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 정곡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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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면(正谷面)

정곡면 개요

정곡면을 경상남도 의령군의 면이다. 의령군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래로는 함안군과 접한다. 이병철 전삼성회장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정곡면 역사

정곡면은 신라 신문왕 5년(서기658) 장함현 화곡리에 속하였으며, 현종 9년에 진주 속령으로 있다가 대한제국 고종 32년(1895년) 화곡(禾谷:화실)과 정동(正洞) 두 방리(坊里)였으며, 1906년(광무10년) 지방구역정리 때 일정동(一正洞), 이정동(二正洞)과 화곡(禾谷)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뒤 지방행정구역조정(1914년 3월 1일 시행) 때 이정동은 지정면 관할로 편입되고 화곡과 일정동이 통합되어 정곡면이라 부르게 되면서 10개 법정리와 16개 행정리와 37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곡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정곡면 관할 법정리

정곡면은 10개의 법정리와 16개의 행정리, 37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가현리 백곡리 상촌리 석곡리 성황리 예둔리 오방리 적곡리 죽전리 중교리

가현리

가현마을

면소재지인「중다리」에서 시오리쯤 떨어져 있는 강변마을이다. 노인층에서는「가넘(가넘이)」「가재」로 부르는데 옛 문헌에 보면「풍탄강(楓灘江) 바로 위에 가현(佳峴)이란 마을이 있다」라고 돼 있다. 길게 흘러온 남강(南江)을 여기서는「풍탄강」또는 「풍강(楓江)」으로 불렸고, 한자지명을 부르기 쉽게 앞 글자는 음(독음)을 따고 뒷 글자는 훈(뜻)을 취해서「가재」가 된 것인데 경음화 속성 때문에「까재」로 발음하면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옛날 일정동(一正洞)면에 속했고 가현진(佳峴津)이었다. 뱃나루가 없어진지 20년이 되었고 한참 밑에 작은 거룻배가 오가는데 거기는 「이무리나리」란다. 한자로 주물(主物)이라「임물」로 해야 하는데 말하기 쉽고 편하게「이무리」가 된 것이다. 바로 이나루가 풍탄진인 것 같다. 신작로 찻길이 나기 전 이곳은 뱃길이 교통수단 이었고 나루터는 물물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라 사람의 내왕이 빈번했다고 한다. 따라서 「가재꼬(가재고개)」를 넘어 중교로 통하던 길은 소로가 아니고 한길대로였다고 한다. 마을은 정남향으로 앉았고 두 뜸으로 돼 있다. 「백구등」또는「뒷동산」이라 부르는 나직한 산등을 사이에 두고 안쪽을「안몰」「안땀」「아래땀」으로 부른다. 뒷동산 꼭대기에는 당산숲이 있고 숲 속에 조산이 있는데 동신제를 지냈다. 「안몰」앞 논가운데는 느티나무 고목이 하나 있다. 둘레가 다섯아름인 거목인데 속은 썩어서 완전히 비어 있고 천수를 다했는지 가지도 자꾸 말라죽고 잎새도 빈약하다. 동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그 옆 듬병은 용왕 먹이던 곳이지만 요새는 발길이 뜸하단다. 「배깟몰」뒤에 산고개가 있는데「새딱꼬」다. 고개너머 마을이 새터(신기)라 새터고개인데 변음되어 「새딱꼬」가 된 것이다. 고개 밑에 수세가 좋은「금포구 나무(팽나무)」도 엄청 크고 희귀목이라 자랑거리다. 또 마을 못미쳐서 따스한 산골짜기가 있는데 「장자몰」「장자골」이라 부른다. 지금도 밭을 갈거나 땅을 일구면 토기와조각, 옹기그릇 부스러기가 많이 발굴된다고 한다. 속설에 따르면 조선 초기 대사헌 벼슬까지 오른 장(張)씨라는 만석꾼부자가 살았던 집터라는 것이다. 장부자는 무남이녀를 두었으며 사위는 희실(백곡) 전(田)씨와 안(安)씨로 맞아 들였다. 노경에 이르러서 재물은 두 사위에게 똑같이 나누어주고는 떠났는데 여생은 서울서 보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장장자(張長者)집터란 말이 「장자몰」「장자골」로 줄여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을 안에는 남향 홍(洪)씨의 연방정(□芳亭), 파평 윤(尹)문의 여여재(如如齋), 김해 김(金)문의 중악재(中岳齋)가 있고 동구밖에 부호군청과 홍재문(洪在文)공유적비, 겸산처사 홍상문(洪象文)공유적비, 풍영사(風詠社)기념비가 서 있다. 가장 먼저 제주 고(高)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며, 그 뒤 진양 강(姜)씨가 들어왔다는데 지금은 김해 김(金)씨가 25집, 성주 이(□)씨가 11집, 남양 홍(洪)씨 9집, 담양 전(田)씨 6집, 나주 임(□)씨 5집 등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

백곡리

중촌마을

법정동리명은 백곡리(白谷里)에 속하며 자연마을로는 중촌이라 부른다. 제법 너른 들도 있는 산골안 동네인데 머리맡에 유서 깊은 가막산 봉오산(봉화산의 변음)이라고 부른다)이 있고 앞쪽으로는 널브이산(넓고 평평한 언덕 같다는 뜻인데 널브러치다에서 비롯된 말인 것 같다)이 산을 경계로 하여 북실(적곡)이라고 하며 서녘의 큰 산줄기는 강등이라고 부르는데 이 일대 산의 흙이 백토다. 꼭 하얀 회가루와 같아 보이는데 강등(姜嶝)이란 산이름은 그곳 중턱에 대사간(大司諫, 조선시대 정3품 벼슬)을 지내신 강렬(姜烈)공의 묘소가 있어서 산줄기 이름이 된 것이라고 한다. 가막산 밑에 배껏말 (바깥마을, 외동. 外洞)과 가운데말(중촌. 中村)이 있고 골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이 안말(내동 ; 內洞)로 부른다. 그리고 한참 떨어져 있는 싹실도 이 동네에 포함된다. 이곳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옛날 하곡이란 지명을 쓴 적도 있는데 그 뒤 회실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동네 주위의 토질이 모두 석회(石灰)이나 백토(白土)인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막산은 조선시대 봉수대(봉화대)가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이런 연유로 적곡으로 통하는 산고개 이름도 그렇거니와 이산의 주위에 있는 마을마다 봉오재가 있다. 안말 서쪽 강등의 산코숭이에는 아주 나이 많은 돌감나무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의 말로는 300살은 더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조금 위에 있는 묘역에 가선대부판중추부사(嘉善大夫判中樞付事) 서계강공지묘(西溪姜公之墓)라고 새긴 큰 비석이 있다. 이 분은 대사간을 지내신 강열공의 묘소이고 거기서 한참 위쪽에는 진사를 지내신 서근복(徐謹復)공과 선교량(宣敎郞), 서희업(徐熹業)공의 묘소가 있다. 동구 밖에는 백산정(白山亭)이 있는데 어모장군(禦侮將軍) 순홍 안씨 안탁(安濯)공의 사적비와 묘단비가 있고 그 위에 긍구정(肯構亭)이란 현판이 걸린 재실이 있다. 원래 둔세정이었던 것을 나중에 긍구정으로 재명을 바꾼 것이다. 마을 안에는 술선재(述先齋), 영모재(永慕齋), 옥휘정(玉輝亭), 삼학정(三鶴亭) 담양전씨의 재실이 여러 채가 있다. 그리고 싹실이란 마을은 이 동네와는 영 떨어져 있는데 옛날에는 바로 동네 앞까지 물이 드는 저습지대라 앞들에 심어놓은 농작물이 물에 담겨서 못먹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니 곡식의 싹이 잘 트고 물이 안 들었으면 하는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지명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동네 뒤산이 모두산(茅頭山)이다. 지금은 열세가구가 살고 있다.

