 부른다. 큰동네 앞에는 동천숲이라고 부르는 동네숲이 있는데 남동쪽을 가려서 허한지기를 비보하기 위해서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하연동네와 같이 원래는 못골 웃땀이니 못골 아래땀으로 불러왔던 지명을 행정구역의 개혁때 아래땀을 하연으로 웃땀을 상연으로 아주 쉽고 편한 지명을붙인 것이다. 이곳도 상연마을은 무관심하지만 하연쪽에서는 한동안 지명 때문에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일제관리들의 안이한 자세와 관료의식 그리고 행정편의주의의 산물이라할 것이다.
그런데 「구무덤이」란 지명이 재미있다. 발음대로는 구무더미□구무덤이□군무더미로 들리는데 이는 동네 옆 산자락에 그 덤(바위)이 있고 그 덤 밑이 동굴처럼 돼 있는데 이 바위에서 비롯된 지명임이 틀림없었다. 우리지역에서는 구멍을 「구녕」이라거나「구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덤은 큰 바위를 말하거나 물건이 많이 쌓인 큰 덩어리를 뜻하는 말로서 「더미」니 「데미」로 쓰기도 하는데 신선바위를 신선덤으로 큰바위를 큰덤 또는 큰데미로 산더미를 산데미로 말하는 것이다.
결국 구녕(구무)데미(더미)란 말이 복합되어서 구무더미(구무데미)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무더미에 불을 때면 산넘어 이목골에서 연기가 솟아 난다는 우스갯 얘기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바위로 인해서 생겨난 지명임을 알수 있다. 동네앞 골짜기 들머리를 방애골(방아골)로 부르는데 이는 옛날 맨처음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았던 곳이면서 자연샘이 있고 또 돌방아(연자방아)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들이름중 원당들과 작은 당들이 있다. 원당이란 지명은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옛날 역참제도에서 院이 있었던 터 이거나 맨처음 터를 잡았다는 뜻으로 原 도는 本등을 붙이는 예에 따라 보자면 이곳이 원래 주거지였던 것이 아닐까도 싶었지만 그런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태애골 골짝이라 해서 작은 저수지가 있는 골짝기에는 인공으로 조성하기 전에도 자연적으로 생긱 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동네는 맨처음 남평문씨가 터 잡았다고 하며 그 뒤 여러 성바지가 들어와서 한창 많을 때는 50여호 넘게 살았다는데 지금은 담양전씨가 13집이고 강씨, 허씨가 두어 집씩이고 이씨, 임씨, 여씨, 문씨 등은 겨우 한집씩 남아 있어 다해야 25집이다.
연리 하연마을
용덕면의 두골짜기 중 웃골짝인 용암골에 있는 하연마을은 원래「못골」또는 「석수골」로 부르던 곳인데 옛문헌에는 淵洞이니 淵谷으로 적혀있으며 이씨와 전씨(담양)가 살았다고 돼 있다. 지금도 마을 앞에는 「헌못」이라고 부르는 작은 못이 있으며 이 헌못의 물은 우수골안의 바위 틈 사이에서 흘러 나온다해서 石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새못이 생기면서 옛날의 것을 헌못이라 부르게 된 것이며 이 헌못 때문에 아래위의 동네이름도 못아래, 못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 동네에는 옛날 벽진이씨 터엿을 뿐 아니라 이명후공이 천석꾼 큰 부자였고 두루 50리 땅은 모두 자기것이라서 원행이 아니고는 자기땅만 밟고 다녔다고 한다. 담 안에 12채 큰 기와집에 큰 고방이 두 개나 있었으며 소슬 대문에 수십명의 하인을 거느리면서 떵떵 울리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집터만 남았을 뿐 옛시절의 영화는 사람들의 이야기로서만 들을 수 밖에 없이 돼 버렸다. 이 동네에 있는 작은 저수지도 이부자집에서 주선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길가 동네는 큰동네와 새터 그리고 양지땀으로 나누어 지는데 동네 서쪽에 제법 높은산이 있는데 뒨봉(된봉)이라고 하고 그 아래쪽에 와요마을로 통하는「티비재」가 있으며 석수골, 티비골, 신도골 등 재미있는 산골짜기 이름도 있다.
그리고 마을앞 길옆에는 300살쯤 되고 생긴 긴 모양이 아주 묘하게 구부러진 물버들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를 경계로 위쪽을 상연마을 아랫쪽을 하연마을로 갈린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 동네 상여를 넣어두던 샹여집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지고 그 자리에 풀깐(퇴비사)을 지었는데 그런뒤로 이 동네에는 소년상(어린아이가 죽음)이 자주 나고 밤에는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고 불이 자주 났고 또 밤중에 돌멩이가 날아오는 등 요상한 일이 계속 생겼다는 것이다. 어느 날 이동네를 지나던 노승이 저기 풀깐을 없애야 동네가 편할 것이라해서 동네사람들이 의논을 해서 그 풀깐을 없앴더니 동네가 평안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얘기는 더러 듣게 되는데 상여집에서부터 실마리가 된 이 이야기는 금기지역과 또 밤마실 금제하기 위해서 꾸며낸 귀신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헌못 아랫쪽 들은 홈골들로 부르는데 이건 논물을 대기 위해서 나무로 만든 홈이 논배미마다 걸려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홈골안에 벽지이씨 문중 재실 임연재가 있고 옛시절 울리던 부자집은 터만 남았다. 역시 벽진이씨가 9세대, 담양전씨가 4세대, 그리고 김씨, 임씨, 이씨, 양씨, 권씨, 정씨 등은 겨우 한 두 집씩이라 모두 25세대가 남아 있다.
와요리 와요마을
용덕면 소재지는 용암골 들머리 雲谷이기 때문에 덕암골 와요마을로 가자면 읍내쪽으로 되돌아 나와서는 십리도 더된다는 깊은 골로 들어가야 한다.
