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 화정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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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면(華井面)

  • 전남 여수시 화정면
  • 경남의령군 화정면

화정면 개요

화정면은 경상남도 의령군에 속한 면이며, 서남으로 남강을 경계하며, 진주시 미천면과 대곡면 지수면을 접하며, 함안군의 군북면과 맞닿아 있다. 전형적인 시골마을로 인구 점차 줄어들고 있다.

군청소재지로부터 15㎞ 서남에 위치하여 남강을 경계로 진주시 미천, 대곡, 지수 3개면과 함안군 군북면과 접해 장사진형으로 남북 12㎞로 길게 뻗어 있다. 남강변에는 비옥한 토지로 농사가 잘되고, 수박·호박의 주산단지로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으며 특히 호박은 전국에 이름나 있다. 남강을 끼고 있어 절경이 있고, 상정리 읍강정에 바라본 남강은 으뜸이다. 원래는 상정면(가수·덕교·석천·상정)과 화양면(상일·상이·화양·중촌·하촌) 2개면 이었으나, 1935년 읍면 개편될 때 중촌(대산), 하촌(만천)은 의령읍에 병합되고 나머지는 화정면으로 되었다.[출처, 의령군청 홈페이지]1

화정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화정면의 법정리

  • 가수리
  • 덕교리
  • 상일리
  • 석천리
  • 화양리
  • 상정리
  • 상이리

화정면 지명유래

화정

대한제국 고종32년(1895년) 지방제도개혁과 고종43년(1906년 광무10년) “지방구역정리”때까지는 상정(上井)과 화양(華陽)이 별개의 면 행정구역이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총독부령제111호에 따라 그 해 3월1월부터는 만천(萬川)일부지역이 화양면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935년(소화10년) 화양면의 상일(上一), 상이(上二), 부곡(釜谷)마을이 상정면에 편입되고 나머지 중촌(中村)과 하촌(下村)은 의령면으로 편입시키면서 화양면을 폐지했다. 이때 화양의 화(華)와 상정의 정(井)을 따서 면명도 화정(華井)으로 고쳤다. 그 이후 별 변동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곡마을

옛날에는 상정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이다. 「선실」마을은 원촌마을과 동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경주 이(□)씨의 집성촌이다. 아득한 옛날 마을뒷산 큰 바위에서 오랫동안 수도를 하고 있던 백수도사가 어느 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며 화창한 날이면 자주 내려와서 놀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 그 바위를 이곳 사람들은「신선바구」「선바구」라고 한다. 이 지역은 진양땅과 연결되는「새터재」와 「부무골(풀무골)」을 지나 미천면(월암)으로 가는「점천재」는 이제 풀섭에 묻혀 버렸다. 인근 백리밖까지도 이름이 난 용한 박수무당(남자무당)이 살았다는「박수골」, 자그마한 암자가 있었다는「불당골」, 골바람이 유명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시켜주는「바람골」도 점점 잊혀져가는 지명이 되고 있다. 동구밖 길가에 경주 이씨 중손, 중삼, 중화, 삼형제 내외분의 효행을 기리는 삼효자 삼효부비가 있고 마주보는 산자락에「선곡재(宣谷齋)」가 있다.