신기마을

정곡면 소재지에서는 동남쪽으로 십리길인데 남강이 저만치 보이는 마을이다. 행정동리로는 중촌(中村)과 신기마을이 백곡리(白谷里)에 속하며 통칭 회에실 새터다. 회실(발음상으로는「회에실」이다)에 대한 유래는 이동네 주위의 산의 흙이 이상스럽게도 백토(白土)라 어찌보면 석회석지대가 아닐까도 싶다. 회에실의 새터마을은 큰 한길을 끼고 있는 동네로 상신기(새터웃말)와 하신기(새터아랫말) 감나무골 등 세 뜸이다. 이 마을에 제법 오래된 정남초등학교가 있었으나 농촌의 인구감소로 1999년 2월 28일 폐교되었고 망군당고개가 경계가 되며 상신기보다는 하신기가 큰 동네다.

신기(새터)란 지명은 골안마을인 백곡(회에실)보다 훨씬 늦게 마을이 형성된 새 동네인 때문이라고 한다. 감나무골은 솔직한 작은 뜸인데 아주 오래된 감나무 고목이 있고 또한 감이 잘되는 동네라서 자연스럽게 감나무골(감남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 바로 뒷산을 홍등(홍등산)으로 부르는 평평한 산줄기인데 어른들의 말로는 홍정승묘가 있는 등때(산줄기)라는 뜻이라 한다. 조금 아래쪽에는 또 다른 큰 묘가 있는데 아무 석물이나 표석이 없는데 옛날부터 심정승묘라고 구전되어 왔다고 한다.

옛 문헌에 따르면 의춘군심문식묘재정동백곡(宜春君□文湜墓在正洞白谷) 또는 백야곡이라 했으니 이 묘가 바로 의춘심씨(의령심씨)의 시조공 묘소가 아닌지 궁금하나 알 수없다.

학교 동쪽산골짜기는 세덕골(細德谷)로 서쪽은 대덕골(大德谷)로 부르며 백발도사가 은거했다는 성지골, 장씨 큰부자가 살았던 장자몰 또 작따모랭이란 곳도 있다. 동네 조금 밑에는 연체각(□ 閣)이란 현판이 걸린 꽃집이 있다. 이는 영산현감을 지내신 북헌(北軒) 전시우(田時雨)공과 그의 아우로 성균관 진사에 오른 묵헌(默軒) 전호우(田好雨)공 두 분을 승모하기 위해서 세운 정려다. 원래 가현마을앞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이건했다 한다. 통정대부행영산현감북헌전공(通政大夫行靈山縣監北憲田公) 성균관진사증군자감정묵헌전공(成均館進士贈軍資監正默軒田公)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그리고 소현각(遡賢閣)은 신암(新庵) 전용규(田溶珪)공을 경모하는 비라고 한다. 신암공은 당대 큰 학자로 이름 들난 간재(艮齋)선생 문하에서 수업한 학자로서 자남정사(紫南精舍)에서 후학양성에 진력하신 분이라 후진들이 유적비를 세웠는데 신암처사(新庵處士) 담양전공유사비(潭陽田公遺思碑)다. 연체각 조금위에는 전형수처유인청주정씨효적비(田炯秀妻孺人淸州鄭氏孝蹟碑)가 있고 망군당재(산이름은 망군산인데 맹근산으로 발음하기도 함)밑 양지편에 성균관진사를 지내신 어은(漁隱) 전유수(田有秀)공을 추모하는 망덕재(望德齋)가 있다.

상신기 뒤 동남쪽 고개를 넘으면 지정 백야마을인데 이 고개가 무섭기로 소문난 도둑꼬(도둑고개)라고 하는데 그 연유인즉 해지고 난 뒤에 이 산고개를 넘어가면 반드시 도적에게 돈을 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너 산골짜기에는 전(田)씨문중 재실인 경모재(敬慕齋)와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그리고 안골어귀에는 200살쯤 되는 버드나무가 있는데 속은 비었고 둘레가 세아름 정도가 되는 거목으로 마을의 당산나무라고 하며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동네서 300여미터쯤에 강을 만나게 되는데 몇해전까지만 해도 배나리(뱃나루)라 작은 거룻배가 왕래를 하면서 사람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요즘엔 주물나루(主勿津)이라하고 강도 남강으로 부르지만 옛기록에는 풍탄진(楓灘津)이라거나 가현진이다. 그리고「이물이나리」로 더 많이 알려진 이 나루는 함안 법수면으로 연락되는 강나루로 주물(主勿)을 앞글자는 뜻(훈)을 따서「임」이고 뒷글자는 소리(독음)를 따서 부르자니 임물 임무리 이무리로 변음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94년까지도 이곳은 줄배를 타고 내왕하는 사람이 있었던 곳이다.

상촌리

상촌마을

정곡면 소재지에서는 동북방이고 깊은 산골짜기 마을인데 한때는 정동(正洞)이라 불렀던 곳이다. 남쪽으로 열리고 두루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마을 뒤로 왕봉산과 노은봉이 상당히 높다.

옛날에는 꽉막힌 지역이였으나 근래 와서는 지정이나 신반 쪽으로 통하는 도로가 잘 나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동네가 됐다. 이 마을은 성씨별 집성촌으로 안촌, 조촌, 전촌 모두 세 뜸인 셈이다. 그리고 골밖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보갈이란 동네가 있다. 지금은 복양(復陽)으로 적고 있다.

보갈이의 유래는 이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큰 소가 배불리 먹고 누어서 새김질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과 소로서 밭골을 타거나 논을 갈 때 소 코뚜레에 매고 방향을 잡는 긴 꼬삐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흔히「이까리」라고도 하는데 이 줄을 당기면 오른쪽이 또 치면서 ‘자라(좌라)’라고 소리치면 왼쪽으로 가게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보가리는 보통 짚의 홰미와 삼으로 잘 꼬아서 아주 질기고 매끄럽게 만든다고 한다. 보통 소먹일 때 달고 있는 것은 꼬뼁이(고삐)라 부르고 쟁기질, 훌청이(극젱이)를 끌면서 일을 시킬 때는 이 보가리(보갈이)를 단다고 한다. 보갈이 마을에서 건너다보이는 뜸은 새터인데 동네가 생긴지 얼마 안 된 것임을 짐작 할 수 있고 요즘 와서는 신기로 부른다.

보갈이 동네아래쪽에 있는 것이 사래실이다. 지금와서는 사곡(砂谷 또는 沙谷)으로 부르지만 어른들의 택호에도 사래실띠기(사래실댁)로 흔하게 듣는 지명이다. 사래란 고유어는 밭이랑을 말하기도 하고 머슴 새경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의 선산을 돌보아 주는 묘지기나 마름이 한 해 동안의 보수로 얻어서 부치어 먹는 논밭을 사래논, 사래밭이라고 한다. 또한 챙이(키)에 곡식을 담고 흔들고 까불어서 돌이나 미(뉘) 그리고 부서진 싸라기 등을 골라내는 쳉이질을 사래질이라고 하기도 한다. 결국 옛날 이 지역은 부자집 논밭을 관리하거나 선산을 돌보아주는 대가를 얻어 부치는 논밭이 대부분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랑이 긴 밭들이 많아서 그런 지명을 쓴 것은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사래실이 고유지명인데 일제강점기 때 사곡으로 했으니 한글로는 첫음절(두음)을 살린 셈이지만 한자는 다른 글자라 할 것이다. 사래실마을은 현재는 법정동리명은 성황리에 속한다.