옛날에는 행정구역상 용암.덕암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가 1913년 일제강점기에 두 면이 통폐합되어서 「용덕」으로 바뀐 것이다. 덕암골 중간 못미친 지점에서 남행으로 앉은 와요마을이 있는데 동네옆에 희귀한 팽나무와 느티나무, 큰 소나무가 어우러진 긴 숲이 돋보인다.
연세 높은 어른들은 「왜우」「왜요」로 부르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을 종합해 본건대 원래의 소지명은 「와요골」즉 여러개의 기와 굽는 굴이 있었던 곳이라 추정된다. 아부(瓦釜)를 「왜부」로, 와요(瓦窯)를 「왜요」로 발음하는 예가 허다할 뿐 아니라 마을 주위 산자락이나 밭언덕에 기왓굴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매미골」동쪽 산밭을 일굴 때 기와조각이며 굴의 벽으로 보이는 흙담이 보였다는 것이며 또 옛날 부싯돌을 캐냈던 「뒷등먼당」옆 산골짜기를 「가무골」, 어떤이는 「 가모골」이라 발음하는 걸보면 그곳이 「가마골」의 변음이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지명에 대한 유래로 다른 견해도 있다. 이 동네 뒤쪽 산세가 큰 소가 드러누워서 송아지에게 젖을 빨리고 있는 와우지혈이라 본디 「와우」였던 것이 「와요」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두가지 가설을 놓고 생각해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가 훨씬 설득력이 더함을 느끼게 된다. 이 골안의 토질이나 입지적 조건으로 보아 오지그릇이나 기와를 굽는 와부가 여러군데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행정구역의 일제정비를 하면서 쓰기 어렵고 민족정서와 관련된 글자는 모두 쉬운 글자로 바꾼 예가 허다한 것이다. 이 마을이름도 「가마요(窯)」가 스기도 어려울뿐더러 사용빈도가 적으니 엉뚱한 「구할요(要)」를 붙였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기왓굴도 찾아 볼 수 없거니와 지명의 유래를 아는이도 다 떠나버린 터라서 향토사의 정리 또한 난감한 상태다.
이 동네도 재미있는 땅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맨 밑 골짜기라고 「메미골」과 「메미골재」, 동네 뒷산이라서 「뒷등먼당」이며 그옆 산골어귀에서는 불이 잘나는 부싯돌이 묻혀 있어 그 돌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쓰는 라이터의 할아비격인 부싯돌을 못만져본 사람이 더 많으리라. 또 마을뒤의 산자락 밭이라 「바두(밭우.밭위)」또는 「밭웃갓」즉 밭위의 산이란 뜻이다. 「도갈골짝」「도갈들」「도갈껄」은 옛 술도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골이름.들이름까지 「도가→도갈」이 된 것이다. 「찬물새미」는 7년 대한 가뭄에도 맑고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들샘이었는데 한여름이면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었다고 한다. 마을앞의 큰들이며 앞들, 낮은 지대에 들어앉았다고 「굼들」,숲아래쪽의 논밭은 「숲밑들」, 큰바위가 서있는데 釘같이 생겼으니 「정바구들」이라 부른다. 앞선 너머가 가례 괴나리가 되는데 산고개 이름이 「생이고개」다. 옛날 이 동네에서 초상이 나면 대부분 이고개 부근 산에서 묘를 썼던 탓에 상여가 자주 오르는 탓에 상여고개라 그런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골마을에 들어와서 살사람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덕암골하면 골안으로 갈수록 논밭값이 비싸서 골논 한마지기 팔면 강변 들논 두마지기를 사고도 남았다는 얘기도 있으니 사람 살기 좋았던 곳이었구나 싶다.
또다른 이야기는 이마을 주위 일대는 모두 밭이었고 논이 귀했던 곳이라서 참새 두 마리가 이 동네에 왔는데 한 마리는 곡식 낟알 몇 개를 먹었지만 한 마리는 허탕치고 울면서 날아 갔다는 재미있는 속언이 전해오는 곳이다. 척박한 땅에 농사가 잘 안되던 지역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인것도 같다.
어쨌든 이 마을을 둘러보면서 瓦匠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설화나 민요를 얻으려 애썻지만 허사였다. 가장 먼저 들어왔다는 김해허씨가 지금도 28집으로 대성이고 주인인셈이다. 신덕산의 큰줄기 자락에 형성된 동네라 허씨재실도 新德齋다.
鄭씨 6집, 田씨 3집에 이,차,황, 구,양시도 한두집씩 남아 있다. 마을건너 안산먼당에 장군메(장군묘)라는 큰 고분이 있고 20여년전 우연히 토기류 몇점이 발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확인해보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사 대동이었제. 인자 늙은 무지렁이만 처져 있는기라. 이래가지고 농토가 우찌 될긴지 농촌은 다 망하는기라.」촌로의 한숨석인 독백, 오늘의 농촌모습 그대로다.
와요리 미곡마을
용덕면 소재지 못미쳐 서북쪽 큰 골짜기가 덕암골이며 한참 들어가면 왼편에 위칳 있다. 법정동리상 와요리에 속하는 「미곡」동리명대로 특히 아름답게 돋보이는 환경은 아니지만 지형지혈과 함께 순후한 인심 때문에 이런 지명이 붙여졌다고 보인다.
일설에는 골안쪽 사람들이 아랬마을이란 뜻에서 쉬운말로「밑동네」「밑마실」이라고 부르던 말이 바침소리(ㅌ)가 탈락되면서 「미마실」→「미땀」→「미실」이 됐고 한자로 쓰면서 소리는 같으면서 뜻이 좋은 「美谷」이 되었을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땅이름의 변천과정에서 한자어와 순우리말 중 어느것이 먼저냐는 시비가 있는데 딱 끊어 단정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 관한 옛기록에는 「꼬리」의 한자어인 「尾」로 적혀 있다. 그 연유를 살폈더니 이 동네 뒤로 길게 뻗은 사줄기가 큰 호랑이가 서쪽을 향해 누워 있는 지혈이며 마을자리는 꼬리 부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호랭이의 꼬랭이」(虎尾谷) 듬인데 그냥 「꼬랭이실」즉「미실」「尾谷」하는게 좋다해서 그렇게 써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자대로 풀어보면 「꺼리미」자와 「아름다울미」자는 훈음이 같은 것이니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美」자를 취해서 동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뜯어 고친 지명이 허다한데 이 마을의 이름은 그 유래를 살리면서 창 좋고 뜻 좋은 지명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억센 신덕산의 지맥이 동네를 에워사고 있는데 벌렁 누워 있는 호랑이라니 재미있는 지형이다.
