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s: 18
강진군 옴천면(唵川面)
개요
옴천면(唵川面)은 전라남도 강진군의 면이다. 강진군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북으로는 장흥군을 북서로는 영암군과 닿아 있다. 남쪽은 병영면과 작천면이 있다. 강진 안에서도 굉장히 외진 곳이다.
- 조선시대부터 옴천으로 불림
- 1913년 이후 토지세부측량 결과 북부일부는 영암읍, 동부일부는 장흥군 유치면, 남부일부는 본면, 병영면으로 편입
- 1930년 이후 면사무소를 화신마을에서 개산마을로 이전 현재 이름
행정구역
- 봉림리(鳳林里) 오추(梧秋) 연동(蓮洞) 죽림(竹林)
- 황막리(黃幕里) 동막(東幕) 화신(花新) 황곡(黃谷)
- 월곡리(月谷里) 구곡(舊谷) 신월(新月)
- 영산리(永山里) 계원(桂院) 영복(永福)
- 기좌리(己佐里) 사동(巳洞) 좌척(佐尺)
- 개산리(蓋山里) 오곡(五谷) 개산
- 정정리(井亭里) 대곡(大谷) 정동(井洞) 송용(松龍)
옴천면의 특산물
강진맥우
옴천토하
옴천 새송이 버섯
옴천 친환경토하미
지명유래
옴천(唵川)
강진군 옴천면(唵川面)의 지명 유래는 자연 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지역의 이름은 ‘옴’이라는 한자로 표기되며, 이는 옴천면을 흐르는 하천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옴천면 봉림리에서는 백로와 왜가리 등의 새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 요소들이 이 지역의 명칭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봉림리(鳳林里)
오추(梧秋) 마을
해방 전 60여 호까지 자연마을을 형성하다 해방 후 행정 구역개편에 따라 마을일부가 장흥 유치면 신월리로 편입 1976년경 45호로 줄었고 장흥댐 조성으로 인한 농경지 수몰로 현재 5호가 오추마을을 유지 되고 있다.
오추동- 마을의 뒷산 형국이 봉황 같다하여 봉황산이라 하였고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에서 산다하여 오추라는 지명이 생겼다함
오추리 –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오추리로 되어있고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도 오추리로 되어있음
연동(蓮洞)
마을에 적재하 고인돌들이 연종자 같다고하여 연동이라 불리워졌으며 마을 뒷산이 봉황산이라 봉황이 연밭에서 논다는 설에 따라 연동이라 불리어진 듯 함
당산리-백제 구수왕때(서기222년) 당산리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앞 전답에 암석이 적재하여 연꽃형국을 형성하여 연동으로 부르게 됐다고 기록되기도 함
죽림(竹林)
조선 후기부터 죽림으로 불렸다. 아마도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대나무 마을’로 불린 듯하다.
옛지명, 목마곡(牧馬谷) 조선조 태조왕대(1395년) 말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목마곡이라 불렀으며 조선조 말엽 고종때(1863년) 이후 마을뒤 죽전이 많아 죽림이라 불리워졌음(마을유래지 1976년)
황막리(黃幕里)
동막(東幕)
조선조 명종때(1545년) 남양방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이곳에 막(幕)을 친 것이 시초가 되어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을 동쪽으로 옮겨야 밥을 먹고 산다는 설에 따라 점차 동막으로 불리었다 함.
- 옛이름, 달막-구전의 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동쪽에 있어 해를 맞는다고 하여 동(東)자를 쓰고 투구산 능선이 달을 맞는다고 하여 달막으로 불렀다고도 함
화신(花新)
1931년 이전에는 이곳이 옴천면 소재지였으나 개산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화신으로 유지
- 옛지명, 화동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신덕.화동마을 이었으나 신덕과 화동이 합쳐져서 양부락의 첫글자를 따서 화신으로 결정했다 함.(해방 무렵)
황곡(黃谷)
1789년 처음 황곡이라 불리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르렀다. 황국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월곡리(月谷里)
2001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신월마을과 구곡마을을 합쳐 월곡이라 함
구곡(鳩谷, 舊谷)
김희원이란 선비가 명당을 찾아 순방 하던 중 이곳에 정착 하면서 지형이 등불아래 비둘기집 모양이라 하여 구곡이라했으며 등구실이라 하기도 했음
신월(新月)
조선조 지형이 높아 달(月)이 가장 오래 비추고 항상 새롭게 보였다 하여 신월이라 함.