새터 동구 밖에는 열부 함안 조씨(전(田井秀공의 부인)비가 서 있다. 안촌에는 전성재(展誠齋), 보갈이에는 복양재(復陽齋), 사래실에는 천상정(川上亭), 새터에는 도장재(道章齋) 등 동네마다 문중재실이 있다. 길가에는 노은처사 조석명(曺錫明)공 사적비각도 있다. 가장 안(內)동네에서 지정이나 세간 방면으로 통하는 돌문이재(돌문재 石門峴))가 있고 음지땀 뒤쪽으로 지정면 태부로 가는 산고개는 버섯등재다. 옛날 이 사래실 동네 밑에 느티징이들로 부르는 돌이름은 큰 느티나무(정자나무)가 있어서 그런 들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보갈이 마을에서는 자기 밭을 개답하면서 우연히 큰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부장품은 없었다고 하며 아주 큰 천개석 두 개가 나왔다고 한다. 또 마을앞 방아깐 주위와 길 주위에는 칠성바구로 부르는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선사시대의 유적으로서 보존되어야 할 지석(支石 고인돌)인데 길 내고 논밭 정리하면서 이리저리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 상촌을 한때는 정동(正洞)으로 부르기도 했다는데 옛 문헌으로는 정골부곡(正骨部曲)이 이 골짜기만을 말하는지 아니면 성황리가 포함되는 건지 정확한 자료를 얻지 못했다. 이 마을에는 안씨와 전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 같고 지금은 안씨가 17집, 전씨가 12집, 조씨가 12집, 남씨, 박씨가 한집씩 모두 다 보태야 43세대가 살다.

석곡리

석곡마을

정곡면 소재지에서 신반으로 가는 국도따라 1.5km 정도의 거리로 한길에 붙어 있다시피 가깝게 자리 잡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법정동리로는 석곡리(石谷里)로서 보통 부르기로는 돌실(乭室)이다, 석곡은 큰 동네(본동)를 말하고 골안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은 골돌실 또는 안돌실로 불렸는데 요즘와서는 내곡(內谷)이다, 솔징이로 불렸던 송정(松亭) 평지와 새터(신기)등 여러 뜸인 셈이다. 마을 주위의 산에 소나무가 많았을 뿐 아니라 동구 밖에도 솔밭멧등이라해서 도래솔이 좋은데 이 숲안의 무덤을 두고 광대패(아마 합천 밤마리(율지리)의 대광대패가 신반을 거쳐 이동하면서 이곳에서도 한마당 놀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가 놀이를 했던 자리라고 전한다.

그리고 이 마을 안편의 산중허리쯤에 유서 깊은 서당 겸 재실 식호당(式好堂)이 있는데 이곳 역시 온통 소나무 숲에 쌓여 있으니 솔밭이라거나 솔징(松亭)이라 부른다. 그리고 평지는 본동 뒷편의 뜸을 말하는데 지형이 평평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길 건너 서쪽을 보고 있는 새터는 돌실에 큰 화재가 일어난 뒤 새집을 지으면서 옮겨 앉은 뜸이라고 한다. 어느 지방에나 돌실이나 석곡은 흔한 지명인데 이곳은 정말 썩 어울리고 그 유래가 분명한 소지명이다. 그것은 마을 앞에 선사시대(4세기말에서 5세기초)의 유적인 칠성바구(지석, 支石)가 있고 특히 동네 들어가는 어귀에는 아주 큰 덩치의 바위돌이 있어서 일부러 가져다놓은 표석같아 보이기도 한다. 1988년 3월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긴급발굴을 했다.

석곡리 구역에 있던 7기 중 5기와 오방리 구역에 있던 15기 중 4기 등 9기만 발굴을 했는데 기반식 지석묘와 개석식 지석묘가 섞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마제석검(磨製石劍), 석족(石鏃), 숫돌(砥石), 단도마연토기소호(丹塗摩硏土器小壺), 천하석제소옥(天河石製小玉) 등 희귀한 선사유물이 출토 되었다. 이 동네에는 마두로 넘어가는 산고개를 버덩곶재 또는 마두재라 부르는데 이는 험한 산고개가 아니라 평평한 지형의 고갯마루라는 뜻이고 유곡 너실(판곡)로 이어지는 산고개는 사부장재다. 이는 힘들이지 않고 가만히 넘어 갈 수 있는 나직한 산고개란 뜻인데 우리지방 토박이말로 사부제기(사부자기)라거나 사부작사부작 걸어간다는 말이 더러 쓰인다.

또 두곡마을로 통하는 길은 양징이재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지명이 두곡이 아니라 막실이며 맨 안쪽의 마을 이름이 양징이(양정)이기 때문에 그런 재 이름이 붙게 된 것이라고 한다. 송정마을 뒷산 중턱 소나무숲 속에 있는 식호당(式好堂)은 한백기(韓伯埼)공이 머물면서 후학양성을 하던 곳인데 당호는 당시 윤순지 군수가 직접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현풍 곽씨의 석산재(石山齋)가 있으며 골돌실은 전주 최씨가, 송정은 청주 한씨, 창녕 조씨, 경주 김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 왔다고 하며 돌실 본동은 현풍 곽씨가 일찍 터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최씨가 17집, 곽씨가 15집, 한씨가 10집, 조씨가 6집이고 김씨, 이씨가 서너집씩 네땀을 다 보태야 54가구다.

