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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면(芝正面)
지정면 개요
지정면은 경상남도 의령군의 면이며, 의령군의 정동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창녕군과 닿아 있다. 동으로는 남지읍 앞으로 지나는 낙동강이 흐르고, 기강나루터를 기점으로 진주에서 흘러오는 남강과 합류한다. 현재 인구는 1,830명(2024년1월)이다.

지정면 역사
군청 소재지에서 동부쪽 26㎞ 떨어지고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있는 면이다. 따라서 두강을 끼고 창녕 함안과 접하고 강변평야는 근래 수리시설의완비 로 농사가 잘 된다. 채소와 수박농사는 유명하나 아직도 산간농촌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지산리와 정동리 일부였으나, 1914년 면 폐합시 이정동면과 지산면이 통합 되고 지정면이 되었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기강(岐江)은 임진왜란시 의령 의병이 왜적 무찌른 전적지로 유명하고 멀리 남지를 바라보는 강촌 풍경도 좋다. 한글학자 이극노 선생의 출생지이다.
지정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지정면 관한 법정리 10개
- 두곡리 득소리 마산리 백야리 봉곡리 성당리 성산리 오천리 유곡리 태부리
아래의 참고로 표시된 부분은 모두 [경상남도 의령군 홈페이지 읍면안내 지명유래]에서 가져왔습니다. 추가로 표시된 부분은 필자가 첨가한 것입니다.
두곡리 두곡마을
지정면 소재지에서는 동북방향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옛날 지산면에 속했던 듬실이 고유지명인데 뒷날 한자로 바꾸면서 두곡으로 했으니 뿌리를 가진 지명인 셈이다. 「듬」은 깊숙한 산골에 있는 땅 즉 도회나 읍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산간지역을 뜻하는 두메(두메산골)의 토박이 말이다. 면소재지에서도 한참 가야하는 산골짜기 동네일 뿐 아니라 두루 산줄기가 성벽처럼 둘러싸 있는 지역이다. 마을 주위로 매봉산, 두목산, 말덤이산, 절골, 탑골, 점 뒤, 서재골, 골안 등 산과 골짜기 지명이 엄청 많다. 골안을 따라 산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면 삼걸재라는 산고개가 있다. 양동, 박진으로 갈라지는 길목이라 삼거리를 이루는 재라는 말이다. 거기서 내려오면 삼산(三山)마을이 있고 그 다음 상두(上杜:듬실 웃땀), 중두(中杜:듬실 중땀), 하두(下杜:듬실 아랫땀)로 나누어서 부르고 있다. 웃땀이 고촌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구분없이 지산면의 듬실로 불렀고 지형을 보면 산줄기와 평지가 톱날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어 한자로 보면 들 입(入)자의 연속인 것 같아서 입곡(入谷)이란 별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매봉산에는 신선이 놀다간 큰 바위가 있어 신선덤이고 말 발자국같은 확이 있는 큰덤이 말덤이산, 옛날 작은 암자가 있었던 골이라 불당골, 탑이 있었다해서 탑골, 점뒤란 지명은 옹기와 토기 부스러기가 발굴된다고 하니 점터란 뜻인 것 같다. 부채를 편 것 같은 산모양이라는 광등산 서재(서당)가 있어서 서잿골로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산골짜기 작은 논도가리지만 송곳처럼 뾰족하다 해서 송곳배미, 장구모양으로 생긴 장구배미, 북처럼 둥글게 생겨서 북배미 등 재미있는 지명이 많이 남아 쓰이고 있었다. 세갈래 길이 있는 삼걸재 태부오척골로 통하는 오초골재(오척골재의 변음)가 있지만 삼걸재만 남아 있다. 삼산마을에 10가구, 웃땀이 22가구 가운데 땀이 20가구, 아랫땀이 20가구 등 모두 70여가구가 살고 있는 골안마을이다. 일찍이 김녕 김씨와 창녕 성씨가 살았다고 하는데 전의 이씨가 들어온지 10대가 넘었으니 300년이 더 된 세월인 셈이다. 지금도 전의 이씨가 65세대로 대성이고 정씨, 강씨, 김씨 등 타성바지는 겨우 한두집씩 살고 있다. 구한말에 생겼다는 일신학숙은 뒷날 지산 강습회로 변했다가 다시 두곡간이학교를 거쳐 지산초등학교로 발전했다. 1893년에 출생하신 고루 이극로(□克魯) 선생이 이곳 듬실 가운데 뜸에서 태어나셨다. 두남재(斗南齋) 지금은 경사재(敬思齋)로 바뀜)서당에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동네에는 전의 이씨문중의 경사재(敬思齋), 모원재(慕源齋), 석천재(石川齋), 영모재(永慕齋), 첨모재(瞻慕齋), 춘강재(春岡齋) 등 여러 채의 재실이 있는 유서깊은 고촌이다.
두곡리 관동마을
지정면 소재지서 남동쪽으로 약 10리 어린 거리에 있는 골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론 두곡(杜谷)에 속한다. 옛날 소지명은 「각골」「갓말(몰)」이라는데 이 마을 주위를 싸고 있는 산세와 지형이 양반이 쓰던 의관의 하나인 갓을 닮았다 해서 「갓골」로 부르다가 일제치하에서 한자로 표기하면서 관자를 쓰게 되었다.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것 같이 서북쪽에 등치 큰 산성산이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2백평 남짓하게 돌과 흙으로 쌓은 담부랑(담벼락) 흔적이 있는데 구전되는 바로는 임란 때 성지였다는 주장과 함께 봉화불(봉수)을 올렸던 자리라는 얘기가 있다. 문헌상으로는 봉수대보다는 난리 때 쌓은 토성이 아닌가 싶다. 이 산 바로 아래에 있는「골안」「웃땀」또는「상촌」이라는 뜸에 스무남집이 사는데 모두 밀양 손(孫)씨라 「손촌」「손땀」이다. 조금 아래쪽에「중땀」「중촌」이라고도 하지만 이곳도 「안촌」이라 순흥 안(安)씨 집성촌이다. 좀더 아래쪽에 「박촌」이 있다. 세 뜸 사이에 정자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정월 초사흘에는 온 동네가 정성을 드리고 동신제를 올린다. 산성산의 어깨에 해당되고「바잘기산」의 허리쯤에「삼걸재」또는「산성재」가 있는데 재너머가 삼산마을(삼걸땀)이다. 「바잘기산」은산모양이 바자리(발채) 모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산성산 동쪽 허리에는 「버드실재」또는「골목재」가 있어서 강쪽으로 있는 유곡마을(버드실)로 통하며 백산·박진과 신번장 나들이 잿길이다. 일제 때 토지측량의 기점으로 잡고 쇠말뚝을 박은「도구말」이 있다고 그대로 도구말산이라 굳어져 불린다. 그 산너머 마을이 성산못골이라 보통은「못골재」로 부르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산초등학교로 통학로였다고 한다. 「바잘기산」에는 큰 자연동굴이 있다. 10여년전만 해도 세 뜸 50호 넘게 살았으나 해를 바꿀수록 떠나버려서 겨우 38집이 살고 있는 한적한 산촌이다. 마을 어귀에는 「칠원윤씨효열비」가 서 있고 손촌에 문중 재실인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재실 안마당에는「효자증판결사병조참의밀성손공제단비」가 있다. 이 골마을에 먼저 들어와 살기로는 신창 표(表)씨로 보고 있으며 그 뒤에 손씨, 안씨가 들어왔다.