백곡마을

화정면 소재지에서는 동쪽에 위치한 골안마을이다. 의령에서 덕실골과 화정면 경계를 짓는 박령재서 보면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이다. 옛 지명으로는「잣골」인데 잣나무가 많았던 산골짜기 동네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옛적 골짝장(산골짜기 동네 부근에 달포걸이로 섰던 제자(저자·시장)를 말하는데 부정기시장)이 섰던 곳이라서 시곡(市谷) 「제자골」또는「장터골」로 부르다가 줄여 쓰면서 자골(잣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둘러보건대 둘 다 믿기지 않는 곳이다. 일제 때 한자표기를 하면서 잣나무「柏 또는 栢」골짜기란 지명을 붙인 것이다. 동네 뒤 되메기재가 있어 탑골로 통하던 산고개가 있고 맨 안쪽에「배골」「건네몰(건너땀)」「아랫골」「똑덕골」그리고 한길가 작은 뜸이 「구부링이(구부렁)」등 다섯 뜸이이고 똑덕골안에「제잣골」이란 지명으로 논들이다. 아득한 옛날 김해김씨가 먼저 들어와서 제잣골에 살았다는데 손수도 늘지 않고 산짐승 때문에 농사도 망치기만 하는지라 삶이 퍽 고달팠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정착했던 여러 집안은 후곡(뒷골) 공모(고무실)쪽으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안땀에서 뚝 떨어져 자리 잡은 뜸이라서 똑닥골(똑덕골)이 되었고 구부링이 마을은 박령재가 끝난 지점인데 길도 구부러진데다 뜸을 끼고 흐르는 골도랑도 꼬불꼬불하다보니 동네도 활모양으로 구부렁해 보인다. 마을이름은 장꼬먼당(장고개), 바구리(바구니) 멧등, 쑤시밭(수수밭)골, 더미(덤·큰바위)먼당, 여시(여우)골 등 정겨운 토박이 땅이름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동네 어귀 길가엔「효열부 전주이씨 원임(元任)지비」역시「효열부 풍천노씨 달선(達善)지비」가 나란히 서 있다. 지금은 김해 김씨가 스무남집이고 구, 박씨등 타성이 여남집이 살고 있다.

삼정마을

화정면 소재지 상정에서 동쪽 방향 3km 어린지점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삼정마을이 있다. 속칭 화양「삼징이」로 부르는데 약 2백50여년전 동래 정씨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한씨 일가가 먼저 살았다고도 하지만 정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배산임수의 명지이긴 하나 작은 배가 떠나고 있는 행주(行舟)형의 지혈인데다 앞쪽으로 큰물(남강)이 내다보이므로 마을안에 큰나무를 심어야만 음양상생(陰陽相生)하고 발복을 도모 할 수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세 그루의 기목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가 배의 돛이면서 방재비복의 신기를 돋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위와 아래 그리고 중간지점에 심었다는 것이다. 정기나무(정자나무의 토박이 말)는 마을의 태평을 지켜주는 한편 재액을 막아주는 신목(神木)이며, 마을사람들의 큰사랑 구실까지 했으므로 촌명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마을 뒤로 야트막한 산이 둘러싸고 앞으로 넓은 들 그리고 강물이 넉넉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메기가 침만 흘려도 물이 드는 벌녘이었고 큰물 한번 들었다하면 씨도 싹도 못 건지는 무덤이 마을이었던 곳이란다. 마을 뒷산이 호암산이며 산중턱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 절터라 부르며 산자락에 마을이 형성돼 있었던 모양이다.「큰동네(본동)」「장안골」「고래골」등 세 뜸인데「고래골」은 산등성이 길로 5리쯤 거리의 산중턱에 재실과 인가 두어집이 있다. 옛날 큰 부자가 살았으며 꼿꼿한 선비면서 강직하여 고려시대의 풍습과 예도를 행하였으므로「고려골」또는「고례(古禮)골」이 변음된 지명이다. 마을 옆 건너 먼당이라는 산고개가 「쑥재」다. 산쑥이 많아서 재이름이 된 것이다. 강건너는 진양땅이며 얼마전까지도 나룻배가 오가던「용봉나루」가 있었다. 동구밖 나직한 산자락을 솔밭등이라 부르는데 어느 시절 전(全)씨가 살았고 떠나면서 묘자리로 만들었기 때문에「전개매터(전가묘터)」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마을 들머리에 청주한씨의 동호재(東湖齋), 경추재(敬楸齋)가 있고 동래정씨 재실로 원모재(遠慕齋), 삼락재(三□齋)가 번듯하다. 한길 가 백일홍 숲이 쌓인 채 「정효열부 진양하씨기적비」가 돋보이고「성균관직강 김관수공송덕비」도 서 있다. 25가구가 눌러 사는데 하(河), 이(□)씨 등 타성은 몇 집 안되고 나머지는 모두 동래 정씨이다,