성황리

성황마을

정곡면 소재지에서 동쪽방향의 동네인데 500미터쯤에서 상촌과 성황으로 길이 나누어진다. 왼편 길로 가면 상촌이 되고 오른편 길로 가자면 바로 탑골이고 조금 더 가면 성황마을인데 보통「정골」로 부르는 곳이다. 옛문헌에도 정골부곡(正骨部曲)은 현의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그리고 비문이나 문집 같은데는 정동으로 기록하고 있는 걸 보면 옛시절 부곡이었던 점 때문에 바꾼 것이 아닐까 싶었다. 원래 이 지역은 일정동리(一正洞里)로 상촌, 성황, 무곡, 예동 등 동남쪽 일대를 관할하였고 그 뒤 행정구역통폐합 때 화곡리와 통합하여 정곡면이 되고 이정동리(二正洞里)는 지정면으로 편입된 것이다. 따라서 정골(正骨)이란 지역이 어딘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성황마을은 속칭 정골, 큰골, 정동 등 여러 가지로 불려 왔는데 성황은「서낭」이 본디말이다. 서낭당(서황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동네 들머리 오른쪽 뜸이 탑골인데 동구밖에 큰 느티나무가 있으며 골짜기 안의 밭언덕에는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이 탑이 있는 곳은 성황리 693의 3번지가 되는데 기단부가 이층으로 돼 있고 그 위에 삼층을 이루었다. 탑의 형식으로 보아서 삼국시대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2.8미터인데 1층이 가장 높고 2층은 1층의 3분의 1정도이고 3층은 2층의 2분의 1정도인데 상륜부는 없어 진 상태다. 현재 경상남도 지정문화재(제114호)로 지정되어 보존돼 있다. 이곳에는 규모가 큰 절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이름도 탑골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동네 자리는 서쪽이 확 트이고 동남북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골마을이다. 맨 밑이 중땀, 그 위가 윗마실 또는 웃땀으로 부르며 양지 편을 양지말 또는 양지땀이라고 하고 숲 뒤로 음달쪽은 숲 안마실 또는 안땀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배애골, 서새미골짝, 마당골 등 정감어린 토박이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배애골은 고개너머 마을이 지정면 백야리(배가리로 발음) 이기 때문에 옛 지명을 따서 골이름과 재이름으로 쓴 것이며, 서새미골짝은 서녘에 있는 물새미(우물)때문이라고 한다. 마당골은 동신제 지내는 정자나무껄의 건너 골짝기로 집은 없고 너른 마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서새미골짝을 따라 산길이 나 있는데 제법 가파른 산고갯길인데 이재가 바로 서낭재 또는 성황재로 부른다고 한다. 고개너머가 지정면 득소마을인데 옛날에는 이 재 먼당(고갯마루)에 큰 고목나무가 있고 조산이 있었다는 얘기 등으로 미루어 이 재 때문에 성황이란 지명이 붙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웃마실 뒤에 거대하고도 모양이 썩 좋은 부채모양의 노송이 있는데 수령 400년은 더 된 것 같다. 높이 약 20미터, 둘레 약5미터정도인데 1988년 4월 30일 국가지정천연기념물(제359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부분 외과수술과 함께 시비작업을 함으로서 수세가 더욱 좋아졌다. 동네 어귀 길가에는 진양하씨포효비(晋陽河氏褒孝碑, 남상만씨의 부인)와 만초(晩樵)공 가정(稼亭)공 효도비가 서 있고 옆에 영모재(永慕齋)재실과 그리고 웃마실 맨위쪽에 양정재(養正齋)재실과 꽃집 그리고 큰 비석이 서 있다. 양정거사(養正居士) 남준(南寯)공의 유허비(遺墟碑), 옛날에 세운 비는 비각안에 서 있고 재실마당에 새로 세운 큰 비가 있다. 이 기문에는 대양산(大養山) 아래라 했고 곧은 선비가 벼슬을 버린채 세상사를 잊고 지낸 큰 선비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남씨문중의 원모재(遠慕齋), 오산재(吾山齋)와 전의 이씨 여재각(如在閣)도 있다. 동구 밖에는 음풍농월하면서 시회도 열었던 풍강루(風江樓)가 있고 그 위에 효부 담양 전씨 (남상희씨 부인)의 비와 효부유인 담양 전씨 열행비(전사 진씨 따님)가 있다. 그리고 상촌마을로 가는 길목위 남향받이 산등성이에는 널찍한 묘역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증승정원좌부승지겸경연참찬관전의이공(명로)의 묘(贈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全義□公命老之墓)와 부사정전의이공휘창조묘도비(副司正全義□公諱昌祖墓道碑)와 함께 여러 기의 묘소가 있다. 원래 남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도 남씨촌이라 할 정도로 65가구나 되고 전씨가 10집, 나머지 김씨, 안씨, 윤씨, 박씨, 이씨 등은 겨우 한두집씩 뿐이며 모두 82세대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이다.

예둔리

예동마을

정곡면소재지에서 적곡·백곡쪽으로 한참가면 왼편으로 들어 앉아 있는 동리다. 옛 문헌에는 예둔(□屯)과 예동(□洞)으로 돼 있고 우례동(憂□洞)으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둔동(無屯洞)으로 해서 예동과 무곡마을을 포함해서 불렀던 지명 같기도 하다. 어르신들 얘기로는 동방예의지국(東方□義之國)임을 명심하고 이를 길이 받들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우례동, 즉 예의를 지키지 못할까를 늘 염려하라는 뜻에서 그런 지명을 지었다고 한다. 마을 뒤에 솔도산(率道山)이 있고 맹수산이니 선직골산 등 제법 높은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다. 웃땀이 큰 동네고 아랫땀은 서너집만 있는 솔찍한 골짝뜸이다. 동네 뒤로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두산(□頭山)이고 동북쪽이 선지골 또는 큰골이고 동남쪽이 작은 골로 자그마한 저수지가 있다. 그리고 지정 백야(백이라고 부름)로 넘어가는 우리재(우례재) 그리고 무덤실(무곡)로 통하는 재는 큰골재 또는 선지골재로 부른다. 동네 앞의 한길따라 백곡으로 가는 산고개는 망근당재라는데 이는 성균관 진사 김유수(金有秀)공이 임란을 당해 임금께서 의주로 파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산고개에서 북향하여 숙배를 드렸다는 뜻에서 망군대 또는 망군당(望君堂)재로 부른다. 일찍이 달성서씨가 터잡았다고 하는데 이미 12대째라니 350년 이상이 되었다. 동구밖 둑 넘어 남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유서 깊은 함육정(涵育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육우당(□友堂) 서명윤(徐命潤)공과 삼우당(三友堂) 서명룡(徐命龍)공 형제분이 기거하면서 학문을 쌓았던 곳이라고 한다. 동네 들머리에는 달성 서기환(徐琪煥)공 공적비도 있고 그 위에 예강재(□崗齋), 이례재(以禮齋), 소이재(素□齋) 등 서씨문중의 재실이 여러 채 있다. 지금은 서씨가 46가구로 대성이다. 흔히 서촌(徐村)이란 별호도 있다. 성주 이씨가 서너집이고 박씨, 임씨, 배씨가 한집씩이라 다해서 50세대가 살고 있다.

무곡마을

정곡면소재지에서 적·백곡가는 길로 오리쯤 가다보면 정·북향으로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이 무곡이다. 전해오는 토박이 지명은「무듬실(무덤실)」이며 한자로는「무둔(無屯)」「무둔(茂屯)」두 가지로 쓰이고 있다.

이 마을의 지형지세를 말하면서 궁궁을을이라 한다. 즉 골안의 모양이 활궁자나 새을자를 닮았을 뿐 아니라 골밖에서 보면 동네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난리 때면 가장 좋은 피난처였다고 한다. 정남방으로 강언덕이 보일 뿐 두루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 토박이말로는「무듬」과 「무덤」의 구별이 어렵다. 그리고 노인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옛날 강변 둘막이(둑막이)가 안되었을 때는 강물이 넘쳐들면서 마을앞 정자나무밑까지 물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자니 골밖의 전답은 전부가 구렁논이라 비만 오면 온통 물에 잠기는 곳이라 한다.

고촌이라는 안모실(안마을)과 새동네인 배껏모실(바깥마을) 두 뜸으로 나누어져 있다. 「무덤실」또는 「무덤실」하면 무덤(묘)이 꽉 들어찬 골짜기라 생각하기 쉽다. 이 지방말로「무뎀이골」「무듬이골」이다. 물이란 말의 받침소리 탈락과 들다(듦)에서 역시 리을(ㄹ)소리의 묵음 현상으로「무듬(무듬이)」이 된 것으로 보는데 옳은 것 같다. 들머리 배껏모실은 여남집이고 산굽이를 돌아서 한참 들어가면 안모실이 있는데 큰 정자나무(당산나무)와 함께 동네숲이 좋다. 마을 뒤로 「나무재」가 있는데 성황마을을 통하고 진등골짝을 들어가서 또 잿길이 있는데「니비재」라 지정 백야로 이어진다. 나무보탄이란「나뭇재」이고 산흐름의 모양이 꼭이 누에를 닮았다고「니비재」라고 한다. 탑골이란 곳에는 정작 돌탑이 하나도 없는데 증언에 따르면 지금 성황마을 절골에 있는 삼층석탑이 처음에는 이곳에 있었던 걸 옮겨 갔다는 것이다. 이 탑은 상륜부가 없어졌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양식이다. 지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된바 우리 고장에선 귀중한 석탑중의 하나이다.