득소리 득소마을
옛날 이정동리(二正洞里)에 속한 지역으로 면소재에서는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골짝마을이다. 법정동리상으로는 득소와 독대마을이 포함되며 자연마을로는 득소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는 큰임지, 작은임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부르는 지명은「부소리」라고 하는데 문헌상으로는 이정동면의 화금동으로 돼 있다. 부소리의 유래가 바로 이 화금동(火□洞)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금의 글자 훈(뜻)을 따면「불쇠」가 되는데 쉽고 편하게 발음하자니 불의 받침소리가 생략되고 쇠의 이모음이 줄여져서 불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불쇠 부쇠 부소로 변음이 되어 굳어진 토박이 말인 셈이다. 이곳 사람들 얘기로는 화금동(부소리 또는 부소골)을 쓰는 동안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재수가 없는지라 한동안 정반대 되는 뜻을 가진 수어리(水魚里)란 소지명을 쓴 적도 있었다고 한는데 그 뒤 행정구역조정과 지명 정비때 득소라고 정했다고 한다. 산과 물과 볕이 자랑인 득소골짜기에서는 메신(집신) 메트리(미투리, 승혜)를 잘 삼는 사람이 많아서 이걸 내다 팔아서 가용에 보태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앵기배미와 돌채배미 등 재미있는 논들 이름이 있는데 흉년이 들자 병중의 부모님 봉양을 위해서 영계(새닭)한마리와 바꾸었다해서 앵기배미논도가리이고 논물을 댈 때 이 논을 거쳐서 아랫논에 물을 대게 되는데 첫도라기를 돌채배미라 고 한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짜기가 두곳에 몇집씩이 사는 작은 임지, 큰임지란 동네가 있다. 이 지명은 동네뒷산을 뒷갓먼당이라 부르는데 산꼭대기에 자연못이 있다고 한다. 보통은 산우못, 천지못 또는 등잔못이라고 하며 30평 남짓한 크기의 천연못이라고 한다. 큰 임지가 웃동네인데 한땐 스무남집이 살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 두집 뿐이다. 김해 김씨가 14대째 토박이다. 그리고 남서쪽 산모퉁이를 고래장터라 부르고 있는데 이 산밭에서는 오래된 듯 한 토기 등 유물이 발굴 된다고 한다. 작은 임지는 옛날 너댓집이 살았던 곳인데 근래와서 다 떠나버린 채 폐동이 되었다. 득소마을 오른편 높은 산이 산성먼당이고 그 넘어가 백야마을인데 산정상은 평평한 뻔덕(버덩)이라고 하며 돌담부랑(돌담장)이 조금 남아 있는데 이곳이 임진란때 의병들의 진지였다고 한다. 처음 파평 윤씨가 들어오고 그 뒤 김씨, 박씨, 최씨가 같은 시기에 들어 왔다는데 지금은 달성 서씨가 16집이고 김녕 김씨는 11집, 윤씨 9집, 조씨, 김씨, 박씨가 너댓집씩이고 이씨, 곽씨가 두어집씩 모두 60가구가 살고 있다. 동네에는 함안 조씨문중의 지산재(芝山齋), 달성 서씨의 덕산재(德山齋), 파평 윤씨의 도천재(陶川齋) 등 번듯한 재실이 여러 채 있다. 그리고 동네 앞에는 조종선(趙 璇)씨의 위생선적비(爲生善蹟碑)가 서 있다.
득소리 백야마을
득소마을에서 강변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동네다. 보통 부르는 지명은「쪽대」라고 한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꼭 천렵때 쓰던 대소고리(대나무소쿠리)나 싸리소고리(싸릿대로 만든 소쿠리)처럼 생긴 지형이다. 또 고기 잡을 때 쓰이는 족대처럼 오목하다해서 쪽대골로 불러왔다고 한다. 남쪽만 열린 채 동서북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가장 안쪽 산이 등잔설(등잔불)이라고 하며 동쪽산이 안산인데 등잔걸이(등경걸이, 등가)에 해당되는 지형이고 서쪽편 산줄기가 부엉덤산이다. 부엉덤산줄기 끝부분에 담양 전씨문중의 선대묘가 모셔져 있다. 부엉덤 끝부분은 반석인데 유암이라 각자를 해놓았다. 옛날 학자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네 조금 밑 사막골이라 부르는 뜸에는 셋집이 살고 있다. 옛 문헌에도 재현동화금동(在縣東火□洞)에 자기소(磁器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곳이 틀림없는 것이다. 사기골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은 주로 도자기를 구워내던 큰 굴이 있었던 곳이라서 사막골, 사기골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곳 지형은 벌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산언덕배미에 자잘한 밭이 있다고 산바꼴(산밭골)로 부르기도 했다고 하며 서쪽으로는 임지 먼뎅이(임지먼당)이란 산고개가 있고 또 동북쪽 산고개는 봉곡재먼당이라 부른다. 6.25전란 중에는 함박산 꼭대기는 북한인민군의 주둔지였다고 한다. 독대마을에는 처음 회산 황씨가 터 잡았고 그 뒤 순흥 안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사막골은 박씨와 탁씨가 살다가 떠난 뒤 윤씨가 살고 있다고 한다. 두 뜸을 다 보태야 18세대인데 안씨가 14집이고, 윤씨 3집, 남씨 1집인데 순흥 안씨 문중의 흥산재(興山齋)가 있다.
