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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군동면(郡東面)
개요
군동면(郡東面)은 전라남고 강진군의 면이다. 강진군의 동쪽 중앙에 자리하며 동쪽으로 장흥과 닿아 있고, 위로는 작천면과 병영면을, 남쪽으로는 칠량면을 접한다.
행정구역
법정리
- 파산리(琶山里)
- 호계리(虎溪里)
- 라천리(羅川里)
- 금강리(錦江里)
- 화산리(華山里)
- 용소리(龍沼里)
- 풍동리(豊洞里)
- 장산리(獐山里)
- 덕천리(德川里)
- 석교리(石橋里)
- 쌍덕리(雙德里)
- 금사리(金沙里)
- 삼신리(三新里)
지명유래1
파산리(琶山里)
금곡(金谷) 마을
금곡사 옆에 금굴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밑에 마을이 생겨 금곡이라 불렀다.
호계리(虎溪里)
호동(虎洞) 마을
마을 모습이 호랑이가 나오는 모습이라하여 호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옛 이름은 ‘범골’로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갈전 마을
원래 마을 터는 지금의 꽃동네 자리였다. 그곳에 칡밭으로 형성되어 칙이 많이 생산되었고, 칡이 많아 칡밭이라 불렀다.
라천리(羅川里)
시목(枾木) 마을
1789년 호구총수에는 라천면의 3개 마을이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지명인 시목이 나온다. 그리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도 面名만 호라면으로 바뀐 채 시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호라면 소재지가 시목이었으며 면청사는 현재 함양박씨 제각<라천리 945번지>으로 총 13개 마을을 관장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인근인 연동을 흡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감나무골-시목 마을의 옛 이름
다른 마을에 비해 물 빠짐이 좋고 추위가 적어서 수목이 잘 자라며 비옥한 토질은 어떤 작물도 잘 자란다. 산에 가면 묏감나무가 많고 집집마다 감나무가 없는 집이 없다. 늦가을 잎이 진후 붉은 감이 열려 있을 때에는 온통 마을이 감나무골로 보인다.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을 감나무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향(南向) 마을
따뜻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하여 남향마을이라 불렀다. 전해온 이야기로는 한 농부가 일을 하다 쉬고 있는데 어떤 도사가 지나가다 이 마을은 남향이라 불러야 좋다고 해서 이후 남향이라 불렀다고 한다.
금강리(錦江里)
서은(瑞隱) 마을
마을 이름이 쥐가 있어 불길하다하여 외정후에 서운이라 불렀다.
서은-좌우 산세가 죄 모양 같고 마을은 숲속에 있어 쥐가 숨은 형체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백동(瑞隱) 마을, 서은의 옛 지명이다. 마을 전체가 죽림과 동백나무에 쌓여 있어 아침밥을 지을 때 밖에서는 연기만 보인다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내동(內洞) 마을
1789년 금천면의 13개리 중 한 마을로 내동(內洞 )으로 불럿다. 그후 안동김씨 김질이 1538년 한양에서 내려와 본 마을에 정착했다. 그리고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은바람을 잘 타고 생기가 없어진다는 풍수설 때문에 지금의 안골목에 터를 잡고 마을 이름을 한자어로 내동(內洞)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사동(砂洞) -내동의 옛이름
고려말 도강김씨가 본 마을에 터를 잡고 속칭 사기등(砂器嶝)에서 사기를 구우면서 마을이름을 사동이라 했다
화산리(華山里)
화방(花坊),삼화(三化),영화(永化)
용소리(龍沼里)
안지(安池),신기(新基),석동(席洞)
풍동리(豊洞里)
명암(鳴岩) 마을
울명자에 마음암을 사용하고 있다. 큰 바위가 있어서 그런지 소리를 지르면 울린다고 한다. 현재도 그런 소리가 들린다. 강진군의 동쪽 끝 마을이며, 명암 마을을 지나면 곧바로 장흥군 송암리로 들어간다.
- 지금으로부터 141년 전 마을우물에서 六月日 井岩 康午年 흔적이 보존되어 지금까지 마을 공동우물로 사용하고 있다.
풍동 마을
남미륵사가 있어 유명한 마을이다. 남동으로 장흥에서 흘러오는 탐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화방산 자락이 있다.