골밖 한길가에 나지막하고 길게 흘러내린 산줄기를「배암등」이라 한다. 그리고 강변쪽에 산도 아니면서 오똑하니 앉아 있는 돈대가 있는데 이걸「깨꾸리산」이란다. 큰뱀이 개구리를 보고는 용을 쓰면서 기어가는 형국이라 역시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뱀등의 머리부분에 큰 묘가 있다. 조선시대 인조 때 여러 관직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의병창의를 주도하기도 했던 문무겸비의 거유이자 절의의 선비였던 괴당 이만승(□蔓勝)공의 유택이다. 마을 안에 김해 김문의 삼우정(三友亭), 김녕 김씨의 심원재(尋遠齋), 김홍두씨의 부인의 효열행을 기리는 「김효열부문화류씨 기행비」가 있다.

김해김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도 23집이다. 그 밖에 임, 최, 정, 서 , 조, 이, 박씨등 30여세대가 의좋게 살고 있다.

오방리

오방마을

정곡면 소재지에서 신번쪽 오리길 남짓한데 쏙 들어앉은 마을이다. 유곡면과 경계를 긋는 달재(다래재, 월현(月峴), 월나현(月□峴)이라 쓰기도 한다)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보통 정곡「오뱅이」라 부르며 먼저 철성 이씨(고성 이씨) 집성고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된 동네다.

마을 어귀의 논두렁 밑에 자연석 표석이 있는데 오방(五榜)이라 새겨져 있다. 「다섯 방문(榜文)」글(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써 붙이는 글, 벽보같은 것)이란 뜻이다. 큰 인물과 관련되는 지명이며 흔치 않은 지명의 유래라 할 것이다.

지금 쓰는 오방(五方)은 일제 때 쉽고 편리한 글자로 바뀌면서 소리(음)는 같지만 뜻은 엉뚱하게 변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오방위(五方位), 오방신장, 오방대기등 오방의 의미는 이 마을의 입지조건이나 주위의 지형지세로 보아 근거가 없다.

동네 들머리에 칠성바구(지석묘로 추정됨)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고 또 동남을 가린 채 수구비보를 위해서 조성됐던 긴 숲도 허물어져 두어그루만 남아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도적골(도둑골)이라 부르는 아주 깊은 골짜기가 있으며 나이 많은 타박솔과 묵은 산전이 있다. 옛날 이 골짝어귀에 작은 동네가 있었다고 한다. 송정 안골로 통하는「큰골재」너실(판곡)로 가는「쑥골재」등 소로 잿길은 묻힌지 오래됐다. 옛 기록에 「사기점골」이 있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길 가 산코숭이에 「통훈대부사간원정언, 증자현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정의공(貞義公) 송암(松巖)이 선생신도비」가 서 있다. 임란 때의 진중일기랄 수 있는「용사일기(□蛇日記)」를 저술한 이노(□)선생의 행적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그리고 문화재(제62호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함휘각(含輝閣)에 목판 48장이 그대로 보존돼 있기도 하다.

바로 옆에 오산재(五山齋), 동네안에 금포정(琴抱亭) 등 문중재실 또한 훌륭하다. 처음 들어왔다는 구씨는 한집뿐이고 김씨 한집 그리고 고성 이씨는 12집이 살고 있다.

행정마을

정곡면 소재지에서 오리길이 어린데 위치하고 있으며 보통「오뱅이(오방)」라면 행정마을까지 포함되기도 하지만「오방」과「행정」을 같은 동네로 보지 말라는 주문도 있는 조금은 까다로운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는「은행정」이었는데 호칭상 편의로「행정」이라 굳어진 지명이다. 나직한 산줄기가 남서북을 둘러앉았고 동쪽이 열린 골에 자리 잡고 있다. 지명의 유래도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지만 지금도 마을어귀에서 골안에 이르기까지 거목으로 자란 은행목이 여러그루 있다. 우리고장에는「행정」이 두 곳이나 있으며 역시 은행나무로 유명한 동네다. 이 마을에도 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유서 깊은 재각이나 정각이 있다. 동구밖 밭가운데는「칠성바구」라 부르는 대암거석이 일곱 기가 있는데 선사 유적적인 지석묘(지석묘 고인돌, dolmen)다. 동네 앞을 막아선 산이 곰배등이라는데 산의 생김새가 생활도구로서 널리 쓰였던 고무래 모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산에는 백로와 왜가리떼가 모여 살았던 곳인데 흔히 백로등, 학소라고 불렀다. 몇해 안 가서 우거졌던 수림도 말라죽으면서 철새들의 낙원도 허물어졌고 그 뒤 유서 깊은 「가례 동천」잡목 숲으로 집단이주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곰배등을 넘는 재가 있는데 「곰돌실(내곡)」로 통하는 산고개다. 북쪽을 막고 있는 산은 온통 대숲이며, 동네 안에는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듯이 큰 재각이 여러 채 보인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었고 당대 명망있는 거유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큰선비 괴당 이만승(□曼勝)공의 추모각인 성암정사(星巖精舍)가 돋보인다. 한말의 항일우국의 큰 학자로서 기미년에 전국의 유림137인이 연서하여 파리에서 열렸던 세계평화회의에 일제강점을 규탄하는 한편 국권회복을 호소한 「유림단 파리장서운동」에 적극 참여한 수산 이태식선생의 강학소 였던「임천정(□川亭)」도 예대로다. 학덕겸비한 선대어른을 추모하기 위해서 자도재(紫陶齋), 행산정(杏山亭), 평암정(平庵亭)이 있다. 이 동네도 철성 이씨 집성촌이며 타성으로는 조, 강씨가 한 두집씩이고 30여가구가 모두 이씨다.

적곡리

적곡마을

정곡면 적곡리에 속한 마을로 면소재지에서 약 이십리길인데 저만치 남강이 굽이쳐 흐른다. 보통 「북실」이라 부르는데 적곡(赤谷) 또는 적실(赤實)로 적기도 한다. 「붉실」인데 받침소리「ㄹ」이 묵음이라 북실로 굳어진 것이다.

옛날 봉수대(烽燧臺)가 있던 가막산(可莫山 또는 可幕山)을 사이에 두고 북백(北白) 남적(南赤)이라 했다. 가막산(인근 주민들은 봉화산(烽火山)으로 더 많이 부른다) 북쪽에「회실(白谷)」이 있고 남쪽엔「북실(赤谷)」이란 뜻이다. 그리고 마을 뒷산을「부미동」이니「부미」라고 한다. 그 산의 흙이 아주 붉은 색의 황토로 푸나무가 엉성한 겨울철에는 산등성이까지 빨갛게 보인다.

옛 문헌에는 紫山, 紫村, 紫山谷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방아재(봉화재)넘어 회실(발음으로는 「회에실」이다)과 함께 담양 전씨가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마을 뒤에서 동남으로 흐르다가 뾰족하게 솟은 산은 「송곳정」이고 건너에는 꽃봉오리 같아서「모란봉(목단봉)」이다. 마당에만 서도 길게 굽이쳐 흐르는 남강이 보이는데 강변에는 아주 넓은 들판이라 보기만 해도 넉넉하다.

3백살은 된 것으로 보이는 떡갈나무(갈나무, 산굴밤나무, 祚木)가 당산나무로 있다. 우리고장에서는 보기 드문 거수목이며 얼마 안있어 천연기념물이 될만한 나무이기 때문에 보호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마을어귀「도론지」라 부르는 높은 밭언덕에 아주 독특한 양식의 돌정문(石旌門)이 있는데 「열부학생 전만구(田萬區)처 회산황(黃)씨지려」라 조선 숙종 때 내린 정려이니 2백년이 더 된 듯 하다. 돌기둥 두 개에 돌지붕이 덮이고 역시 돌에 새긴 비명은 횡서로 돼 있다. 틈이 너무 크고 비스듬히 누워서 당장 손보아야 할 상태다.