마을 안골이 「범당골」이고 산고개를 넘으면 가례「괴나리」로 통한다. 높은 산곡대기를 「도둑골먼데이」즉 화적떼가 살았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오리골」넘어 「산성골」이 있고 산위에는 성채의 흔적이 있어서 임란때 의병이 썼던 산성이 아닌지 재확인해야할 곳이다. 음달쪽은 「째진골」이라고 하는데 골짜기의 생김새가 꼭 여자의 음부모양이라며 그 주위에 묘를 쓰면 살림은 늘어도 자손이 귀하게 돤다는 속신이 있다. 또 그 옆쪽으로 산길이 있는데 옛날 삼대독자가 죽어서 길섶에 애장을 했던바 그원혼 때문에 혼인길은 물론 악귀가 따라 붙는다는 속신 때문에 사람들이 지나 다니길 꺼리는 곳이었다 한다. 그런일을 처방하고자 쌀 한 움큼을 조선종이에 싸서 실로 묶고는 그 애장(돌무덤)에 던지고 지나가는 풍습이 생겼다니 원혼을 달래면서 축귀태안을 기구하는 선인들의 민속신앙이라 할 것이다.
서너개의 산이 포개졌다 해서「업은골」「업은산」이 있고 동구밖 정자나무는 당산을 모신 곳이라 혼사행차는 멀리 둘러다녀야 했던 신성금기의 지역이었다고 한다. 뒷산을 넘어「자래등」에는 도굴Rs이 파헤친 곳이 여려군데라는 바 미확인이지만 고분지대라 추저된다. 또 「범당골」들머리에 심장군묘라고도 하고 동래부사를 지낸 심씨의 묘라고 하는 큰묘가 있다는데 확실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술도가가 있었던 곳이라고 「도가껄」에 들이름도「도갈들」이란다. 「굴새미」라는 자연샘이 있는데 아무리 큰비가 와도 물이 뒤집히지 않고 사철 맑은 물이 솟았지만 농경지정리때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새끼손가락 모양으로 좁고 긴 논도가리라서 「앵기배기」인데 보기보다는 더커서 서마지기가 넘는단다. 심부자 또는 심장군묘는 호랑이 앞발에 해당되는 억센 지혈이라 자손이 직접 벌초나 성묘를 하면 큰 탈이 생겨서 타성 사람이 돌보며 저 아래 밭언덕에서 망배를 한다니 정말 그대론지 궁금하기만 하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에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남양홍공지묘(홍익재)와 정부인 밀양박씨」의 큰묘가 있다.
마을안에 남양홍씨 문중의 「美陽齋」, 전주이씨의「奉先齋」가 있다. 남양홍씨가 먼저 입촌했다고 하며 지금도 8집이 남아 있다. 金海金, 진양 河, 김해 허시가 두집씩 그리고 潭陽田, 경주최, 초계 鄭, 성산 □, 해주 吳, 청송 □시등이 겨우 한집씩이라 열성받이지만 다해야 28세대다. 골안쪽 다락논이야 벌써 풀밭이 됐고 농사짓고 살 수 없는 세태를 맞아서 노년층의 주름살은 더 깊어진 것 같아 보였다.
운곡리 어화마을
용덕면 소재지가 운곡리이며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뜸이 어화마을 또는 「원껄」이라고 부른다. 옛문헌에는 파산이씨가 사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용암리에 속했던 지역으로 돼 있다.
다만 지명 유래에서 흔히 볼수 있는 雲谷은 구름골짜기란 의미가 아니고 한쪽 구석으로 치우치다거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 앉은 지대를 「굼티기」니 「굼턱」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옛날 굼말, 굼실로 불러온 곳인데 한자표기때 쉬운대로 굼을 구름(雲)으로 쓴 것이니 이같은 예가 더러 있다.
칠곡의 굼실이 운곡, 가례의 굴바구(굴바위)를 구름바위로 보고 운암으로 정한 것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옛시절에는 큰동네가 아니었다고 하며 지금은 한길 부근이 어화리에 속했던 탓에 어화주막걸이 었고 조금위가 원껄 또는 원앞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꽃집과 창고 있는 그 뜸으로 박계원(朴溪院,朴桂院)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당시 院이란 驛站제도가 있을 때 역과 역의 사이에 둔 국영기관으로 공무로 지방을 여행하는관리들이 숙식을 할 수 있고 말(역마)을 얻어 탈수 있는 여관과 비슷한 곳이었다. 각 원에는 院主를 두었는데 대개 가까이 있는 절의 스님을 원주로 삼은 예가 많았다고 하며 이 원주란 말을 원님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고을의 원님(현감이나 군수)과는 엄격히 구별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마을이 원터이기 때문에 원껄(거리란 말을 꺼리→껄로 씀, 장터거리를 장터껄, 주막거리를 주말껄로 많이 부름)원앞껄이란 지명이 쓰인 것이다. 또 새터는 지금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부근을 말하고 그 위가 웃땀이고 길 건너가 건네땀이라 부른다. 결국 주막껄, 원껄, 건네땀, 새터, 웃담등 5개의 뜸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서남쪽에 팔봉산이 있고 옛날에는 소리비 동네로 넘어가던팔빙이재가 있었고 작은 못이 있는 산골짜기인데 또 옹달샘이 있어서 꼭 음부와 같아서 보지골이었는데 좀 상스럽다해서 보작골(보자골)로 고쳐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를 벗어나오면 산자락에 윤시재실이 있는데 이곳을 덤붕이골 또는 덤붕이 모팅이라고 부른다. 덤붕은 들논가운데 있는 웅덩이를 말하는 바 옛날 길옆에 큰 물웅덩이가 되었다고 하고 어떤이는 뜸부이(새)가 많이 살았던 골짜기라서 그런 지명을 썼다는 얘기도 있다.