장산리(獐山里)
대곡(大谷) 마을
옛날에는 마을이 고지대이고 큰골짜기가 있어서 상대곡이라 부르다가 해방이후 분구가 되면서 대곡이라 바뀌었다. 또 큰 골짜기라 하여 한실 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한실(寒室 ) 이조문종때(1450년)김해김씨가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하며 그후 밀양박씨가 들어와 60호가 되었는데 김씨와 박씨 씨족간에 파벌싸움이 수년간 계속되어 오다가 김해김시가 장흥군 용산면으로 이거하고 여타성씨 10여호가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대곡 /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대곡면의 마을수가 17개로 늘어나는데 역시 上大谷里는 일개마을로서 행정체제를 유지해오다가 1914년 일정에 의한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인근인 (월평리)현장항마을 그후 해방이 되면서 분구가 이루어지고 이때 장항, 중산에 이어 장산3구가 되고 마을명도 보통으로 부르게 됨에 따라 대곡이라 부르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중산(中山) 마을
옛적에는 마을뒷산 형국이 복호형국이라 하여 복호동이라 하였으나 약500년 전 중산마을로 개칭하여 현재 이르고 있다.
- 복호동(伏虎洞)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며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풍수지리설에 복호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 산중산리(山中山里) 약 630여년 전 옛지명이 처음 나온 것으로는 상중산리라고 마을명을 호칭하였다고 한다.
덕천리(德川里)
덕천(德川) 마을
마을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1789년 대곡면의 11개 마을 중 한마을로 덕천이란 지명이 나온다. 지방행정구역 일람에도 역시 대곡면의 17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일정초기까지 대곡면 한마을로 행정개편 되어 있고 1914년 일정에 의한 통폐합으로 양산과 병합하여 里名을 덕천리라 하였고 해방이 되면서 덕천리 1구라 하였다.
- 구곡(九谷 )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사람의 귀모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옛날부터 본 마을을 귀실 또는 구슬로 호칭하기도 했다. 뒷산에서 아홉 골짜기 물이 촌전으로 흘러들어 탐진강에 유입된다고 하여 구곡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석교리(石橋里)
석교(石橋) 마을
이조초엽인 약 500년 전에 탐진 최씨가 터를 잡았던 마을로 현재의 교량이 설치되기 전에 인근 주민들이 합심하여 돌다리를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인력으로 불가능하게 되여 망설이던 중 힘이 센 장수 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돌다리를 완성하여 그후 부터 물에다 발을 넣지 않고 건널 수 있어 이때부터 장사의 고마운 뜻을 돌다리라 표현한 것이 오늘날 石橋라 불리어 온다.
쌍덕리(雙德里)
관덕(觀德) 마을
서기 1914년 일정에 의하여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하여 평덕, 관덕이 통합되어 쌍덕리로 개칭하였고 서기 1945년 해방이후 분구하여 쌍덕기 2구로 칭하였으나 현재는 관덕이라 함.
- 상평덕(上平德)-관덕의 옛이름, 서기 1789년 호구 총수에는 대곡면내 11개 마을 중 평덕, 관덕이 상평덕이라 하여 국가유공자의 손이 살고 있음을 암시하였음.
- 사이관덕(사이觀德) 마을지형이 활과 같고 뒷동산이 활촉과 같아서 동리앞 중앙에 서재를 지어 사이재라 칭하였다고 하나 서기 1897년 정류에 집을 증수한 것이 상냥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시초 건축년월일은 명확하지 않다.
금사리(金沙里)
금사(金沙) 마을
1789년 호구총조사의 기록을 보면 大哭面의 11개 마을중 金沙洞里가 있다. 1912 행정구역일남에서 대곡면에 속한 금사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조선조 말엽에 형성됐고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下平德里 旺馬里 桂山里 月山里와 합하여 金沙里라고 名하고 郡東面에 속한 것으로 봉니다.
자연 마을을 분구하여 名名함에 가장 으뜸의 金沙라 하여 元金沙라 칭해 오다가 일제를 맞아 저수지 자리에 위치했던 元金沙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마을의 이름도 금사로 불리우며 오늘에 이르게 된다. 현재는 金沙 法定里는 덕마 금사, 월봉, 왕마로 나누어져 있다.
덕마(德馬) 마을
과거에는 평덕의 아래쪽이 된다 하여 하평덕이라 하였고 일제에 의한 분구가 되면서 덕마라 칭하게 됨. 옛 마을 이름은 불뭇개이다. 마을에 불뭇간이 있어 솥과 농기계를 제작했다고 한다.
삼신리(三新里)
비자동(榧子洞) 마을
오백년 전에 마을 뒷산에 비자나무가 많아 비자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옛 지명은 하신(下新) 마을이었는데 일제가 지은 이름이다. 현재는다시 원래 이름인 비자동으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