영산리(永山里)
계원(桂院)
조선 말기에 계원이라 불렀다. 정확한 기원은 모른다. 조말엽 계원(桂院)으로 개칭
- 옛지명, 학산(鶴山) 조선조 중엽(1820년) 대장군이 진을 치고 사방 적을 살폈다는 나팔봉과 위봉이 있어 학산으로 불리어 오다 조선
영복(永福)
영봉(令峰)이라 불리우다 영복으로 불리게 되었다 함
- 옛지명, 영봉-이조 영조 때 전설에 의하면 장흥 유치 국사봉 아래 장군이 장내골에 진을 치고 총 지휘한다고 하여 영봉이라 불렀다 함
기좌리(己佐里)
사동(巳洞)
사동에서 용동(龍洞)으로, 다시 사동으로 개칭되었다.
- 옛지명, 용동-고려 제17대 인종때(1146년) 마을 좌측산 형이 사(巳)와 같다 하여 사동으로 불리다가 사동이라 칭하면 해가 있다 하여 마을입구 사두암을 없애고 용동으로 개칭 후 20여년도 못되어 마을이 폐촌이 되자 다시 사동으로 명명
좌척(佐尺)
벼슬의 지위를 가늠하고 잰다는 뜻으로 이 마을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하여 좌척으로 명명
- 옛지명, 동구촌(洞口村), 청수천(淸水川)- 통일신라 제41대 헌덕왕(810년) 때 고승이 마을을 형성 동구촌, 청수천이라 부르다 이조 18대 현종(1665년)에 삼청동(三淸洞)이라 하다가 영조때 좌척이라 칭함
개산리(蓋山里)
오곡(五谷)
행정개편(1914년)으로 오곡으로 개칭됨
- 옛지명1), 오유실(五柳室) 동부에 새유가 즐비하여 오유실이라 부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곡이라 함
- 옛지명2). 박실(朴室) 고려때(1375년) 박실이란 마을명칭이 생기기도 하였다
개산(蓋山)
그 후 조선조 선조때(1512년) 배산이 마을을 덮은 형태라 하여 개산(蓋山)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음.
옛지면, 개산(犬)-1976년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대인 1592년 밀양박씨가 터를 잡아 고려공민왕때(1304년) 마을이 형성되었고 지형이 개가 서북으로 머리를 향하는 형국 이라 하여 개(犬)산이라 불리어 졌음
정정리(井亭里)
대곡(大谷)
문헌의 기록은 없으며 정동마을에 속해 있다가 1992년 행정상 자연마을로 분리되었으나 약 70년 전부터 자체적으로 마을을 운영하고 있었음.
- 옛지명, 대실-골이 깊고 산세가 수려하여 도적의 은거와 도주로가 용이하여 대도들의 은거 적지였을 것으로 여김.
정동(井洞)
고려 태조때(918년) 순흥안씨가 터를 잡았고 어느 곳이나 우물을 파면 수질 좋은 물이 많아 정동이라 불렀고 정부양곡을 보관하는 의창, 흙창,사창이라는 창고가 있어 흉년, 천재가 있을 시 주민에게 양곡을 배급하기도 했던 사창터가 지금도 있음.
송용(松龍)
마을입구에 큰 송목이 있어 설촌 당시 송정으로 불리어 오다 그 송자목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송용으로 개칭
- 옛지명, 송정(松亭) 구전에 의하면 약400년전 조선조 중엽에 장흥마씨 2호가 들어와 성촌하였으며 198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을의 용과 관계되는 일이 많아 송용으로 바뀜.
옴천면 가볼만한 곳
옴천면 좌척마을 입구 산기슭은 매년 10월 초순이 되면 구절초가 만발한다. 절정은 10월 20일 정도가 되어야 된다.
옴천사는 옴천면 정정리 산정물에 자리하고 있다. 후삼국시대 송악에 고려태조 왕건 부친의 터전을 잡아주고 후삼국 통일의 성주가 태어날 것이라 예언한 신라 4대 고승 도선국가사 창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