마산리 마산마을
지정면 소재지 봉곡에서 약 십리길, 동남쪽 남강변에 위치한 마산마을은 함안대산과 접경해 있다. 뜸으로는 본동네와「구야(굿배미)」그리고 서너집이 있는「둥굴매」등 셋인 셈이다. 옛 문헌에는 마산이니 마산나루라 하지 않고 「솔나루(松津)」로 기록해 있다. 그 뒤「솔섬(松島)」나루라 불렀고 다시 솔은 그대로 하고 끝자를 건널 도(渡)로 바꾸어 썼다는 것이다. 강나루 양쪽 동네이름이 다같이 「송도」였고 뱃나루마을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 때문에 의령쪽이 먼저 개명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솔섬이 된 연유는 장마철에 산코숭이 하나가 소나무 숲이 이루어져서 말그대로 소나무 숲의 섬(松島)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도나리(나루의 토박이말)가 되었고 물이 빠지면 섬으로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지라 강을 건너야 하는 나루터에 알맞은 건널 도(渡)로 고쳐서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마을 뒷산이 반월산(半月山)이고 강건너 마주보이는 산이「말대가리산(馬頭山)」인데 대마가 벌떡 선채 포효하는 모습이다. 배산임수인데다 강안 평야가 비옥하여 농수산업이 발달하여 소득수준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다.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밑마을이「구야(九夜)」다. 전래되는 촌명은「굿배미」인데 아무런 고증도 없이 취음으로 구(아홉), 배미는 밤(夜)으로 썼으니 역사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지명인 것이다. 아득한 옛날이 골안에 남평문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무듬이들이며 산전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아홉마지기(1800평)로 공교롭게도 아홉배미(아홉도가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홉배미 논을 일군 골마실이라는 뜻으로 아홉(구)을 줄이고 배미를 붙여서 마을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또 조금 안쪽 나직한 산줄기 끝자락쯤에「둥글미(둥글메)」로 부르는 작은 땅이었다. 새대가리처럼 봉긋한 산등에는 안씨 선산이 있고 바로 밑에 퇴락한 제각 남호재(南湖齋)가 있다. 옛날 서당이 있던 자리가「서잿골」, 칼모양의 산세라「칼등」, 천지개벽 때 이불보만하게 남아서「이불보산먼데이」, 포외로 통하는 「대밭고개」, 성당쪽 잿길은 허연색의 토질이라서 「흰재머리」, 박씨일문이 잘 살면서 기와집만 있었대서「재주굼턱(재집굼턱)」도 있다. 세 뜸을 합하면 90가호니 큰 마을에 속한다. 문(文)씨가 맨 먼저고 이어서 밀양 박(朴)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인천 이씨 31집, 밀양박씨 12집, 김씨 6집, 서·임·구·전씨 등이 서너집씩이 살고 있다. 마을 안에 원모재(遠慕齋 ·이씨문중), 금산재(衾山齋·박씨문중)가 있고 길가에「박효유인달성서씨표적비」가 있다.
마산리 돈지마을
지정면 마산리(馬山里)에 돈지라는 강변마을이 있다. 면소재지에서는 사오리길인데 좁고 어지러운 흙길이다. 옛 문헌에는 이정동면(二正洞面)에 속했고 돈지진(遯池津)으로 우리고을 14곳 나루(뱃나루)중의 하나로 돼 있다. 독음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한자표기가 달라졌는데 어느 때 무슨 연유로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숨어 있는 나루터라서 그런 지명이 붙은 것 같다. 「황새등」「먼당산」이라 부르는 산줄기가 강쪽으로 뻗어 있으며, 강물에 물린 산자락을「가매등(가마등)」이라 부른다. 황새가 고동을 쪼아 먹고 날개를 편 채 날아오르는 형상이라서 황새등이고 마을 뒷산을 먼당산이라 하며 가매등은 혼례 때 새각시가 타는 가마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진 것이다. 당산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안몰(안마을)」과 「바깥몰(바깥마을)」이다. 이곳 사람들의 발음대로 하자면 안마을을「아물이」바깥마을을「배껏몰」또는「배껏몰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통으로는 바깥땀을 「한심이」(한시미로 들림)로 통한다. 퍽 재미있는 촌명(村名)인데 그 연유 또한 깊다. 마을 어귀에 나지막한 산고개가 있는데 「한심이고개(재)」다. 그 고개에 서면 동남쪽으로 길게 흐르는 남강이 보이고 강변들이 넓다. 약 9만평에 달하는 기름진 이 들이름도 「한심이들」이다. 옛날에는 겨울과 이른 봄 서너달을 빼고는 상습적으로 침수하였고 온 마을 사람들은「가매등」과 고갯마루에 모이게 되고 땀 흘려 지어놓은 논밭농사가 흙탕물에 잠겨 있는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긴 한숨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땅이 꺼져라고 쉬는 「한숨」, 우리지방말로는「한심」이라, 마을이름, 들이름, 고개이름까지「한심」「한심이」가 붙게 된 것이다. 안마을이 열대집, 바깥땀「한심이」가 열서너집이다. 임란 때 승전지인 거름강( 江)까지는 뱃길로 오리쯤이고 강 건너 함안 장포나루가 보인다. 안말로 통하는 나지막한 산고개를 「재먼당」이라고 부르며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서 있다. 얼마전까지 있었던 조산도 없어졌고 동신제도 안 드리는데 마을에 큰 일이 생기거나 멀리 출타하는 노인들은 새벽에 잔을 올리는 풍습을 그대로 지킨다고 한다. 가장 앞서 남원 양(□)씨가 들어왔고 그 뒤를 이어 밀양 박(朴), 경주 이(□)씨가 정착하면서「두땀」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경주 이(□)씨가 5세대, 김해 김(金)씨가 3세대, 능성 구(具), 순흥 안(安), 청송 심(□), 밀양 박(朴)씨 등이 두세대씩 두 땀 다 보내야 27가구뿐이다.
마산리 포외마을