들이름도 원앞들과 세마들(새마들)이 있는데 새마들은 새동네 옆이라 자연스레 그런 지명이 쓰인 것이다. 원껄에는 영조때 합천에서 정희량이 역난을 일으켰는데 무예가 뛰어난 이영무(자는 국보, 호는 농아당공이 관군과 함께 토벌장을 참가하여 역난을 진압한 공로가 인정되어 가선동중추에 오르고 또 사후에 자헌대부공조판서에 추증된 분인데 이곳에 그의 사적과 함께 신도비가 서 있다.
효부유인경주최씨 효열비가 있는데 남편이 이상팔공으로서 이 최씨부인은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병으로 누웠다. 겨우 18세인데 병중의 남편을 지극히 보살폈고 나중에는 자기 볼기살을 떼어 약으로 드리고 날마다 치성을 드렸으나 만사 휴의였고 남편따라 죽을려고도 했으나 시부모를 봉양해야 했다. 조카를 양자로 맞아 훌륭히 키우고 가문을 이었으니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손자가 서둘러 향내 어른들과 의논해 조모님의 효열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곳 나직한 산76번지의 산자락과 골짜기 일대가 보통 개장골이니 개장터로 부르고 있는 곳인데 가야후기의 횡혈식고분군이 많이 분포돼 있다. 1996년 일부를 긴급발굴을 했는데 특히 주목할점은 석실의 벽면에 반타원형의 동장(胴長)구조로 축조된 것고 상단부의 종방향의 돌출된 선반모양의 구조물 때문에 한일양국 고고핵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4기만 발굴한채 30여기의 고총고분은 발굴하지 못하고 있으며 발굴된 고분에서는 대부장경호, 고배, 수평구연호 등의 토기류와 관정, 철검, 대도, 철촉, 철부, 도자 등의 철기류 그리고 금동제 세환이식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으나 앞으로 이 일대의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동네 밑 덤붕이 길가에는 열녀유인 전의 이씨기행비가 서있다. 16세때 결혼한 부인은 남편이 중병에 걸려 보살폈으나 죽고 말았는데 삼우제를 지낸 뒤 남편을 따라 자진했다는 것이다. 19살의 꽃다운 나이라 향내 유림들이 의논해 수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덤붕이골안 동남향으로 내려온 산줄기 중턱에는 통훈대부중추원의관 광주이공지묘가 있는데 옛시절 큰부자로 알려졌던 우무실 이부자(이도재공)의 선대인 죽포 이용화공이 내외분의 묘로 썩좋은 자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십여년전 석등.문인석,석양등 잘 갖추어진 석물을 도굴꾼에 의해서 도난을 당하기도 했으나 후손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되찾아 세웠다고 한다. 이 번에는 고분발굴작업을 한 조금위쪽 산위에는 벽진이씨문중의 선대묘역인데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이희보공, 훈련첨정 어화당 이백공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제단비가 서 있다.
이 동네에는 파산이시가 먼저 들어오고 이어서 합천이씨가 들어 왔다고 하며 지금은 함안이씨 20세대, 담양전씨 15세대, 진양강씨 12세대, 김해김씨와 경주최씨, 밀양박씨가 대여섯집씩이고 다른 성바지도 한두집씩 모두 90여가구로 큰 동네에 속한다.
용소리 상용마을
행정구역으로는 용소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용소리는 상룡과 하룡으로 나누어지는데 상룡소, 하룡소란 동명을 줄여서 부르는 것이다. 소재지에서 십리가 넘는데 예로부터 십리골짝이라 한다. 유곡면 구오목으로 통하는 오목재 바로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동남쪽으로 솔직한 골이 열렸을 뿐 두루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피난처로 보고 자리잡았다는 얘기가 맞는 것 같다.
용소란 지명은 □湫와 같은 뜻으로 여러 곳에서 쓰이는 지명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널찍한 바위 동굴이 있고 열길쯤 되는 절벽에 폭포가 있으며 그 물이 떨어지는 아래쪽에 제법 깊은 웅덩이가 패어 있어 물이 고여 있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날쌘 용마가 승천을 하다가 산먼당 큰 바위에 들어받혀서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때 말 엉덩이가 닿은 곳이 움푹 들어가 웅덩이가 되면서 물이 고이게 되었다해서 그 웅덩이를 용로(용쏘로 발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그주위에는 말머리가 박힌 것 같이 보이는 자리와 발굽처럼 보이는 자국이 여러개 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말탄 장수가 전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산수경관이 빼어난 곳이라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장수가 탄 말은 비호같이 날쌔어 용마라 불렀는데 망아지 한 마리가 딸려 있었다. 며칠 뒤 떠나면서 이 골짝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치면서 하늘로 솟구치는데 아뿔사 자고 있던 망아지란 놈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망아지를 부르면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용마의 뒷발이 바위에 부딪혀 부러지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떨어질 때 말 엉덩이를 박은 곳이 움푹 패이고 물이 깊게 고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용소는 용마와 관련되는 전설임을 알 수 있고 용마바위니 용암이니 하는 지명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폭포 옆에 장수가 기거했던 작은 동굴은 「각시방」인데 여름철 소나기를 피하기 알맞은 곳이다.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산중턱 계곡인데다 길이 험하고 가파르니 쉽게 가 볼 수가 없지만 올라가 보면 감탄할 정도의 선경이다.
이 「용소」때문에 마을 이름도 그대로인데 위뜸을 웃용소, 아래뜸을 아랫용소라 부르게 된 것이다. 「상룡소」는 십리골짝 맨안마을인데 「안땀」이 오래된 마을이고 좀 바깥쪽의 뜸을 「내답」「내답땀」이라 부르는데 작은 집을 제금 내면서 터 잡은 곳이라고 한다. 큰집이던 「안땀」은 오히려 작아지고 새동네인 「내답」은 점점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 뜸 모두 초계정씨만 살고 타성은 한집도 없어서 용암골 정촌이라 부르고 있다.