공모마을

화정면 상이리(上二里)에 속하는데 옛날「마내」팔곡(여덟골)에 포함된다거나 안된다는 양설이 있는 마을이다. 또 상정면과 화양면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는 이곳은 화양에 속했다. 면소재지에서는 동남방6km 거리고 읍내서 가자면 10km쯤 된다. 지금은 산자락에 동네가 있고 널찍한 들을 건너서 강물이 흐르고 있다. 역시 배산임수(背山□水)라 자리가 좋다. 그러나 둘막이가 안되었던 시절엔 낮은 집마당까지 물이 들었던 강변한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확실치 않지만 촌명이「고무실」이었고 이 지명의 유래를 밝히지는 못했다. 옛 기록에 이곳을 「유곡」이라 했고 진(津·나루터)과 함께 긴제구(제방)가 있었다고 돼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느릅실」이나「느릅골」로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마을 뒤쪽 산에 느릅나무(떡나무, 백유목)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니 엉뚱한 지명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동명「공모(孔慕)」는 전통이나 역사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동네 뒤에 필봉(筆峰)산과 성인봉(聖人峰)산이 있는데 붓대가리 모양으로 뾰족한 산봉우리라서 필봉이 됐고 성인봉은 의젓한 산세에다 성자(聖子)숭배사상 때문에 거륵한 산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하면 곧 공자(孔子)님을 지칭하는바 공자를 추앙하고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공(孔)과 모(慕)를 따서 촌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지명의 일제정리 때「고무(고물)실」을 한자로 적으면서 유교적 냄새가 나는 동명으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위에는 오래도록 변치 않고 불리는 골·들이름이 있다. 절이 있었던 자리라「고사밭골」, 박씨성가진 장사가 살았던 골이라고도 하고 대장(장군벼슬)의 묘가 있었다고「박대장골」이며 골안「작은고무실골」을 지나면 뒷골(후곡)로 통한다. 들이름도 퍽 재미있다. 「강지앞들」「멀랑들」「홰미들」「둑밑들」등이다. 일찍이 청주 한(韓)씨가 자리 잡았다고 하며 뒤이어 김(金)씨가 들어오면서 큰 동네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해야 겨우 40여가구만 남았는데 역시 한·김 양성이 열댓집으로 많은 편이고 그 밖에는 오·이·장·정·주씨 등 각성이 열댓집이 살고 있다. 당대 학덕 높은 선비로서 단성현 훈도를 지낸 고송(孤松)한대기(韓大器) 님을 추모하는 용화정(□華亭), 문중재실 추모재·김해 김씨 재실인 현모재(賢慕齋)가 남아 있다. 동네 앞 길가에 김재호씨 부인 파평 윤(尹)씨 효열비가 서 있다.

석천마을

화정면 소재지에서 오리쯤 떨어진 깊은 골마을이다. 한때 아무 까닭없이 저성(苧城)으로 동명이 바꾸어져서 동민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황천 또는 저 세상의 뜻으로 쓰이는「저승」과 독음이 비슷했기 때문이며, 농담이지만「저성사람」「저성간다」는 말은 여간 불쾌하지 않았던 것이다. 돌새미, 석천(石泉)이란 동명을 되찾고자 애쓴 보람으로 1987년 1월1일부터 옛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다.

색깔이나 모양이 좋은 돌(바위)이 많고 큰산 밑이라 물(샘)이 맑은 곳이니 썩 어울리는 동명이다. 남동쪽만 확 트인 골마을은「선땀」「가운데땀」「웃땀」그리고 「문주골」등 네 뜸이지만 모두 가깝게 이어져 있다. 옛 산성이 있는 벽화산, 방갓모양의 방갓산, 투구처럼 생긴 국사봉, 다섯 개의 뭉실한 봉우리가 이어진 오봉산 등 높은 산으로 에워 싸였다. 의령장 나들이가 많은「장고개(장때재)」, 칠곡으로 이어지는「떡재미재」, 덕실로 통하는「산성재」가 있었지만 지금은 풋나무에 묻힌 채 잊혀진 잿길이다.

임란 때 상노인과 대를 이을 아이들을 모아 피신을 시켰던 「은신골」, 옛날 이마을 자제들을 교육했던 문정(文亭)이란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서 문정곡(문정골이 문주골로 변해짐)인데 지금은 서너집이 살고 있는 뜸이다.