지정면 소재지서는 동남쪽 약 십리길, 행정구역상 마산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낙강이 가깝고 낙동강은 좀 떨어져 있는 들녘 마을이다. 이 동네 앞 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큰 내가 있는데 「큰내」또는「갯도랑」이라 부른다. 이 도랑을 경계로 해서 안쪽은 「개안」바깥쪽은「개밖」이라 부르면서 동네이름도 「개밖골」「개밖몰」이 된 것이라 한다. 「개(浦)」란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 또는 물이 흐르는 가장자리를 뜻하는바 소지명에 많이 쓰이고 있다. 「골」은 그대로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라「실」과 같이 흔하게 볼 수 있고「밖」은 바깥(外)이며 「몰」은「말」과 같은 의미로서「마실」「마을」과 동의어로 지방 토박이말이다. 결국 「개밖몰」은 세 개의 순우리말이 포개진 복합어인 셈이다. 다섯 뜸의 본동이랄 수 있는「가운데굼티」고 나트마한 산등성이 너머에「박굼티」「신굼티」「안굼티」그리고 저만치「대롱골」이 있다. 「가운데굼티」옆「솔밭등」은 박씨들 선산인데 숲이 좋아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돼 있다. 한참 떨어진 강 쪽에 불쑥 솟은 산이「백두산」인데 보통 「백도산」이라고 발음한다. 본동 옆으로 나직한 산줄기가 남서로 뻗었는데 보통「돌은재」「도른재」라 한다. 산모퉁이 따라서 길이 나 있고「안골」로 이어진다. 백두산자락 깊숙한 곳에「박굼티」,「돌은재」를 돌아가면 안골에「안굼티」, 바깥쪽에 「신굼티」란 작은 뜸이 있는데 모두 성씨를 그대로 붙인 것이니 박씨촌, 신씨촌이란 말이고 맨 안쪽 뜸이라 「안굼티」가 된 것이다. 「대롱골」이 좀 색다른 지명인데 지형상 대롱처럼 솔직한 골짜기라서 그런다는데 옛날엔 10여호가 살았다고 한다. 이 동네도 강둑이 막히지 않았던 시절에는「물굼티」였다고 하며 장마철이면 길이 막히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물이 드는 그 시절 마을 뒤에 큰 늪이 있었다. 「주율늪」「주룰늪」등 정확한 이름을 모를 정도다. 이곳 어른들의 설명과 필자 나름의 생각을 보태어「줄늪」이란 말이 변음 되면서 굳어진 말이 아닌가 싶다. 「줄」은 연못이나 물가습지에 자라는 구황작물이며 도동이를 만들던 다년생 풀이다. 먼저 들어와서 살기는 밀양 박(朴)씨고 지금도 16집으로 가장 많다. 평산 신(申)씨 10집, 능성 구(具)씨 8집, 여양 진(陳)씨 4집, 그리고 여(余), 최(崔), 이(□)씨등 한두집 씩으로 50여세대가 살고 있다. 박씨문중이 경모재(景慕齋), 신씨의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백야리 백야마을
옛시절 이정동면(二正洞面)지역이고 법정동리로는 이동네와 다안마을이 포함된다. 보통으로는「배애골」로 부르는데 한자로는 학동(學洞)이니 백동(白洞), 백야(白也) 등 여러 가지로 쓰고 있다. 동구 밖 정자에 자연석 비가 있는데 현동삼십리학동(縣東三十里學洞)이라 새겨져 있다. 순흥 안씨의 고총비문에도 정동(貞洞)으로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옛 문헌에도 백야리고정동리(白也里古正洞)란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지명의 변천이 심했던 곳이라 할 것이다. 이 마을은 골안이지만 제법 너른 지대로서 뒷산이 큰 덩치의 성산먼당(산성먼당)이다. 그리고 갓등, 소미꾸지먼데이(먼당), 양지등(양아등)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웃땀(웃말), 중땀(가운데말), 아래땀(아랫말) 등 세뜸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구에 숲이 있는 곳을 조산꺼리(조산껄)이라고 한다. 지서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덕껄이고 이십여년전에 옹기그릇을 굽던 가마굴이 발견된 지점은 감골로 부르고 있다. 성터 쪽으로 제법 높은 산고개는 이 동네서는 정골재라 하고 산너머 사람들은 배애골재로 부르고 있다. 중땀 동네 뒷산에는 큰 규모의 고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저 고래장터로 부르고 있으며 광복 후 도굴꾼에 의해서 여러 차례 파헤쳐졌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출가한 분들의 택호는 학동댁과 백동댁으로 부르고 백야댁, 배애골댁으로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을 앞 다리옆 술주막이 있었던 논들 이름이 개바구들(게바구로 들리기도 함)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개모양의 자연석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에 맨먼저 들어온 사람은 순흥 안씨이고 이어서 경주 김씨, 진양 강씨 등 여러 성바지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 경주 김씨가 17집이고 김해 김씨 2집, 김녕 김씨, 함안 조씨 담양 전씨, 안악 이씨, 파평 윤씨, 함안 이씨 등은 한두집씩으로 다해야 30가구가 살고 있다,
백야리 다안마을
지정면 소재지서 약 10리길로 송도나루(마산마을)나 성당마을을 지나서 가는 길이 있다. 마을 바로 앞 동남쪽으로 길게 남강이 굽이쳐 흐르고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가 마을 뒤쪽을 감싸고 있다. 한때「하백야」(발음으론「하백이」)또는 「아랫백야」로 불린 적이 있는데 아래 하(下)의 뜻이 좋지 않아서 싫어했다. 초겨울이면 강변에 수백마리의 기러기(토박이말로「기리기」다. )가 날아오는 곳이라서 다안(多雁)인데 보통 「다안이」라 부르는 곳이다. 강나루 이름도 둘이다「미나리나루」와「다안이나루」인데 서로 건너쪽 마을이름을 붙인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잉어회가 유명했고 월척이 넘는 게 많이 잡혔지만 댐이 생기고 공장 폐수가 유입되면서 물도 탁해지고 고기도 안잡힌다는 것이다. 마을 들머리 제법 깊숙한 골이 있는데 「옹싱이골」이란다. 일설에는 옛날「옹구골(옹기굴)」이 있었던 곳이라는데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땔나무 하러 나무꾼이 모이던 「갓골짝」(「갓」은 산을 뜻함),「도갓골」, 당산나무가 있고 해마다 동신제를 지내던 「시인골」은 신령스러운 골짝이란 뜻이란다. 마을 앞 강변들을「모래빙이」라 부르고 있다. 뒤산 고개를 넘으면 정곡면 적곡마을이며 가막산이 가깝게 보인다. 마을을 나와 적곡쪽 강변에 높은 덤이 있고 어지러울 정도의 절벽이 있는데 중간쯤에 큼직한 자연동굴이 있는데 그것이 그게 「구녕바구」다. 살펴볼 문화유적은 별로 없었지만 촌락이 형성된지 퍽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鄭)씨가 서너집이고 박(朴), 손(孫)씨가 한집씩이다. 김해 김(金)씨가 가장 먼저 들어와 살았다는데 지금도 19집으로 대성이다.
봉곡리 신기마을
법정동리로 봉곡리에 포함되는 마을이다. 고촌이 아니고 새로 생긴 곳이라서 새터로 불렀다고 한다. 지명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새터일 것인데 한자로 쓰면서 대부분이 신기로 했고 더러 신촌(新村), 신평(新坪), 신산(新山) 등이다. 마을 뒷산이 가락등이고 남쪽을 가리는 길쭉한 숲이 있었는데 길 내고 경지정리 등으로 없어지고 조금 남아있다. 가장 위쪽에 있다고 웃새터(새터웃말), 아랫새터로 나누어져 불리고 있는데 마을 뒤로 산길(임도)을 냈는데 버드실(유곡)과 잣골(백산), 양금이(양등) 동네로 통하게 되는 길이라고 한다. 아랫새터에 아담한 교회가 있으며 동네 뒷편에는 온통 대밭이다. 앞산에 포수골이란 산골짜기가 있는데 이 산에는 동신의 대상인 신목이 있다고 하며 동네서는 사냥을 하거나 살상을 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금기지역이라고 한다. 신창 표씨가 먼저 자리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전의 이씨16집, 그리고 강씨, 구씨, 최씨, 안씨 등 여러 성바지가 한두집씩으로 모두 33가구다.