옛날에는 매봉산 산자락이 집터로 「다문실(다문곡)」이라고 부르는데 玉씨 몇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언덕밭이 돼 있다. 마을 밖 저만치 덜렁 얹힌 하늘받이 논도가리가 있는데 두마지기가 「엉기배미」라 한다.
동네 앞 뒤 논밭이 모두 정씨들 것인데 이 논은 유일하게 □씨 소유라 임가논이란 뜻으로 임가(임개)논배미로 부르는 것이다.
「임개배미」가 발음하기 쉽도록 「잉기배미」로 변음된 것이다. 유곡과 접경인 매봉산 중허리에 산간 임도를 내서 이목, 구오목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어서 교통은 많이 편리해졌다. 「안뜸」뒤에 깊고 구불텅한 골이라서 「구부당골」, 마을 간이상수도 수원이「찬새미골」인데 예부터 이름난 자연 약수터다. 삼동에도 얼지않고 김이 무럭무럭 나며 오뉴월이면 얼음물이랄 정도로 차갑고 맑은 물이 솟아 난다고 한다.
오목재 먼당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까마구 밥준다」면서 돌을 던져 탑을 모으던 조산껄이 있었는데 앞골을 오송골이라 부르는데 옛적에 엄청 큰 소나무 다섯그루가 있었다고 하며 서쪽으로 「부무골」은 옛날 불매깐(대장간)이 있던 곳으로 농기구나 시우쇠를 다루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맨 먼저 의춘玉씨와 潭陽田시가 터를 잡았지만 어째선지 재앙이 끊이지 않아서 떠나버리고 초계정씨가 들어와서는 손이 늘고 家聲도 높아지면서 타성 없는 정촌이 된 것이다.「안땀」8집, 「내답」13집인데 눌러사는 사람보다 떠난 사람이 더 많은 산촌이다.
용소리 하용마을
용덕면 용소리에 포함되는 마을에 상룡과 하용 마을이 있다. 용암골 깊숙한 곳으로 □馬昇天의 전설과 함께 계곡의 폭포가 아주 좋은 곳인데 이 용소를 기준으로 윗마을이 상룡소이고 아랫동네가 하룡소다 언제부턴가 행정기관에서 앞 뒤 생각없이 잘못 써서 하용소가 된 것이며 편하게 줄여서 상용, 하용 마을이 된 것임.
큰 못이 있고 제법 큰 동네가 본동인데 옛날엔 「용가못골」로 불렀다. 그리고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범당골」「군무덤이」「옹구지미」등 작은 뜸이 셋이 있다. 숲이 우거졋던 옛날 범이 자주 출몰하던 골이라서 「범대이골」이라는데 우리 지방 토박이 말에 「다닌다」를「대인다」라고 하니 결국 「범이 다니는 골」이란 말이 변음되었다는 얘기와 법당이 있었던 곳이라 「법당골」이 와음으로 「범당」이 되었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확인 할 수 없었다.
지금 팔계정씨 두 집이 살고 있다. 조금 밑에 「옹구지미」미을은 9가구가 사는 뜸인데 「옹구점(옹기점)」이 있었던 마을이라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마을의 서쪽으로 긴 골짜기가 「옹구지미골」이며 산고개 너머가 이목마을로 재이름도「옹구지미재」라 부른다. 그 재밑 산자락에 옹기조각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 걸로 보아서 이 지점에서 옹구굴(옹기굴)이 있었다고 보여지니 지금 마을쯤에 옹기를 모아 놓고 팔기도 했으리란 추단이 가능하다.
또다른 전언에 따르면 재너머에서 만든 옹기를 장사둘이 짊어지고 이 지점에 와서 쉬게 되는데 옹기짐지게를 받치고 돌아만 서면 까닭없이 지게가 넘어지면서 옹기가 박살이 나는 이상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한두번도 아니고 보니 이뜸 근방은 옹기조각이 가득한 곳이 돼 옹기짐과는 상극관계의 지혈이라서 그런 소지명이 붙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옹기장사가 자주 드나들건 곳임은 틀림없다 할 것이다.
마을 이름치고는 퍽 인상적이고 토속적이라 할 것이다. 「군무더미」는 이곳 분들은 「구무데미」로 발음하는데 샛도랑 건너 산자락에 큰 무덤이 있고 밑쪽에 제법 깊숙한 자연동굴이 있다. 이 바위 때문에 「굴이 있는 바위」란 뜻으로 뜸이름이「구무더미」가 된 것이니 이 또한 재미있는 지명이다.
현재 4가구만 남아 있으며 맞은편 「음지땀」은 오래전에 없어 졌다고 한다. 본동 마을 앞에는 5백년이 넘었다는 느티고목이 있는데 겨울철만 빼고는 동네사랑인 셈이다. 또 이 동네가 까마귀가 나르는 형국이라 동구밖에 큰 나무가 있어야 좋다는 옛어른의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옹구지미」앞 길가에 「효부 밀성박씨 행적비」와「효자 벽진이씨양세효행비」가 서있고 또 그 옆에 「절충장군동석공유허비」가 서 있다.
나락 석섬을 널어도 된다해서 「석섬바구」라는데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편편한 바위가 있다. 어르신들 얘기에 따르면 마을앞 정자나무 밑에서 건너 산자락에 높다랗게 선 바위를 향해서 활을 쏘면서 풀짐 내기를 하기도 했다는데 그 바위는 저수지를 막으면서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골마을에 먼저 들어오기는 벽진이씨였고 그 다음이 김해김, 나주임씨였다고 한다.
지금은 임씨가 11집, 김씨 9집, 벽리가 3집이고 田, 鄭, 金시가 한 두 집씩으로 다 보태야 27집에 1백 20여명이 살고 있으미 이곳 역시 반도 덜되게 남은 셈이라 한다. 담배, 고추를 많이 했던 하룡소 마을. 허리굽고 속이 다 썩은 둥구나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배 부르고 등 따시고 정이 넘치던 농촌의 정경은 아득한 옛날 얘기일 뿐 메말라지고 썰렁해진 분위기는 매일반이었다.