한참 들어와서 음달쪽 산기슭에는 이름난 선비「수월당(전만교님)유허비」가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또 최근에 수비한 가암(稼菴) 춘암(春菴) 청사(晴沙) 삼형제분의 유덕을 기리는 유적비가 세워졌다. 담양 전(田)문의 재실인 추원재와 수월당 제각이 있고 옛날 간이학교 자리에는 자그만 교회가 있다. 일제말기 초등학교가 백곡(신기)쪽에 서게 되면서부터 이 마을 학동들은 봉오제를 넘어 오리길을 걸어 다녔다고 한다.

담양 전(田)씨가 24호, 서홍 김(金)씨가 10호, 남(南), 이(□)씨가 댓집씩이고 안(安), 서(徐)씨가 두어집씩이니 50여호 남짓하다.

두호마을

정곡면소재지에서는 남동쪽 7km 남짓한 거리로 강변에 있는 마을이다. 법정동리로는 적곡(赤谷)리 마을이다. 원당과 두호, 웃땀, 아래땀 등 세뜸으로 나누어져 있다.

옛지명이「북두미」「북듬이」인데 어떤이는「북두루미」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북쪽으로 봉수대가 있던 가막산(可莫山 또는 可幕山)이 높이 솟아 있고 함박산이 서북방을 가린 채 동네를 감싸고 있고 동남쪽으로 남강이 길게 흐르고 있다. 원당은 아마 맨처음 정착한 사람들이 살았던 묵은 터란 뜻에서 붙여진 지명인 듯 하다. 그리고「북두미」「북듬이」로 불렀던 두호마을은 아래위로 두뜸을 이루고 있는데 웃땀이 여남은집, 아래땀이 30여가구이다. 「북두미」「북듬이」란 지명은 정확한 근거가 없이 각기 다른 풀이를 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쓰는「북」은 「붉다(赤)」의 받침소리 리을의 탈락과 묵음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가막산의 횃불, 땅심 좋은 황토밭, 강물의 범람으로 벌건 흙탕물에 잠기는 저습지대, 못이나 늪이 많은 둠곳,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작은 호수란 뜻의 두호(斗湖)가 된 것이니 지명의 변천사를 보면 재미있지만, 마을의 역사를 무시하고 작명한 것이라 화가 난다. 원당마을은 옛날 도자기를 굽던 곳(민요지)이란 기록도 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뒤편 산골짜기에 있는 약새미물도 효험 있기로 소문난 물이다. 동네 뒤로는 여러 개의 봉오재(봉화재)가 있고 당산재 등 옛사람의 애환이 서려있는 소로잿길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됐다. 아래땀 뒤 넓은 산소는 충의위(忠毅衛)를 지낸 두재(斗齋) 안숙(安淑)공의 묘소이다.

동네어귀에 남정용(南廷容)공의 효심을 기리는 돌비가 서 있고 남씨문중의 모금재(慕錦齋)와 원강정(元岡亭)이 있다. 세 뜸에는 지금 남씨27집, 최씨, 김씨가 여남은 집, 전씨7집, 정씨 5집 등 모두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죽전리

대신마을

정곡면 소재지에 못 미친 지점인 진등재를 넘어서 왼편으로 제법 깊은 골안에 위치한 마을이 대신마을이다. 옛시절 화곡(禾谷, 화실이라고도 함)면에 속했던 곳으로 보통 대밭골이라 부른다. 법정동리상 죽전리(竹田里)에는 오암과 대신마을로 나누어져 있으며 맨 안 동네가 큰 골인데 20여호가 살고 조금 밑에 댓집이 살고 있는 동네가 새터다. 그리고 골의 초입 지점에 20여호가 있는 새 동네 그리고 동쪽 산자락에 7집이 있는 뜸이 대밭골이다. 대신이란 동명은 큰골은 한자로 쓰자니 큰대(大)로 잡고 그 다음으로 큰 뜸이 새동네라 새신(新)을 붙여서 대신으로 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맨 안쪽 골안에 위치한 큰골이면서 용덕면 용소로 통하는 산고갯길이 있는데 화실재(화실고개)다. 유곡(신촌)으로 통하는 소로는 작은딩이재(작은딩재)로 부르는데 이는 큰등이 아닌 좀 낮은 산등때라 작은 등을 딩이 또는 딩(뎅)등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생긴 지명인 듯 하다. 새터 동네에서 모팅이앞(화심)이나 오동골로 넘어가는 재는 오동재(오동골재)로 부르고 또 대밭골에서 중교쪽으로 통하는 소로는 학생들의 통학로서 사람들 왕래가 빈번했던 길로 막실음달재라고 한다. 산고개 넘어가 막실(지금은 정곡면 두곡마을)어귀가 되고 또 양지편이 아닌 음달쪽이라서 막실음달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골안 네 뜸 중에서 대밭골 동네가 가장 오래되었고 큰 동네였으나 대밭이 망하면서 사람들도 떠나버리고 지금은 일곱집이 살고 있다. 큰골 동네에 가면 서재터로 불리어 온다는 것이다. 화실재 바로 옆에는 불당골이라는 곳이 있으며 어른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절터라고 하며 해방직전까지도 탑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문헌에는 이곳에 사지가 있다거나 석탑이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마을 뒷산을 나부등(나비등)이고 앞산은 수박등이라고 부른다. 대신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가에는 효열부순흥안씨포행비(孝□婦順興安氏褒行碑)가 있는데 오동골에 살던 설병두(薛炳斗)공의 부인이라고 한다. 또 그 옆에는 증자헌대부공조판서(贈資憲大夫工曹判書) 겸오위도총관(兼五衛都摠官) 밀성박씨(密城朴氏) 운죽(雲竹) 박중로(朴重輅)공, 설송(雪松) 박동로 (朴東輅)공, 은월(隱月) 박취로((朴就輅)공 등 세분의 행적을 새긴 삼공포충비(三公褒忠碑)가 서 있다.(중로공과 취로공은 형제간이고 동로공은 중로공의 종제가 된다) 세분이 같은 시기인 영조 무신년(1728년) 정희량(鄭希亮)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동향인 이영무(□英茂)공과 함께 변란을 수습하고 괴수를 생포하는 등 큰 공을 세운지라 조정에서는 세분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화산사(華山祠)에 배향케 했다고 한다. 뜸으로 치면 네군데지만 밀양박씨가 가장 오래산 문중이고 지금도 25여 호가 살고 있고 김씨가 8집, 오씨가 6집, 등 45가구가 살고 있다.

오암마을

정곡면 소재지 못미쳐 진등재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법정동리명은 죽전리(竹田里)로 대신(大新)과 오암의 두 마을이 속해 있으며 오암동리에는 오동골(梧桐谷)과 덤밑(巖下, 암하), 모팅이땀(禾心)), 범꼬리(虎尾. 호미) 등 네 뜸이 속했는데 그중 큰 동네인 오동골과 덤밑 두 마을의 이름 첫글자를 따서 오암으로 정했다고 한다.