봉곡리 나림마을
지정면 소재지 마을이 나림인데 법정동리명은 봉곡(鳳谷)이다. 시대적으로 상당히 오래된 지산(芝山)지역이라고 하며 동녘에 자리 잡은 두월(斗月)과 조금 더 떨어져 있는 당성곡(堂城谷)이 나림에 속하는 협동이다.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네 서북쪽의 큰 산이 고동산 즉 나산(□山) 또는 나산(□山)으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산꼭대기에는 50여평 정도의 산정호수가 있다. 산도 좋고 동네숲도 좋아서 나림(□林)으로 고쳤다는 설명이다. 양산이니 뒷동산으로 부르는 것은 이 고동산의 줄기인 셈이다. 지금은 여러 기관이 몰려 있는 면의 중심지로서 날로 번창하는 동리라고 한다. 협동인 당성곡은 한길에서 조금 들어 앉아있는 마을인데 스무남집이 살고 있다. 원래 솔직한 골안이라서 가는 골(細谷)으로 부르다가 다시 당산나무라고도 하고 동네숲이라고도 말하는 나무가 울창해서 당산골로 불렀는데 당산과 무당을 연상하게 되어 당성골로 고쳤다고 한다. 동네 뒤편 큰골이라는 곳에서는 토기 등 옛날 유물이 간혹 발굴된다고 한다. 소재지에서 가까운 말월마을은 지금 열집이 사는 작은 뜸인데 한자로는 두월로 쓰고 있다. 옛 기록에는 말리 즉 끄트머리 동네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동네 생김새가 꼭 말(곡식의 양을 헤아리는 큰 그릇)안에 들어 있는 것 같은 지형이라는 것이다. 동구 밖에 있는 새미(샘)는 웃동네 사람들까지 이 물을 길러 갔다고 하며 동네 주위의 들 이름에는 덤드름들과 밤낮들이라고 부르는데 논 한마지기(200평)마다 웅동(웅덩이) 한 개씩이 있었을 정도로 수리가 좋지 았았고 여름농사 때면 밤낮으로 드리(드레, 두레)로 물을 퍼올려야 했기 때문에 밤낮들이 되었다고 한다. 소재지 큰 정자나무 바로 옆에는 남농(南 ) 박진목(朴晋穆)공, 의사(義士) 김문옥(金文玉)공의 독립운동기념비가 있고 또 꽃집에는 안무상(安武商) 면장님의 송덕비가 서 있다. 재일교포로서 향토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의당(宜堂) 박중석(朴重錫)공과 이시돌(□時乭)공의 송덕비도 있다. 지정 봉곡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나림하면 얼른 아는 분이 적다. 처음에 파평 윤씨와 신창 표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상으로는 진양 강씨와 순흥 안씨가 오래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진양 강씨 30집, 순흥 안씨25집, 담양 전씨가 21집, 구씨, 김씨가 열서너집씩이고 이씨10집, 박씨, 성씨 등도 한두집씩으로 124가구가 살고 있는 큰 동네다. 진양 강씨 문중의 경송재(景松齋), 연안 이씨의 봉림재(鳳林齋), 순흥 안씨의 추모재(追慕齋), 능성 구씨의 숭의재(崇義齋), 순흥 안씨의 의우정(宜友亭),등 여러 채의 정재가 있다. 이 동네의 지명유래를 찾으면서 생각나는 말이 있다.
성당리 성당마을
지정면 소재지에서는 남서쪽에 위치한 강변마을이다. 역시 이정동면 지역으로 마산(지정의 마산마을)과 이웃해 있고 옛날 성당진이 있었다는 문헌기록이 있다. 그리고 앞이 강인데다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꼭 도성을 쌓아 놓은 것 같이 돼 있어서 천연요새같은 지형이라서 성당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성처럼 산이 에워싸고 있는 마을터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자그마한 당집이 있었다고「잣당(작당)」이란 지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동네 끝지점의 골짜기 이름이 잣당골(작당골)인데 그 위의 산고개가 뒷재 또는 쇠실고개로 부르고 있다. 이 산고개는 당성곡과 소재지쪽 나들이 길이고 또 새장고개는 소재지에 새로 서게된 장(시장 또는 장터를 말함)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라고 한다. 산자락따라 길쭉하게 들어선 동네터는 강쪽을 향해서 활모양인데 기독교 교회당과 천주교의 성당이 함께 있다. 동네 뒷산이 뒷먼뎅이(뒷먼당) 앞쪽이 당산이고 동네 어귀 정려가 서 있는 곳을 비치껄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명종(1553년)때 출생하여 선조때 무과에 급제 승지겸 훈련원봉사를 지내고 나중에 병조참판을 증직 받은 분으로 임란중에 화왕산성 싸움과 이곳 성당진싸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순절하신 분인데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책록 되어 정려를 내리니 이곳에 있는 충절각이다. 선묘조원종공신(宣廟朝原從功臣) 행도승지증가선대부병조참판(行都承旨贈嘉善大夫兵曹參判) 경주정응룡지려(慶州鄭應龍之閭)라는 현판이 걸린 꽃집인데 왕명으로 세운 것이다. 이 묘 뒤쪽으로 약 7미터쯤에는 통정대부행돈령부도정(通政大夫行敦寧付都正) 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광주이공지묘(廣州□公之墓)라 새겨진 비석과 함께 이가회(□嘉會)공의 묘가 있다. 이 마을 앞에는 춘초처사밀성박공지유사비(春樵處士密城朴公(敏熙)之遺思碑)와 의당박중석씨위선공덕비(宜堂朴重錫氏爲先功德碑)가 서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 마을에서는 군내에서는 처음으로 카톨릭농민회(약칭 카농이라 했음)가 조직되어 농민의 권익신장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가장 먼저 경주 정씨가 들어왔고 그 뒤 담양 전씨와 밀양 박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밀양 박씨가 71집으로 박촌이라 할 수 있게 되었고 김해 김씨가 7집, 경주 최씨가 3집, 차씨, 강씨, 곽씨, 문씨 등이 한두집씩으로 모두 92가구가 살고 있다.
성산리 성산마을
지정면소재지에서는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되는 지역이다. 임난때 의병이 왜적을 무찌른 전승지로 유명한 거름강나리(기강나루, 岐江津)가 있는 마을이라 성산이란 지명보다는 기강나루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동네 어귀의 나직한 산고개가 남재(南峴)고개이고 남재너머가 성산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명유래는 간단하다. 산성산(山城山) 밑에 있다해서 앞의 산(山)자만을 빼고 성산으로 정했다고 한다. 어른들의 얘기로는 회정(槐亭 보통 발음은 해정으로 들림) 즉 아주 오래된 홰나무가 동신목이면서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여 회정말(회정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또 화동(花洞)이라 불렀던 적도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괴화(槐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홰나무의 꽃(회화꽃이라고도 함)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지명을 쓴 것 같다. 성산마을은 남재를 넘어 왼편 산밑에 있는 듬이 안땀(안동네) 또는 본동이고 들가운데 있는 뜸이 하동(아랫동네, 들가운데)이며 꼬까실이란 뜸은 단 두집만 살고 있다. 옛날 강둑이 없던 시절에는 안땀 바로 앞으로 강물이 흘렀다고 하며 지금 넓직한 들판은 무듬이땅이라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산마을은 특히 농악(매구치기 또는 풍물)이 유명하며 제1공화국시설 1948년 전국농악경연대회때 1등을 수상하였다. 상매구쟁이(상쇠)는 성도 연씨였고 성산매구는「쌍쌍여덟 버꾸놀음」(버꾸란 자루가 길게 달린 작은 북인데 소구(작은북)와 비슷하지만 약간 큰 규격임)이 장기였다. 보통 상쇠1명, 중쇠 1명, 징 2개, 북 2개, 장고 2개 등 8명으로 패를 이루지만 특별한 놀음에서는 행모 8명, 진사 1명, 테포시(포수) 1명, 새각씨 2명, 깃대잡이(기수) 1명, 피리 1명 등 21명으로 이루어져야 옳은 매구놀음이 된다고 한다. 동구 저만치 남재에는 창효각(彰孝閣)이 있다. 청주 이씨로 자는 경언(景彦) 함자는 경일(景一)공인데 영조(1737년)때 출생하셨고 평소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순조때 왕명으로 정문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남재먼당 소자각(효자각)이란 말이 지명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여행차가 이 남재를 넘으려 하면 난데없이 큰 뚜끼비(두꺼비)가 나와서는 길을 막았고 상두꾼들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온다. 그래서 하마현(下馬峴)이니 두끼비고개란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산모퉁이를 돌아나오면 임란때 나라안에서는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거룩한 충적을 기리는 충익공 곽재우 장군의 보덕각이 서 있다.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 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 보덕불망비(報德□忘碑)가 근엄하게 서 있다. 그 옆에는 역시 부자가 나라를 위해서 순절하게 된 후지당(後知堂) 손인갑(孫仁甲)장군과 손약허(孫若虛 또는 若海)공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가 서 있으니 쌍절각이다. 이곳 언덕 바로 밑은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거름강나루터다. 본동이 45세대, 하동이 65세대, 꼬까실 2집 등 모두 112집이라 큰 동네이다. 처음 밀양 박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박씨 28집, 손씨, 안씨가 15집, 하씨. 이씨가 9집씩이고 김씨가 5집, 그리고 강씨, 조씨, 배씨 등이 한두집씩이라고 한다.