마을 서편으로 부드럽고 길게 흘러내린 산줄기가 「황새등」이다. 황새의 어깨부분에「금호장군묘」로 전해지는 큰 고총이 있다. 황새등의 끝자락에 있는 들을「고딩이들(고동들)」이라고 하며 문주골에는 질그룻, 쇠붙이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으니 옛 도요지가 아니면 큰 고분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또 웃말 최만기님 집 뒤 대밭에도 큰 굴이 있고 그을린 굴벽을 보면 기왓굴이거나 옹기굴인게 틀림없다. 석(石)씨와 윤(尹)씨가 먼저 정착했다고 주장하는데 지금은 경주 최(崔)씨가 30호로 대성이고 김(金)씨, 오(吳)씨가 13집씩, 윤(尹)씨가 8집이니 아직은 대촌에 해당된다. 최씨부인 능성 구(具)씨의 열녀각, 원려당 최홍조님 유적비, 최문의 재실인 봉산재(鳳山齋), 오씨문중의 벽양재(碧楊齋)가 있다.

「선땀」마을 뒷고개에는 산란(山蘭)이 많아서 「난고개」니 산초령으로 부르며 흉년에 흰죽 한그릇 얻어서 병든 어머니에게 드리고 논 한뙈기를 빼앗겼다는 「흰죽배미」등 전설과 설화가 많이 전한다.

실제로 물 좋고 조용하며 갸륵한 자녀들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장수촌이라고 자랑하는데, 전체 인구수의 일할이 일흔을 넘겼다.

유수마을

칠곡서 진주가는 고갯길을 한참 오르면 불티재(夫乙峴, 夫乙峙 ) 먼당에 이르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깊숙한 골, 나직히 들어앉은 마을이「유시련」이다. 안골의 조금 큰 마을과 꼬불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새몰」, 그리고 저수지 확장으로 수침지역이 되어 이주하게 된 못 위 두어 집 등 세 땀을 합해서 유수마을이라 한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진양고을에 속해 있었는데 「유수연」「유시연」또는「유시런」으로 변음되었으며 마지막 연(淵)만 떼고「유수」로 변해진 채 현재의 동명이 된 것이다. 유시런마을에서 두어마장쯤 아랫마을이「원촌(院村)」인데 옛날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소 겸 나그네들이 쉬고 묵을 수 있는 여사(□舍)가 있던 「가수원(柯樹院)」과「원촌참(院村站)」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법정동리명이 가수리(加樹里)인데 柯를 加로 바꾼 것이다. 남동쪽만 빠끔히 열리고 온통 산으로 에워싸였으며 마을 바로 뒤에 천왕산(天王山)이 옆에 방갓산이 높게 솟아 수맥(水脈)이 좋아서 늘 청청한 물이 흐르고 나무숲이 울창해서 가수(柯樹:加樹) 란 지명에다 유수(有水)란 동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덕다리」쪽이나 치실사람들은 보통「재너머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티재는 옛 기록으로 夫乙峴인데 이두(□)표기로 보이며 절이나 불교적인 인연은 없어 보인다. 이 마을 앞 산자락 덤옆에는 솟아나는 천연샘이 있어서 겨울에도 얼지 않고 긴가뭄에도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네 어귀에 있는 연못도 물이 가득하고 그 아래 큰 저수지도 이 골짝물로 채워진다고 한다. 「큰새미」나「들새미」도 수질 좋은 우물로 남았고 골짜기에 흩어진 논에서도 미질(米質) 좋은 나락을 거둔다고 한다. 그래선지 몰라도 이 마을 「차나락(찰벼)」은 이름이 나 있지만 근래에는 모두 매나락(매벼)만 심는다고 한다. 새말쪽에는 시루모양의 산봉우리라서「시리봉」용수처럼 생긴 바위틈에서 물이 난다고「용시바구새미」, 밥주걱처럼 길쭉한 논이라고「주개배미」등 재미있는 들·산이름이 있다. 불티재 먼당 바로 아래는 첫 골짜기가「도적골(도둑골)」이었다. 밀양 박(朴)씨가 먼저 터를 잡았다고 하며 세뜸을 다해서 서른댓집인데 반을 넘게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천(千), 이(□)씨가 예닐곱집씩이다. 새말에 박씨 문중의 「의암재(宜庵齋)」가 있고 얼마전까지 있던 남씨 재실은 철거되었다.