소상리 부남마을
이 마을도 역시 옛시절 漁火里에 속했던 마을이고 고유지명은 「소시랑골」이었다. 이 마을은 뒷산의 잿길인 농실재(논실재)에서 내려다 보면 마을의 지형이 소시상(거름(두엄)같은 것을 찍어서 옮기는 연장, 세발이나 네발이 달린 것인데 쇠스랑이 표준말이다) 모양의 지형이 라는 것이다. 나직한 산줄기가 서쪽편을 가리고 동남쪽이 확트인 들녘을 끼고 있다. 그런대 원래 소상리가 법정동리명이고 행정동리 명으로 두마을로 나뉘어 묵은터인 소시랑골은 舊沼湘으로 하고 아랫동네를 新沼湘으로 정한 것이다. 그것도 귀찮다고 한자씩을 줄여 신소,구소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부남동네에 불이 나고 왜목동네서 외고(외쳐대고) 소시랑골에서는(소시랑으로) 찍어 낸다는 것이다.
동네 들머리에는 아직도 물이 고여있는 자그마한 늪이 있는데 「늘새미」라고 부른다. 옛시절 논열마지기 크기의 이 늪의 물이 음료수겸 생활용수였다고 하는 걸 보면 늪새미란 말이 늘새미로 변음된 말인성 싶다.
그리고 물이 들때는 바로 이 늪가지 거룻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니 역시 이곳도 무듬이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네앞에 남강물이 내려다 보이고 샛강이 있어서 「용개」로 부른다고 한다. 어릴적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샛강에는 큰 이무기가 살고 있고 그 놈이 나중에 용이되어 승천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니 용이 살고 있는 물(개는 浦,池의 듯임)이란 뜻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부남동네로 넘어가는 나직한 산고개는 부남재, 부남고개라고 부르고 동네 동남쪽의 골짜기를 손목골이라고 하는데 이는 솔직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고 팔목이나 손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
소시랑골의 섭동(협동)으로 고개너머에 扶南이란 마을이 있는데 열댓집이 살고 있다. 이 지명은 중국 육조시대의 국명에 부남이란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유지명에는 부기 드문 말이다. 본동인 소시랑골에서는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 형성연대도 오래되지 않았다. 마을뒤(동쪽)가 막히고 두루 들판이 질펀하다. 이곳도 옛날 漁火에 속했던 지역인데 고지도나 고문헌에는 아예 소개되지 않는 지역이다.
구소와 부남마을에는 진양강씨가 27집으로 대성이며 김해김씨 13집, 진양하씨, 나주임씨가 서너집이고 전씨,박씨,홍씨,서씨가 한 두 집씩 모두 41세대가 살고 있다. 물이 자주 들고 동네앞까지 배가 들어왔다는 등 얘기는 아득한 옛이야기고 요즘 와서는 비옥한 들판에 경제성이 있는 특용작물과 채소류가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변해졌다.
소상리 신소마을
용덕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소상리에는 신소, 구소의 두 행정리가 있고 돈대산으로 부르는 자연마을이 있다. 옛날 기록에는 어화리(漁火里: 지금의 면단위 행정구역임) 옥야동에 속했던 곳이다. 보통 부르기로는 어화의 외에목(외목)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소상리에 오래된 마을을 구소상으로 하고 새로 생긴 동네는 신소상으로 정했던 것이다. 어느 지역에서나 흔하게 쓰이는 新舊 內外 등을 쓴것이라니 좋게 볼일은 아니라 할 것이다.
옥야란 말은 땅심좋고 기름진 들이라는 뜻인데 이 지역은 강변마을이라 비옥한 농토임이 사실이니 자연환경을 살펴서 지은 소지명이라 할 것이다. 소상이란 말은 원래 沼(늪소)나 邵(땅이름소)에서 비롯된 것 같고 湘은 중국지명의 湘江에서 차용했거나 저만치 강물이 흐르고 있고 물이 잘 드는 곳이라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에목(외목)이란 토박이 지명은 옛시절 물이 드는 저지대였으니 집앞까지 물이 드는 곳일뿐 아니라 사방의 길이 막혀서 바깥나들이를 하려면 산고개를 넘는 길밖에 없었으므로 외길목, 외몫이란 말에서 비롯된 지명인성 싶다. 이와같은 지명은 우리군내에서 두어곳 더 있는데 발음상으로는 「웨에목」이다. 그리고 沼湘이란 지명은 직역을 하자면 강물을 불러 들인다는 뜻인지라 물이 질펀한 곳 그야말로 메기 침만 흘려도 물이 드는 무듬이땅(저습지)이라서 그랬는가 싶다.
동네 뒤쪽으로 등넘이라 부르는 산줄기가 부드럽게 둘러싸고 있으며 동네 들머리에 큰 붕어가 강쪽으로 힘차게 헤엄쳐 가고 있는 붕어설(붕어혈) 산줄기가 있다. 그 산의 높은 곳이 붕어의 배구녕(배구멍)에 해당되는 대명당자리라고 한다. 이 자리에는 비석이나 석물을 세우면 붕어가 혜엄을 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흉지가 되기 때문에 석물없이 묘만 모셔져 있다.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이조참의(□曹參議)광릉재광주이공(廣陵齋廣州□公)기조지묘(基祚之墓)배숙부인함안조씨의 묘소다.
지금은 이쪽저쪽으로 길도 잘나 있고 큰물도 들지 않는 들녘이라 소득 수준도 대단히 높은 넉넉한 마을이다. 처음 김해김씨가 먼저 터잡았다고 하며 지금도 김씨가 19세대로 대성이고 진양하씨가 13집, 박씨, 최시 강씨가 서너집씩이며 전씨, 정씨, 임씨가 한 두 집씩인데 모두 56세대가 살고 있다. 동네에는 진양하씨문중재실인 景德齋가 있다. 그리고 이 동리의 협동인 돈대산은 10가구가 사는 작은 뜸이다.