오천리 오천마을
옛 지산(芝山)의 온내 또는 오내로 부르던 동네다. 갓등과 주개등 산이 동서북쪽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이 열려서 우선 따뜻해 보이는 자리다. 임란 후에 생긴 마을이라 하며 옛날엔 골짝도랑 건너편에 오동나무 숲이 썩 좋았고 또 산자락 밭언덕 같은데도 오동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이 동네서 자란 처자(처녀)가 시집 갈 때면 이 오동나무 두 세그루만 하면 좋은 장롱 한바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 오목한 지형인데 배수가 잘 되는 곳이라서 오동나무가 잘 자라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오동골로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지명 정비때 오천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서쪽으로 아주 나이 많은 큰 정자나무가 몇 그루 남아 있는데 옛날엔 동숲이 아주 무성했다고 하며 큰골, 절골, 부치골, 안산골 등 여러 산골짜기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절골에는 옛날 제법 큰 절이 있었다고 하며 부치골에는 애기부처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고 한다. 절골 산고개를 넘으면 삼산과 세간, 태부쪽으로 통래하던 잿길인데 자모리고개라고 부른다. 이 지명은 아득한 옛날 천지개벽때 온 천지가 물속에 잠겼을 때 이 산먼당 고개까지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잠겼다해서 몰에 자물다(잠기다)는 뜻이라고 한다. 갓등의 갓은 머리에 쓰는 의관인 갓을 뜻하는 것으로 이 산은 옛 시절 나무꾼 풀꾼들이 모이는 나무보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과 제법 떨어진 동네가 무넘이 마을이다. 요즘은 수월(水越)이란 지명을 쓰는데 고유지명을 한자화 한 것이다. 이 작은 마을은 바로 앞으로 샛강이 있을 뿐 아니라 우기만 되면 강물이 범람하는 무듬이지역이고 마을 앞 나직한 똥매고개가 물에 잠기는 예가 허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넘어가는 산고개라는 뜻에서 무넴이(무넘이, 물넘이) 또는 수월치가 된 것이다. 지금 스무남집이 살고 있다. 지금 두마을에는 40여호가 있는데 여양 진씨가 20집으로 가장 많고 전의 이씨가 8집, 김해 김씨가 5집이고 강씨, 손씨, 안씨, 박씨 등은 겨우 한두집씩이다. 오천마을에는 여양 진씨 문중의 오산재(梧山齋)가 있다.
오천리 웅곡마을
행정구역상으론 오천리에 속하고 소재지에서 약 오리길이 어리다. 옛날 지산(芝山)구역으로 「숲골」이라 불렀던 마을이다. 숲이 좋은 마을이라서「숲골」이었는데 경음화되는 속성 때문에 「쑵골」로 부르게 되었고 받침 피읖 소리가 원래 소리 값을 잃으면서 그만 「쑥골」로 변해 버린 것이라고 한다. 그 뒤 한자표기를 하면서「쑥(숙)」은「숫놈」「수컷」이란 토박이 말로보고 웅(雄)으로 썼다는 것이다. 마을 뒤 산중허리에 있는 식성군(이운용 □雲□ )묘비에는 이곳 지명을 웅산(雄山)으로 적고 있어「숲골」과「숫골」「숫뫼」중 어느 것이 먼저고 나중인지 확실치 않다. 지금도 4백년은 넘었다싶은 큰 느티고목 두 그루가 남아 있고 이곳을「정자껄(정지껄)」로 부르고 있다. 군지정 보호수인 이 나무는 신목(神木)이라서 동신제를 올린다. 마을은「골안」과「새터」두뜸인데 양지바른 남향받이며 뒤로는 부드러운 산줄기가 침풍을 둘러 친 듯 감싸고 있다. 뒷산은 「뒷재」라고도 하는데 「당재」다. 이 고개에서 오천과 두곡마을로 가는 소로가 나 있고 옛날엔 당집과 조산 그리고 신목도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뒷산에서 남향으로 흘려 내린 산등성이에는 큼직한 묘와 함께 망주 무석인(武石人) 묘비 등 석물도 돋보이게 갖추어져 있다. 「증병조판서임효충장의 선무공신삼도수군통제사식성군이공운용지묘」 (贈兵曹判書任效忠仗義宣武功臣三道水軍統制使 息城君□公雲□之墓)라고 적혀 있다. 경북 청도사람으로 임란 때 크게 활약하여 대공을 세우신 분이다. 식성균모 바로 밑에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 증통훈대부 장악원정밀성 손득원(내외분)묘(御侮將軍 行□ 衛副司果 贈通訓大夫 掌樂院正密城 孫公諱得元之墓)」도 있다. 산자락 언덕에는 식성군의 신도비와 함께 위패를 봉안 한 채 향례를 올리는 기강서원(岐江書院)과 충양사(忠讓祠)가 있다. 이 마을에는 먼저 신창 표(表)씨가 살았고 뒤이어 순흥 안(安)씨가 들어 왔지만 두 문중은 한집도 없다. 「새터」10집, 「골안」을 합해 모두 60세대가 사는데 진양 강(姜) 20세대, 밀양 박(朴) 15, 성산 이(□) 13, 김해 김(金) 7, 황(黃), 배(裵), 이(□)씨등 두서너집 씩이다.