산고개 잿길이 높고 길다해서 진등재(長嶝峴 또는 長峴, 長峙) 바로 밑인데 호미마을까지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를 호두산으로 부르고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곳이 호미마을이라고 한다. 한길에서는 제법 깊숙이 들어앉은 맨 안동네인 오동골은 옛날부터 동네 주위 산자락에 오동나무와 개오동나무 등이 많이 자생하여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동네에 있는 설(薛)씨 문중재실의 현판이 오봉재(梧鳳齋)라니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이 마을 뒷산은 황산(봉산이라고도 부름)이다. 그리고 골밖동네로 모팅이땀은 산모퉁이의 동네라는 뜻인데 옛시절 화실이니 화곡(禾谷)으로 불리던 지역이고 이 동네가 화실의 가운데 지점이라고 화심(禾心)이란 지명을 붙이게 되었다는데 지금 9집이 살고 있다.

이 동네 앞 진등재 가운데 가장 깊은 골을 따라 남쪽 산허리를 돌아가면 남강물이 길게 굽이치고 더 넓은 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호랑이의 목덜미쯤에 해당되는 곳에 의령 여씨(余氏)의 시조인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내시고 고려에 귀화하여 의령군(宜□君)에 봉해진 여선재(余善才)공의 무덤이 있다. 또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 덤(큰바위) 아래에 작은 뜸이 있으니 덤밑으로 열댓집이 살고 있다. 한자로는 암하(岩下)이다. 그리고 상당히 떨어져 있는 범꼬랭이 동네 바로 호미(虎尾)는 긴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이고 강변마을이다. 지금 열댓집이 살고 있다.

이 동네 뒤편에 동남향으로 앉은 산자락에는 보공장군(保功將軍) 행용양위(行□ 衛) 부사직(副司直) 오한합(吳漢合)공과 숙인 강양 이씨부인의 합장 묘가 있는데 조선시대 종3품에 해당하는 무관벼슬을 지낸 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 마을사람들은 그냥 오정승묘라고 부르고 있었다. 묘역도 너르거니와 묘비와 크고 작은 문인상이 서 있다. 오정승묘에서 동북쪽 산중턱에는 병절교위용양위부사과(秉節校尉□ 衛副司果) 전공지묘(田公之墓)가 있다. 옛날 미창이(지금의 세간마을을 말함)에서 삼천석을 하는 큰 부자 전병준(田炳準)공의 묘소다. 어른들께서는 보통 「세간부재전사개」라고 하는데 이는 사과(종6품 무관벼슬임)란 벼슬이름을 부르면서 사개로 잘못 발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호미동네 뒤에는 임진왜란때 의병이 주둔하면서 도강하려는 왜병을 섬멸한 호미산성(토성)이 있고 강건너 함안으로 왕래하기 위한 강나루 호미진(虎尾津)이 있었다. 또 옛날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시회(詩會)도 열고 풍류를 즐겼던 관수정(觀水亭)은 튀락한 채 돌보는 이가 없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 동네에서 다시 돌아나가 산줄기의 중간지점에 해당되는 나직한 산고개를 넘어가면 우리고장의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탑바구(탑바위, 塔巖)가 있고 옆에는 불양암(佛陽菴)절이 있다. 이 탑바구는 남강변의 깎아지른 암벽위에 꼭 탑모양의 큰 바위인데 그 모양이 기묘하다. 멀리서 보면 용맹스런 장수가 강변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고 가까이 가보면 큰절마당에 서 있는 탑이거나 석등 같이 보인다.

꼭대기에는 파란이끼가 소복이 얹혀 있어서 깎아머리 동자승 같게도 보인다고도 한다. 이곳은 임란때 의병들이 진을 치고 강을 건너오는 왜적을 섬멸한 전승지의 한 곳이다. 바로 그 옆에 있는 불양암은 한동안 임자없이 되어 있다가 최근에 와서 말끔히 중수 하였다.

중교리

문곡마을

정곡면 소재지가 중교리(中橋里)인데 마을은 셋이다. 장내, 두곡, 문곡이 포함되는데 문곡은 조금 들어앉은 골마을이다. 어른들은 지금도「글골」,「문골」로 부른다. 서북쪽으로 제법 높은 도문산이 있고 산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있어 아늑하다. 장내마을과는 당산등이 경계를 짓고 있으며 동쪽「새밭골재」를 넘으면 석곡마을로 통한다.「막음창」이라는 깊은 골이 있는데 도문산 바로 밑이고 이 골짜기의 끝막이 지점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지금은 푸나무가 우거져 사람들 출입이 어렵게 된 묵은 터지만 옛날에는 10여호가 살았던 마을터였다. 「삼구정(三苟亭)」재실이 특히 유명하다. 삼대에 걸쳐서 학자를 배출한 벽진 이(□)씨 집안이 살았고 팔탄(八灘) 이재기(□在基)님께서 서당을 열어 많은 후진을 양성했던 유서 깊은 곳인데 지금은 「안골」「구골」로 부른다. 맨 안골이라 그런 지명이 붙었지만「구골」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아주 오래된 터라서 구곡(舊谷)이라는 주장과 구곡(苟谷)에서 비롯됐다는 양설이 있다. 양지뜸 뒤에「미륵골」(노인들 발음은「미루골」이었다)인데 옛날 큰절이 있었고 석불이 있었다고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정곡초등학교에 안치돼 있는 석불좌상 2기는 1925년 미륵골사지에서 발굴되었는데 머리와 어깨 등 손상이 심한 상태다. 고려 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85cm로 큰불상과 68cm의 작은 석불인데 등쪽에 넓적한 광배(光背)가 붙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방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정곡초등학교 구내에 안치 보존돼 있고 손괴된 부분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원상복원한 상태라 우리고장에선 귀중한 문화재다. 음지뜸 뒤 산줄기를「당산등」이라 부르는데 산자락에 당산이 있었던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에는 꼭 동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산밑에는 「문강재(文岡齋)」라는 상주 주(周)씨 재실이 있다. 옛날 큰선비였던 수재(守齋) 주시범(周時範)님이 서재로 쓰면서 글을 가르치던 곳이었다고 한다. 또 조금 밖에는 경주 이(□)씨로서 학덕이 높았던 이종분님이 서당겸 재실로 썼던「천심정(天心亭)」이 있다. 먼저 터잡아 살기는 벽진 이씨였고 그 뒤 경주 이씨와 상주 주씨가 들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 「문실 세성받이」라 말해 왔지만 지금은 10여성씨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총 40세대로 줄었는데 경주 이씨가 13가구로 대성이다. 벽진 이(□)씨가 8가구, 상주 주(周)씨가 4가구뿐이고 나머지는 김(金), 남(南), 강(姜), 최(崔), 임(□)씨등이 서너집씩이다.

장내마을

정곡면 소재지인 중교리(中橋里)에 속한 마을에는 문곡(文谷, 글골, 구곡)과 두곡(斗谷, 두실, 막실)과 장내 (墻內, 담안)가 있다. 중교를 흔히「중다리」로 부르고 있는데 이 중다리를 동네 가운데 있는 다리 때문에 중교로 고쳤다는 설명이지만 다른 유래가 있다. 중다리의 ‘중’은 가운데 또는 겹친다는 뜻으로 ‘中’또는‘重’이어야 하고 ‘다리’는 다리(橋)가 아니라 달(月)의 변음이라는 것이다. 결국 중달(中月 또는 重月)이란 말을 쉽고 편하게 부르면서 중다리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내(墻內 또는 牆內)는 원래 지명이 「담안」이다. 옛날 시대와 인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저 전하는 말로는 정경 벼슬을 했던 은진 송씨 부자 집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8촌까지 수십가구가 한 곳에 모여 살았으며 주위에는 돌담부랑(돌담)을 쌓고 있어서 담부랑안 담안이란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송씨 부자가 부치던 논밭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들 이름도 ‘정경들’이라고 부른다. 지금 두곡 못미처에 있는 곳이다.