옛문헌에는 돈대산(墩臺山, 遯垈山)과 돈대진(遯垈津)으로 나와 있다. 전자는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집터란 뜻이 되며 후자는 평지보다 좀 높직하게된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산을 붙인 것을 들가운데 솟아있는 땅이라 그랬을 것인데 津은 배를 대는 곳 즉 나루터나 뱃나루를 말하는 것이니 다같이 지형지세와는 썩 어울리는 지명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어느 세월인가 豚臺로 변해 버린 것이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시절 쓰기도 수월하고 전통지명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음만 같은 쉬운 글자를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넓은 들가운데 솟아난 듯이 오똑하게 앉아있는 산이다. 그런데 현재 지명도 유래가 없지는 않다. 이 산의 모양이 꼭 돼지모양이고 사월정있는 남쪽이 대가리고 샘이 있는 곳이 돼지 꼬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불리 먹은 돼지가 팔자좋게 누워있는 형국이라서 드문 명지라는 것이다. 강나루를 건너면 법수면 황사리로 옛날에는 강건너 함안사람이 건너와서 논밭을 많이 부쳤다는 것이다. 그러자니 돈대나루는 함안배가 대부분이었고 의령사람들은 그저 낚시배나 놀이배를 띄우는 정도였다고 한다.
강언덕에 대나무숲이 무성하고 주위 경관이 썩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임란중 삭령(경기도 연천) 싸움에서 큰공을 세우고 가노(家奴)인 劍山과 함께 순절하신 충열공 강수남 장군을 모신 沙月亭과 忠□祠가 있으며 증이조판서시충열공 사월정강선생신도비가 높다랗게 서 있다. 이 마을을 둘러보면서 느낀 바는 어지러운 염양속세를 등지고 편안히 숨어 지내는 둔일처로서 썩 좋을 뿐 아니라 논밭갈아 곡식을 가꾸로 강심에 낚시 드리우고 세월을 낚으면서 閒日月하는 어느 은둔처사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다. 비옥한 들판에 과수밭도 있는 돈대산은 작은 동네지만 풍요로와 보였다.
진양하씨 재실과 밀양손씨 재실이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진양하씨 재실
- 경남 의령군 용덕면 용덕1길 129
밀양손씨재실
- 경남 의령군 용덕면 용덕1길 134-1
교암리 교암마을
용덕면 소재지(운곡)에서는 오리길이 넘는데 동남쪽 큰 들판을 기고 있는 낮은 지대다. 어른들 얘기로는 옛시절 동네 어귀에는 근 100자 길이의 물길 때문에 독다리(돌다리,징검다리)가 놓여 있었고, 이 독다리는 외부 지역 나들이를 위한 요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다릿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산골짜기 작은 도랑에 놓았던 큰 돌덩이 몇 개나, 멱서리나 짚섬 같은 것에 돌자갈을 넣어서 놓은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 장골 대여섯 명이 목도를 해서 운반할 정도로 큰 바위돌을 드문드문 놓고 그 위에 디딤돌(사람이 딛고 다니기 편하게 평평한 돌을 연결시키는 것)을 연결했다고 하며 큰 물이 들어 독다리가 내려 앉거나 떠내려가면 온동네 사람들이 부역을 하면서 다리를 보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터가 무듬이 또는 무뎀이(물이드는 낮은 지대 즉 저습 지대를 무듬이 또는 무데미라 하는데 물의 받침 소리가 탈락되고 듬이(데미)는 드는 곳이란 뜻의 토박이 말이다) 지대라서 이 마을 주위에는 작고 큰 독다리가 많았다고 한다. 다릿골을 한자로 고치면서 다리 橋에 바위 岩자로 했으미 이 동네는 전통지명을 살린 경우라고 할 것이다.
교암에는 배곡재 밑의 배곡,웃다리골,아랫다리골, 그리고 새터등 네 뜸으로 이루어져 있고 앞뒤로 나직한 산줄기가 흘러 내려 와서 배산임수에 광활한 들판으로 퍽 살기 좋은 마을 환경이지만 요즘 와서는 여름 우수기면 침수 걱정을 해야 하는 저습지다. 상교암 뒷산 골짜기를 장자꿈이라 하는데 옛날 큰 부자가 살았던 터라고 하며 지금도 대밭이 조금 남아 있다. 도 서재고개는 옛날 서당을 열어서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전 서원 겸 재실이 있던 곳이다. 산고개 이름이 산고개 이름이 되었고「용해」또는 「용개」라고 말하는 도랑은 정암강으로 흐르는 깊은 도랑물인데 용이 살았다거나 이시미(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용포 또는 용천이란 말이 변음되어 스이는 지명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새터는 큰동에에서 제금(따로 살림을 차려서 분가해 나간다는 뜻) 나간 사람들이 새 집터를 장만했기 때문에 새땀이니 새터란 지명을 쓰고 있는데 이와 같은 예는 흔하다.
도랑둑도 없고 강가 제방도 없던 시절에는 배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메기가 침만 흘려도 앞마당까지 물이 들었다는 곳이라 한다. 웃다리골에 있는 박씨문중재실 반곡재와 박지항공의 서식처였던 송월달, 담양전씨 문중의 경사재가 있다. 그로 재밑 마을안에 김해김씨 문중의 영모재가 있다.
배곡재먼당에는 전절부증숙부인청송심씨지려란 꽃집이 있다. 전복룡공의 부인으로 임란 때 왜구들에게 붙들려 겁탈을 당할 위급한 순간에 은장도로 자기 팔뚝을 끊고 높은 바위 위에서 떨어져 자결하여 인조 때 왕명으로 세운 정문이다. 그 옆에 선묘원종일등공신선무랑충좌위중부자밀성박공휘l무열지충효비가 서 있는데 이 분은 자가 은경호가 만취헌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임란 때 큰공을 세워 일등 공신에 올랐고 또한 부모님의 병환 중에는 온갖 약을 구해드렸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자기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운 효자였다는 바 여러 문헌에 소개되어 있는 분이다.