오천리 상촌마을
지정면소재지에서는 상당히 먼거리에 위치해 있다. 바로 낙동강 큰물이 보이는 마을이다. 역시 지산면이 기부골 또는 구부골로 부르던 동네인데 어떤분은 부녀자들이 삼배와 명베 등 베를 많이 짜내는 마을이라고 기부(機婦)골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기부나 구부란 말은 거북(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구복(龜伏) 또는 구동(龜洞) 즉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지형이라서 그런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한 지역의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상촌(上村)으로 정했다는 바 개악한 지명이다. 이곳 상촌은 아래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날부터 자연늪이 있었으며 물이 들때는 동네사방이 물이었다고 한다, 어른들의 중언에 따르면 지곡(池谷), 연동(淵洞), 지동 등의 지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동네 서쪽 산고개가 뒷재니 뒷고개라 하는데 관동으로 통하는 잿길이다. 이 두 동네 뒤에는 큰 덩치의 산성산(山城山)이고 앞쪽으로는 낙동강의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강나루를 건너면 창녕땅이고 창아지나루다. 산성산 꼭대기에는 1,000여평(논다섯마지기 정도라고 함)의 너른 번득(버덩의 토박이말)이 있고 석축 혼적과 함께 고총이 있는데 이곳은 임란때 의병의 훈령장겸 산성을 쌓고 도강하는 왜구를 무찌른 의병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이 동네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청주 이씨로 당대 천석꾼부자가 생기기도 했고 그 뒤 영산 신씨가 들어왔지만 보리천석 정도는 해도 큰 부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 뒤 김녕 김씨가 돌어와서 살림도 늘고 자손이 번영하면서 김촌이라 부를 정도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이 마을 김형기씨댁에는 소중한 문화재를 갖고 있는데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선생(先生)이 시호교지. 김문기자현대부이조판서(金文起資憲大夫□曹判書) 겸 지경연의금부사 (兼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題學) 동지성균관춘추관사(同知成均館春秋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浮都摠管), 증시충의공자(贈豺忠義公者)라고 쓰여 있는 홍패교지를 보존하고 있다. 건륭(乾隆 43년)에 내린 것이니 1778년 지금으로부터 221년 전의 유물이다. 이 마을에는 유일하게 청주 이씨의 추사가 있는데 삼수정(三秀亭)이다. 지금 이 동네에는 김녕 김씨가 35집, 김해김씨 4집, 청주 이씨 5집, 이씨 3집, 최씨, 신씨, 박씨가 한두집씩 모두 55가구인데 못골에는 8가구가 살고 있다
유곡리 유곡마을
법정동리상 유곡리에는 유곡 백산(잣골), 양동(양굼)마을이 포함되는 큰 구역이다. 옛날에는 양(羊)구(九)동(洞), 일유곡동(一□谷洞), 이유곡동(二□谷洞)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옛날의 지산면 버드실로 알려졌던 곳으로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버드나무 가지에 꾀꼬리가 둥지를 틀고 사는 유지앵소(□枝鶯巢)의 지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동네는 골안과 음달, 양달 등 세 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이 가깝고 지대가 낮은 곳이라 버드나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하며 동네 뒷산을 갓재라고 부른다. 고분군이 많이 있는 백산고개에서 보면 강변쪽 낮은 지대가 유곡마을이며 강둑이 없던 시절에는 침수가 되어 재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동네 앞에 오룡대(五龍臺)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지형을 보면 사방에서 산줄기 다섯개가 들을 향해서 길게 뻗어 있다.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서로 다투고 있는 지형이다. 그래서 들이름도 오룡대들로 부른다고 하며 주위에는 땅버들 숲이 우거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네앞들 가운데는 사철 청정수가 솟아나는 큰 새미가 있다고 하며 오룡대들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이 들에는 무와 배추가 잘 되는 곳이다. 동네 뒤 서재골에는 옛날 진(陳)씨 학자께서 한문서당을 열어서 글을 가르쳤던 곳이라고 한다. 옛 문헌에는 운암당(雲岩堂) 고사찰허(古寺刹墟)라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성수산(聖壽山) 운암사(雲巖寺)가 있던 그 자리인지 잘 모르겠다. 이 마을에는 여양 진씨(□陽陳氏)가 터 잡은지가 400년이 넘었다고 하며 지금도 타성바지는 한두집씩 뿐이고 진씨가 25집이 살고 있다.
유곡리 양동마을
행정구역상으로는 유곡리에 속하며 옛날 양구란 지명을 쓰기도 했던 마을이다. 보통으로는「양굼」「양곰」이라고 했던 동네인데 마을이 두 뜸을 이루고 있으며 굼턱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큰 방천따라 길이 나 있고 안땀과 웃땀 그리고 바깥땀 등 세 뜸으로 이루어진 동네지만 옛날에는 양쪽으로 마주보면서 뜸이 형성돼 있어서 양쪽굼티기 동네라서 양굼티라거나 양곰티란 지명을 썼다는 것이다. 삼걸재 바로 밑에 두집이 있는 곳은 재막골이라 하는데 산고개 재밑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며 웃땀은 서너집이 살고 안땀도 여남집 바껏땀(바깥뜸)이 다섯집이라 다해야 스무남집 정도이다. 나직한 산을 넘으면 바로 버드실이고 둘막이가 안되었던 시절에는 마을 앞들까지 물이 들었다고 한다. 배껏땀 뒤편을 골안이라 하고 그 옆쪽 골짜기를 무덤골이라고 한다. 재막골이라는 곳에는 큰 신목이 있고 그 밑에는 서낭당(서낭집)당집이 있어서 금기구역으로 삼고 있으며 옛날에는 섣달그믐날이면 아주 성대한 동신제겸 서낭굿을 하였던 곳인데 이름난 무당이나 화랭이가 초청되었다고 한다. 안땀 입구에는 증중추원의관(贈中樞院議官) 통정대부(通政大夫) 연안차공기적비(延安車公記蹟碑)가 서 있고 마을에는 운양재(雲陽齋) 재실 한채가 있다. 이 운양재는 차상중(車尙中)공을 추모하는 재실인데 한때 부자로 알려졌던 분이었으나 재물을 곤궁한 민초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자선을 베푼 분이라고 한다. 처음 밀양 박씨가 들어왔고 이어서 신씨, 차씨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차씨10집, 신씨, 안씨, 장씨가 각 두어집씩이고 임씨, 노씨가 한집씩 모두 21세대가 살고 있다. 상노인분들은 요즘도 버드실, 양굼, 잣골 등 우리말 지명을 쓰고 있다.
유곡리 백산마을
법정동리상으로 유곡리에 속하는 마을로 옛 지명은 잣골, 잣곡, 잣개로 불렸고 한자로는 척곡(尺谷), 척현(尺峴)으로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동네 뒤편과 좌우로 제법 높은 산줄기가 에워싸고 있으며 동남쪽이 열리고 강물이 길게 흐르고 있는 아득한 지역이다. 뒷산고개를 갓먼당으로 부르는데 이곳은 임란때 의병이 산성(토성)을 쌓고 강을 건너오던 왜적을 무찌른 전적지로서 유서 깊은 백산산성지다.