동네 뒤로 ‘대안등’이란 산이 있고 동네 앞으로 큰 도랑이 흐르고 큰 다리가 놓여 있어서 중교(中橋)란 지명도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다. 동네앞 나지막한 산줄기가 뻗어 있는데 나부티고개다.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초등학교, 우체국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이 모여 있는 곳이라 시골 면소재지로서는 크다.

지금 정곡중학교 뒷산의 산골짜기를 ‘미륵골’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던 터였던 모양이다. 이 곳에서 1925년 당시 초등학교 학교장이 미륵골 사지(寺址)에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2기를 발견하여 현 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발굴과정에서 머리, 팔, 무릎 등 여러 곳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아주 귀중한 유물로 판명되어 경남도지정문화재(제6호)로 지정되었고 크고 작은 규격의 두 석불은 팔각연화대좌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미소를 띄운 얼굴모습에 등 뒤로 넓적한 광배가 돋보이고 있으며 작은 키의 불상은 법의를 걸치고 역시 미소를 띈 채 땅을 가리키는 손가락 등으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불상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마을 안에는 삼성그룹의 총수였던 고 이병철 회장의 생가와 별장이 있고 경주 이씨 문중의 강원재(江沅齋), 도계재(陶溪齋)를 비롯하여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란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지극한 큰 선비로 널리 알려진 화헌(和軒) 이종욱(□宗郁) 공을 추모키 위한 중화당(中和堂)이 서산 밑에 있다.

그리고 중학교 정문 옆에는 효자성균관생원(孝子成均館生員) 이종영지려(□宗榮之閭)라는 현판이 걸린 꽃집이 있다. 이 꽃집은 조선 선조 때 사마시에 오르고 임란 중에는 조상의 신주를 등에 업고 다녔고 병중의 부모님에게는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고 시병을 한 효자였다고 한다. 역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곽망우당, 성부사, 정동계선생과의 교분도 두터웠던 분이다. 선조 33년(1600) 조정에서 효자정문을 내렸고 헌종 13년(1847)에 도계서원에 입향 한 큰 선비라고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동네에는 은진 송씨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 여러 성바지가 들어왔다. 지금은 경주 이씨 25집, 의령 남씨 11집, 경주 최씨 10집, 그리고 강씨, 박씨, 정씨, 전씨가 댓집씩이고 오씨, 임씨가 서너집씩 모두 75호가 살고 있다. 의령의 중부지역 중심지인 정곡면 중교(중다리)란 지명은 특히 호암(湖巖) 이병철(□炳喆)회장의 고향 동네라 안팎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할 것이다. 그리고 소재지 못 미쳐서 나부태고개에서 서쪽으로 쑥 들어가면 문산사(文山寺)절이 있다. 높은 석탑과 연못이 있고 아담하고 정갈스럽게 보이는 절에는 비구승만 두 분이 있으며 절 건너에는 문산정(文山亭)이 있다.

두곡마을

정곡면 소재지 부근일대가 법정동리상 중교리며 그안에 중교, 문곡, 두곡의 세동리가 속한다. 지금의 두곡마을은 궁류가는 길로 조금만가면 제법 큰 마을인「막실」이 있고 거기서 비탈길로 조금 더 가면 길아래 나직한 골안 마을이 있는데「양징이」다. 요즘사람들은 「두곡」이고「양정」이라지만 옛날 지명은「막실(막곡)」과「양징이」였고「막실재」까지의 이 골짜기 전체를 그냥「막실」이라 했다는 것이며「양정」뜸은 재밑 양지편의 작은 동네란 뜻으로「양지」 「양징이」라 불렀다고 한다. 옛 기록상으로도 분명히 「막실(막곡)」로 돼 있는데 어느 세월 어떤 연유로「두곡(말실)」이 된 것인지 아는 이가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일제정리 때 어감상 좋지 않은 「막」자를 「말 두(斗)」자로 바꾸었다고 봐서 옳은 것 같다. 임란 때까지도 이 골짜기에는 인가가 없었던 지역이었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군사들이 진(陳)을 치고 여러 개의 병막(兵幕)이 세워지면서 이 골짜기 이름이「병막골」 「막골」이 되었다는 증언이 있긴 하나 아무래도 억지스런 점이 있다. 동남쪽만 열리고 두루 산인데다 서북쪽은 높은 산줄기가 가로 막은 채 길고도 험한 산고갯길인「막실재」(물론 요즘은「두곡재」라 부르기도 한다)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옛 어른들은 제법 넓으면서 깊숙하고 초목만 울창한 골짜기인데다가 큰 재가 앞을 막고 있는 지형 즉 큰골이면서 막다른 골짜기이라서「막실(막골)」로 작명했던 것이며 굳이 한자로 적자니 막(莫)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본동 바로 옆「담안들」이라 부르는 논도가리 몇 개가 있다. 흔히「담안너마지기」라고도 하는데 옛날 은진 송(宋)씨 큰 부자가 살던 집터라고 한다. 1천여평이 되는 터에 형제간이 한 울타리(담장)안에 살았고 돌담장을 높게 쌓았던 그 자리라는 뜻이다. 또 마을 옆「당산등」이라는 나직한 산등성이에는 송씨 선산이 있다하는바 정확한 시대는 몰라도 일찍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할 것이다. 동네에서 보면 앞쪽이 되는 위치에 조산과 큰 당나무가 있다. 비교적 덜 훼손된「조산껄」인데 다른 곳에선 보기 어려운 돌비가 있다. 「수구대장(水口大將), 화주채영석(化主蔡永石)」이라 새겨 놓았고 왼새끼 금줄이 썩은 채로 둘러져 있다. 「새몽골」조산이라 부른다는데 수살막이(수구막이)의 표석인 것 같다. 또「부선덤」이란 큰 덤바위가 있으며 그 곳 또한 집안에 재앙이 생기거나 부정스런 일이 나면 재를 올리고 비손하는 곳이란다. 그리고 재 밑 마을「양징이」뜸은 양지쪽 아늑한 곳이며 바로 앞에 저수지가 있다. 앞쪽에부터 시작되는 비탈 꼬불길이 한참 이어지는 막실잿길, 지금이야 포장길인데 그래도 위험한 고빗길인데 쑥 들어간「전골」에는 광복 후 지금까지도 탑이며 석물이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분명 옛절터라고 볼 수 있으며 골이름도「절골」이 변음돼서 불리어 진 것이라 여겨진다. 못밑「중간들」은 이 골안 중간지점에 위치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망주골」은 원거주지였다는 것이며 한 오십석 하던 집안이 살았던 곳인데 이곳을 떠나 버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큰 돌감나무가 있는 깊숙한 골짜기가「감남골」이다. 보도연맹가입자들이 처참하게 집단학살을 당한 곳이다. 마을 뒤쪽「약물덤」은 큰덤밑에서 맑은 약수가 솟아나는 곳이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운 물이 난다는 것이다. 이 두곡마을 안에는 경주최씨의 두계재(斗溪齋)와 경주 김씨의 재실이 있을 뿐 내 세울 문화유적은 없었다. 가장 처음 은진 송(宋)씨가 입촌했다고 보며 그 뒤 채(蔡), 최(崔), 김(金)씨들이 잇따라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최씨16집, 차씨 6집, 허씨와 이씨가 너댓집씩이고 정, 김, 임, 황, 강씨등이 두서너집씩이라 두땀을 보태야 41가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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