만상마을

예전에 의령이 풍덕면(豊德面)이고 덕실골이 덕곡면(德谷面), 대산 만천지역이 만천면(萬川面)으로 보통 호칭으로는 마내(만내의 받침 니은이 탈락됨)로 불렀던 곳이다. 1913년(대정 2년) 면이동(面里洞)이 대폭 통폐합 정비되면서 일부는 화양면(華陽面)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35년(소화 10년) 일부지역이 의령면으로 편입되고 일부는 상정면(上井面)에 폐합되었는데 이때 화양면은 없어졌고 상정면도 화정면으로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마내 웃말로 부르던 동네이고 화양면 시절에는 마내 노촌(□村)으로 불렀다고 한다. 광주 노씨가 들어오기 전에 이(□)씨가 몇 집 살았는데 노씨가 들어와 가세가 늘었고 이씨는 떠났다고 한다. 절먼당이란 곳은 옛날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끓어서 불태워 버렸다고 하며 이 고개를 넘으면 구시골(구룡동을 말함)이고 매봉재를 넘으면 수암으로 통하며 큰골을 지나 산고개를 넘으면 덕실 서남촌으로 이어지는 박령재라고 한다. 뒷갓(뒷산)자락에는 두 채의 재실이 있으며 동네 뒷산 꼭 대기에는 상사바구(상사바위)가 있다. 도랑개새미라는 자연샘이 있는데 새미물을 장복하면 속병이 나았고 목욕을 하고 씻으면 오래된 마목이나 부시럼(부스럼)도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동구 밖에 방천둑이 있는데 그 근방논들은 물이 끼이는 곳이라 구릉들(구룡들)로 부르고 있다. 마을 옆에는 노씨문중의 구양재(龜陽齋)와 응산정(鷹山亭)이 있고 그 옆에는 처사 노정훈(□正勳)공과 노대수(□大受)공이 제단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동네는 타성바지가 들어와도 결국 떠나고 만다는데 지금도 노(□)씨만 20가구 남짓 살고있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시집간 분들의 댁호가 여러 가지인데 마내띠기(마내댁), 노촌띠기, 하촌띠기 등으로 불린다고 한다.

마전마을

「삼밭실(삼밭골)」인데「삼바실」로 쉽게 부르는 아주 깊은 골짜기 작은 마을이다. 면소재지에서 20리가 넘고 중촌 마을에서 돌징이를 지나 십리길이다. 옛날 삼(麻)이 특별히 잘되고 또 삼베가 유명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편의 주장은 서북쪽이 발롬하게 열리고 빽둘러 산이며 가파른 계단식 산전(山田)뿐인 마을이라서「산밭골」로 불러온 것이란 얘기도 있다. 바로 앞산 잘록한 고개가 칠곡으로 통하는 「포구티」며 이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재이며 먼당에 여러 그루의 포구나무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고 뒷산이 「학여봉(鶴如峯)」이며 가파른 고개로 외지고 무서웠던「서부리재(서붕재)」를 넘어 섶밭(신전)으로 가게 된다. 「쇠또골재」「방골재」등 옛사람들은 산고개를 넘어 지름길로 삼았다. 「포구터」옆에 솔직한 골짜기를「새끼골짝」이라는데 숲이 우거지고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던 금기의 골인데 송충이 탓에 나산이 되었다. 마을 앞 도랑이 가늘게 흐르는데「찬새미」라는 옹달샘이 있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솟아나고 얼마 전까지도 바가지로 퍼먹는 샘이었다고 한다. 겨우내 얼지 않고 한여름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약수다. 현재 스무남집이 있고 이(□)씨가(관향은 다름) 반을 차지하고 인동 장(張)씨가 댓집인데 원래 토박이는 밀양 박(朴)씨라는데 지금 겨우 두집만 살고 있을 뿐이다.