또 조금 옆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백산선생님과 함께 항잉 운동과 한글운동에 헌신하신 남저 이우식 선생님의 시혜 송덕비가 서 있는데 사인함천이우식시혜비라 새겨져있다. 길을 건너 산자락에는 효자김해김공휘주찬지비가 있어서 옛날 이 배고개 먼당은 정려며 비석이 즐비했기에 일설에 따르면 이 고개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곡 허리 굽혀 절을 하게 되어서 절고개라 했고 배현이란 지명을 썼다는 얘기인데 상당히 근거 있는 좋은 지명인 듯 싶다. 그리고 웃다리골 못미쳐서 길가에는 효자 박성권공 행적비가 서 있다.
충신과 절부와 큰 효자 그리고 가난한 민초들의 시름을 덜어준 큰 부자 송덕비 등을 보면서 그냥 지나갈 사람이 있겠나 싶다. 누구나 고개를 오르면서 허리 굽혀 절하듯 해야했고 재먼당에 서면 저절로 머리 숙여 숙배를 드리는 곳이라니 썩 어울리는 소지명인 듯 싶다.
가락리 가락마을
용덕면은 德巖과 용암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1913년(대정2년) 통합되었다. 가락마을은 덕암에 속한 고촌으로 옛문헌에는 加羅로 돼있고 문집이나 재실 기문에는 可□,嘉□으로 쓰고 있기도 하다. 또 고개넘어 가례며의 수징이(수성)동네에 가래골(큰가래골,작은가래골)인데다가 나직한 산고개(바태고개)를 사이에 둔 마을이라 고개너머도 가락골로 부르면서 서로가 구분없이 불러왔던 지명인 것 같다.
수징이 가락골과 덕암 가락골이란 지명을 오래도록 써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태고개에 대한 유래는 덕암이전의 행정구역 명칭이 田太였고 이를 쉽고 편하게 호칭하면서 앞글자는 훈(뜻)을 따고 뒷글자는 독음을 따면 (밭태)가 되는데 나중에는 받침소리가 생략되면서 바태고개니 바태꼬가 된 것으로 봄이 옳을 것 같다. 결국 이 마을의 명칭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가래골에서 비롯된 것 같고 엤어른들이 한자표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다르게 쓴 것이 아닐가 싶을 뿐 확인할만한 자료를 얻지 못했다. 가라지(加羅池)란 연못이 있었고 부흥암이라는 병풍바위가 있어서 사람들이 놀기에 석 좋은 곳이라는 글이 전하고 있으니 옛날에는 산수가 빼어났던 곳임을 짐작케 한다.
어른들 얘기로는 이 동네 골안쪽에 심부재 또는 심주사란 분이 살았으며 자기집앞에 연못도 파놓고 대궐같은 집에 땅이며 산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어째 우환이 겹치면서 人亡家敗하여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이 얘기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어쨌든 이 마을은 그때부터 큰동네로 변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심부사집터 뿐 아니라 자연환경이 많이 변천되었고 지명도 이리저리 바뀌었지만 아직도 장안골,삼박골,돌구지먼당, 솔밭등 정다운 땅이름이 많이 남아서 불리고 있다.
박씨가 터를 잡았지만 셋집 더는 살수 없는 지혈이라 삼박골이 되었고 또 황소뿔과 같은 형국이라서 장안골, 장각골이며 돌껏(토박이 말로는 돌곳이니 돌구지라 하는데 길쌈할 때 실을 감고 풀 때 쓰이는 도구)지형이라서 돌구지먼당이라 부르고 있다. 옛어른들 얘기로는 돌구지혈은 자손이 번창하고 수명장수를 할 명당이라고 한다. 찬새매는 산꼭대기 가까운 자리에 있는 옹달샘인데 칠년대한에도 마른적이 없었고 무제(기우제)나 동신제 또는 집안에서 안택굿을 할 때도 이 찬새미물을 썼다고 한다.
들이름에는 동네앞은 앞들, 뒤편은 뒷들, 넓어서 큰들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밭이었고 큰 바위며 돌자갈이 많아서 밭일하기가 고달팠다해서 애살이들, 논도가리 생김새가 길쭉하여 갈치배미 등 소박하고 정겨운 토박이지명이 많았다. 이 마을 어귀에는 1939년 9월15일 개교한 덕암초등학교가 있고 당대 학덕높은 큰학자로 후학양성에 전념하신 송계 전규진님을 추모하는 낙신재와 유허비가 돋보인다. 남편을 여의고도 시부모님께 호셩을 다한 「전열부진향하씨기행비」(전삼수공부인)또 일제치하에서 충성회란 항일투쟁조직을 결성하여 치하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년 동안의 모진 옥고를 치른 전영수공의 기적비, 역시 전문의 송산재 등 향토문화유산도 많다.
그리고 오리고개쪽 산자락에는 제1공화국시절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서리를 지낸 소창 신성모선생의 묘소가 있었는데 1996년 국립묘지로 천묘했다.
산수풍광이 좋은 양택이라 佳麗□鄕인지 주위환경이 썩 좋고 안온하여 살기 좋은 터라고 가가낙락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썩 좋은 지명이라 할 것이다. 앞에 저은 바와 같이 청송심씨가 먼저 터 잡았고 뒤이어 담양 전씨가 큰 동네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에도 田씨가 43가구로 대성이고 김씨, 박씨, 임씨가 한 두 집씩으로 48세대가 살고 있다.
삼밭골
가락저수지
신성마을
우리 마을은 용덕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옛날에는 소리비동네로 불러 왔으며 그시절 동네 주변에는 배나무과수원이 많이 있었던 작은마을로 알려져 배곡제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옛 기록에는 이소현(二所峴)으로 되어 있으며, 쌍봉낙타의 등처럼 산고개가 겹쳐져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하며, 산자락에 많이 자생하는 솔비나무에서 비롯되어 『솔비』를 쉽고 편하게 부르자니 한음절 덧붙여 솔비, 소르비, 소리비가된 것으로 추정하며 역사적으로 특별한 유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부르기 쉽게 근대사에서 작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요 기관 유적지
- 수도사
출신인물
- 허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