그래서 이 고개먼당을 보통 산성이라거나 산성터라고 부른다. 이 산성지 일대는 가야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곳인데 여러 차례 도굴이 되었고, 시기는 광복 후였으며 황금빛이 나는 쇠붙이 유물을 비롯하여 온갖 모양의 토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 백산고개에서 왼쪽으로 내리 뻗은 산줄기 끝자락쯤에 옛날에는 큰잣나무 숲이 있었다고 하며 이 잣나무숲 때문에 백산(栢山)이란 지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잣대를 걸쳐도 될 정도로 솔직한 골짜기라서 척현(尺峴)이란 지명을 썼다가 뜻으로나 소리로도 안좋아서 백산(栢山)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또다른 얘기로는 깐치고개(까치고개)와 깐치골짝이란 이름을 따서 작현(鵲峴)으로 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마을 뒷편 산자락에는 벽진 이씨문중의 백산재(栢山齋)가 있고 재실뒤에는 넓은 묘역인데 이덕남(□德南)공과 이충서(□忠恕)공 내외분의 제단비가 서 있다.
그리고 동네안에 이월삼씨댁에는 요즘 보기 힘든 개묘(家廟 가묘) 한채가 남아 있다. 원래 벽진 이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벽리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35세대중 30세대가 이씨이고 성씨, 김씨등 타성바지는 겨우 한두집씩이다.
태부리 태부마을
지정면소재지에서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돌문이고 재(돌문재)에서 소재지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태부마을이다. 법정동리상 태부리(泰夫里)에는 신암(新岩)마을이 포함된다. 태부마을이 큰 동네로서 옛날에는 궁곡이니 금곡 또는 아예 금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 지명은 동네 뒷산이 금굴(금을 캐내는 금광산을 말함)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지산면의 금곡이 영 다른 지명으로 바뀐 것은 동네 뒷산이 태부산(太夫山)이었기 때문에 지명의 정리 때 산이름대로 정했다는 것이다. 태부마을은 옛날 상태부(上太夫)라고 했던 지역인데 웃땀(상촌), 중땀, 아랫땀과 안골(안땀)등 네뜸이다. 상촌은 지금 한집도 없이 폐동이 된 셈이고 서너집 사는 중땀과 아랫땀은 연결되듯 붙어 있고 안골은 여남집이 살고 있는데 산모퉁이를 돌아 들어 앉아 있는 동네다. 태부산으로 부르는 뒷산도 기록에는 나오지만 보통으로는 동네뒷산이라고 부른다. 중땀 건너 산골짜기를 개장골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옛날 아기무덤(보통 깨장이라고 부르는 돌무더기 무덤을 말함)이 많아서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네 앞 산자락에 제법 큰 밭뙈기가 있는 보통 점대골이니 점터골이라 부른다. 옛날 도자기를 굽던 도요지이며 지금도 땅을 약간만 긁어도 유백색과 회색빛이 고운 그릇조각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안골을 지나서 깊숙한 산골짜기를 들어가면 큰 너덜산을 넘어가는 잿길이 있는데「한이불재」다. 원래 핫이불이란 말이 쉽게 발음하면서 한이불이 된 것이다. 재를 넘어가자면 핫이불을 둘러 쓴 것처럼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이 재를 넘으면 유곡 세간의 고송골로 빠지게 되는 산길이라 옛날에는 연락부절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동네건너 갓골 안으로도 산고개가 있는데 보가리재라고 한다. 이 재를 넘으면 정곡면 성황마을이다. 쟁기나 극제이를 메고 소를 몰로 넘어 다니는 산길이라는데서 생겨난 땅이름인 것 같다. 옛날에는 이 동네 주위는 천둥지기 봉천답(奉天畓)이 많았다고 하며 특히 쑤시(수수)가 잘 되어서 지금도 쑤시 빗자리(수수비)가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다. 웃땀의 덜티골은 쇠꾼(소먹이는 아이들)과 잘생긴 들돌이 있었고 심자랑(힘자랑)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랫땀 동네 뒤에는 해주 오씨 문중의 대양재(大陽齋)가 있고 동구 밖에는 만우거사해주오공표적비(晩雨居士海州吳公表蹟碑)가 서 있는데 한학자로서 여러 곳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양성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오일근(吳一根)공의 행적을 기리는 비라고 한다. 그리고 안골(내곡)에 강병기씨댁에는 승정대부행용양위부호군(종1품벼슬) 강수회(姜壽檜)공, 증통훈대부군자감정 강경승(姜慶昇)공, 증통정대부장예원판결사 강신(姜愼)공, 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 강처의(姜處義)공과 통정대부 강인흥(姜仁興)공 등 여러 어른의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 동네 주위에는 옛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소로잿길이 많은데 한이불재를 비롯하여 백산과 양동으로 통하는 배나무골재, 두곡 삼산마을로 통하는 새주골먼당 등의 고개이름이 남아 있다. 이 동네는 처음 신안 주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그 뒤 김씨, 오씨가 들어왔다는데 지금은 해주 오씨가 15집, 진양 강씨가 10집, 김해 김씨 9집, 송씨, 이씨, 조씨등은 서너집씩 모두 48집이 살고 있다.
태부리 신암마을
법정동리로는 태부리에 속하는 마을인데 행정동리로 신암으로 정한 곳이다. 원래「덤밑」으로 불러온 동네지만 뜸으로는 신징이(신정 新亭), 오척골(烏尺谷), 암하(岩下) 등 세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신징이란 말은 원래 신씨가 살았던 터라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하며 또 동구 밖에 정자나무는 동신제를 모시는 곳이다. 오척골은 동네 뒷산의 생김새가 까마귀가 날개를 편 형국일뿐 아니라 대대로 소자소녀(효자효녀)가 끊이지 않을 솔직한 골짜기라는 뜻에서 오(烏 까마귀), 척(尺 잣대 또는 솔직한 골짜기)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뒷산을 넘은 큰 재는 삼산과 두곡으로 통하며 왼편 새골 먼당을 넘어가면 박진과 양동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또 작은 재라는 곳은 황토밭 뻔덕인데 옛날에는 소꾼, 풀꾼들이 모여서 소미꾸지 하던 자리라고 한다. 얼른 보기에는 갑갑한 기분이 드는 솔직한 동네지만 양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동네라고 말한다. 이 동네는 지금 12집이 살고 있는데 김씨4집, 강씨, 오씨, 조씨가 각 2집씩이고 송씨, 이씨가 한집씩이다. 덤밑 동네에는 서재터가 있는데 옛날 철종때 춘강(春岡)이란 호를 가진 이씨 큰 학자가 서당을 열고 어린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대부(大夫)라면 아주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신암이라면 새바구란 뜻이라서 자연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라 할 것이다. 이 마을에는 현풍 곽씨(이곳 분들은 현풍 소리곽시(솔례마을곽씨)가 먼저 살았다고 하며 그 뒤 여러 성바지가 들어 왔다고 한다. 지금은 김씨가 12집, 이씨 10집, 임씨. 조씨가 8집, 곽씨 5집, 박씨 3집, 강씨 2집 등 모두 48집이 살고 있다.
지정면 기관 유적지
- 지정초등학교
- 지정중학교
- 의령 이운용 묘 – 경상남도 기념물 제274호
- 의령 보덕각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 의령 쌍절각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56호
- 의령 유곡산성 – 미지정
- 의령 유곡리 고분군 – 미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