중촌마을

대의면 소재지서 십리길이 더 되는 깊숙이 자리한 산촌, 어르신들은「모오중촌」이라고 부른다. 합천군 삼가면 땅을 한참 밟아야 하는 묘한 지역인데 조선조 고종 때 지방제도 개혁 때까진「모아(毛兒) 방(坊□지금의 면에 해당 됨)」이었다. 좀 이상한 지명인데 이 골 안에 띠풀이 너무 많고 산짐승이 많아서 그런 지명이 쓰였다고 한다.

「모오골」동쪽으로는 험준하면서도 정기가 높은 자굴산이 우람하게 섰고 남북은 역시 높은 산줄기가 십리로 뻗어 있으며 서쪽만 트여 있는 유곡이다. 하지만 들어가 보면 경관이 좋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고 아늑하고 따스한 골이다. 옛날부터 힘센 장골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서당도 여러 군데 있었고 당대 널리 추앙 받던 분들이 자주 찾고 머물기도 했던 곳이다. 언젠가는 모르지만 지명이 천하다고 모의(慕義)로 고쳤다.

자굴산 쪽에서 보자면 상촌(上村:지금의 신전, 곡소, 암하, 행정)이라 했고 그 밑이 「중땀(中村)」그 밑뜸이 하촌(아랫땀 하촌(下村)으로 불렀다는 것인데 지금은 7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마을 왼쪽으로 산모롱이를 돌아 가면「산바실(산밭골, 마전)」이란 마을이 있고 마을 오른쪽으로는 맑고 넉넉한 물이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른다.

「용마지기도랑」옆의 들 이름도「용마지기들」이다. 찻길에서 마을로 가자면 1백 미터쯤에 아담한 교회가 있고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 이도 큰 바위를 이어서 만든 징검다리가 있어 일명「나드레도랑」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나들이」다리란 뜻인 듯 하다. 동네 앞들가운데는 아주 울창한 숲이 있고 숲 속에는 당산나무와「비손바구」가 삐죽 서 있다. 동신제를 지내는 당산숲이며 선돌은 선사유물인 입석(선돌)은 아니고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비손하던 돌이라 한다. 신목과 신석을 보호하는 숲이라서 주위 농작물에 피해를 끼쳐도 없애서는 않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마을 옆 동긋한 산이 동산인데 이 산에서 바윗돌이 굴러 떨어지면 사흘 안에 아기초상이 난다는 속신 때문에 사람이나 짐승이 올라가는 것을 금기하고 있다. 또「산바실」가는 길가에「돌정이」라는 큰 고목나무가 있다. 한여름 들일을 하다가 땀을 식히고 쉴참을 먹는 정자나무인데 땅바닥에 큼직한 자연석들이 깔려 있어서「돌정자」즉 석정(石亭)이란 말이 변음된 것이라 보인다.

마을 오른쪽 산자락에 길쭉한 논밭이 있는데「할바지들」이니「한바지들」로 부르고 있다. 덜렁 얹힌 높은 지대라「하늘받이(천수답)」의 와음인 것 같다. 이 동네 주위엔 여러 문화유적이 있고 대표적인 것으로「이의정(二宜亭)」「미연서원(嵋淵書院)」「숭정사(崇正祠)」그리고 목판 9백여 장이 보관된 장판각(藏板閣)과 서당이 있고 큰 사적비도 함께 있다. 조선중기 청남의 영수이자 우의정을 지내신 허목(許穆)선생이 우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에 몰두하던 바로 그 현장이다. 도지정 문화재(지정번호 182호)로 지정되었고 그 옆 학고정(學皐亭) 또한 고풍스런 제각이다.

마을동쪽에「열부공인거창신씨사적비」는 허속(許涑)공의 부인으로 효녀에 효부이면서 열부라 영조 때 정려가 내려졌다. 오랜 세월 풍우와 전란, 후예들의 빈곤 때문에 퇴락하여 꽃집(정문)은 철거되고 지금은 돌비 하나만 서 있다.

