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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량면 동백리(冬栢里)
개요
동백리는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의 법정리다. 이름은 동백이 많아 불려진 동백마을에서 왔다. 동백마을, 현천마을, 벽송마을이 있다. 큰 길에서 1km를 들어가야 나오는 마을이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동백제오 벽송제가 있어 농사를 짓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읍 동백리(冬柏里)
-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冬柏里)
- 전라남도 완도군 금일읍 동백리(桐柏里)
행정체계
칠양면 법정리
- 단월리 丹月里 : 목암(牧岩),율변(栗邊),월송(月松)
- 동백리 冬栢里 : 동백(冬栢),현천(玄川),벽송(碧松)
- 명주리 明珠里 : 명주(明珠),사구(沙邱)
- 봉황리 鳳凰里 : 덕동(德洞),보련(寶蓮),봉황(鳳凰),사부(砂富)
- 삼흥리 三興里 :신흥(新興),삼강(三康)
- 송로리 松路里 : 구로(舊路),송산(松山)
- 송정리 松汀里 :영계(永桂),송촌(松村)
- 영동리 永東里 :영동(永東),강동(講洞),월궁(月弓),운산(雲山),연곡(蓮谷)
- 영복리 永福里 : 영풍(永豊),만복(萬福),한림(翰林)
- 장계리 長溪里 : 아산(峨山),반계(磻溪),장포(長浦)
- 현평리 峴坪里 : 고현(高峴),신암(新岩)
- 흥학리 興鶴里 : 중흥(中興),학동(鶴洞)
마을 특성 및 지명유래
동백(冬栢) 마을
마을에 동백이 많아 동백정(冬栢亭)으로 불렸다. 해방 후 동백으로 부른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정(亭)은 일본이 마을을 부를 때 종종 붙이는 방식이다. 아마도 해방 후에 정을 빼고 동백으로만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동백마을은 조선 말기 광산 김씨들이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크기 시작했다. 마을은 흐르는 하천을 주변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동백나무가 마을을 덮을 정도였다. 하지만 1980년대 경지정리와 도로 확장을 통해 수많은 동백나무가 잘려 나가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
뱀대가리등
마을의 뒤편 산 봉우리가 뱀의 머리 형상이며, 산의 능선이 뱀처럼 길게 늘어져 붙인 이름이다. 유난히 뱀이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담을밭
밭에 돌이 많아 그 돌을 모아 담을 쌓아서 생긴 이름. 동백마을 뿐 아니라 이 주변이 전체적으로 돌이 많다. 벽송의 ‘깨진밖’을 보라.
망태산
마을 동쪽의 산으로 망태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서재골샘
서재골이 있는 샘
송곳 바위
바위가 송곳 같아 붙인 이름
현천(玄川) 마을
현천은 시내(川)의 물 흐름이 玄자 처럼 흐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1 순 우리말로는 ‘가무내’라고 한다. 그런데 가무내는 검은 내가 아닌가 싶다. 현(玄)은 검다는 한자이기 때문이다. 한자 현(玄)의 변천 과정을 보면 현(玄)은 ‘검다’, ‘검붉다’의 뜻이지만 그 이전에는 활 시위를 뜻했고, 실을 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현’은 검은색 이전에 Z 모양을 본 따 만든 상형 글자였음을 알 수 있다.2
벽송(碧松) 마을
주벽에 소나무가 많은 벽송이라 하엿다. 옛 이름은 함등이라고 했는데 마을 모습이 배(船)를 닮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예전에는 마을에서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은 구멍이기 때문에 배가 가라 앉기 때문이다.
깨진밖
벽송마을 입구에는 깨진 돌들이 많다. 마을 진입로를 공사하면서 바위들을 모아 놓은 곳이라고 한다.
서당마을
벽송마을은 1612년 해남윤씨 윤호찰(1612~1685)이 서당을 개설해 수백년동안 지속되었다. 민선 초대 강진군수 고 김재홍 씨, 고 윤상하 초대 면정, 고 윤옥현 9.10대 면장 등이 모두 벽송 출신이다. 마지막 5.18 수배자였던 윤한봉 선생과 김성원 선생도 벽송 마을 출신이다.3
벽송 마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전남북 책임자로 활동했던 윤한봉 선생의 생가가 있다.
- 수많은 지명 중에 음차나 훈차는 있어도 글자 모양으로 지명을 만든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지명유래를 찾아가면 발견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하여튼 이런 지명은 처음이다. ↩︎
- 나무 위키 현 ↩︎
- 강진일보, 20231123, “[추억과 함께 떠나는 걸어서 고향앞으로] 칠량면 벽송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