동네를 저만치 벗어난 한길 위「통정대부효자박공묘」그 아래「밀양박공양세효자비」가 서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음력 2월 초승이면 골안 세뜸끼리 줄땡기기(줄다리기)를 했고 모의골 전체의 잔칫날이었으나 지금은 행해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기막힌 일은 미수선생 영정을 비롯해서 유묵이며 서책 등 서너 차례 도난을 당했다. 이 마을엔 밀양 박(朴)씨가 먼저 자리 잡고 그 뒤 여러 성받이가 들어 왔다고 한다. 백호 넘던 대동이 지금은 겨우 60여 집인데 허(許), 김(金). 강(姜), 최(崔), 정(鄭)씨가 7∼8집이고 박(朴)씨가 6집, 이(□), 전(田)씨가 서너집씩 살고 있다.

신촌마을

지역주민들은「새몰」「새말」로 부르는 동네다. 길(큰길)아래편에 위치해 있으며 옛날에는 밭들이었고 「우시렁골」로 부르는 자굴산 끝자락 골짜기에 있던 사람들이 농사짓기 편리한 이곳으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안태봉(안티봉)안쪽에 있던 마을이 없어졌는데 하늘받이 논뿐인지라 들 가까운 지대로 이주했다는 말이 옳은 것 같다.

「우시렁골」은 한자로는 유수곡(□水谷)으로 적고 있는데 우리 토박이말로「으스름」「으슥하다」란 말이 변음와음을 거듭하면서「우시렁」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동녘도랑을 건너 높은 언덕밑에 도랑새미(시내와 우물이란 말)라 해서 사철 차갑고 맑은 물이 솟아났던 곳이 있었는데 중학교를 세우면서 없어졌다. 이 새미물이 사실은 식수 겸 농용수를 해결하는 봇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앞논들을「질보들」이니「질보리들」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길밑 또는 길따라서 봇물길이 나 있다는 뜻에서 길보(질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편하고 쉽게 부르자니 질보들 질보리들로 연음 된 것이다.

장터 조금위에는 아주 오래된 성냥깐이 있었지만 60년대에 없어졌다. 치실장(칠곡장)하면 의령장, 삼가장의 중간지점에 있기 때문에 한때는 가축(주로 소, 돼지, 닭) 거래가 많았고 곡물전이며 방물가게 등 제법 장터로서의 기능을 해왔는데 최근 들어와서는 완전히 몰락하다시피 돼 버렸다. 이 마을은 회산 황(黃)씨가 먼저 터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은 담양 전(田)씨가 22가구로 대성이라서 전촌인 셈이다. 김(金)씨 10집, 이(□)씨 5집, 그리고 박(朴), 장(張), 천(千), 허(許), 심(□)씨 등 서너집씩이라 모두 55세대가 살고 있다.

서녘에 전씨 문중재실인 도계정(陶溪亭)이 있다. 의춘중학교가 이 마을 구역이고 학교 옆 「여시바구」라는 산기슭에 두어집이 있었으나 60년대 없어졌다.

「여시바구」는 여우바위의 토박이 말인데 예전에는 그곳에 여우란 놈이 잘 나타나고 소리내어 울어댔던 길목이었다고 그런 지명이 붙여진 모양이다.

가야마을

법정동리상 동동리(東洞里)에 속하는 마을인데 보통 「개애골」로 부르고 있다. 가야란 지명은 개애골이란 원지명의 소리에 가깝게 작명을 하자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개애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옛날 기와굴(토박이말로는 재애굴, 재와굴)이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 뒤쪽이 북산줄기가 길게 뻗어 있고 산자락 밭언덕에 기와굴이 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밀양 박(朴)씨 재실인 신라정(新羅亭)이 있는 자리에 의령향교가 있었다는데 1582년 (선조15년)에 이함(□涵)현감이 지금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와서는 기와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주택지로서 자리가 좋다. 처음 경주 최(崔)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김(金)씨를 비롯하여 총 60여가구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화정면 공공기관 및 주요 볼거리

의령상정리 조씨조가

의령상정리 지석묘군

  •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711번지 외 5필

상정면 화정중학교 앞 들판에 7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민무늬 토기가 발견되었고, 집터와 고인들도 복합적으로존재하는 대규모의 고인돌이다.

화정면의 특산물

부추

파프리카

주키니호박

  1. 경상남도 의령군 읍면안내 화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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