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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개요
보성군은 전라남도에 속하며, 남쪽 중앙부에 위치한다. 동으로는 순천시와 접하며, 남으론느 고흥군 서로는 장흥군과 접한다. 녹차밭과 벌교 꼬막이 유명하다. 2읍과 10면을 관활한다.
보성군 행정구역
- 2읍 보성읍 벌교읍
- 10 면 노동면 미력면 겸백면 율어면 복내면 문덕면 조성면 득량면 회천면 웅치면
보성군(寶城郡) 지명유래
보성읍寶城邑
보성이란 단어는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개편하면서 처음 등장한다. 백제시대 복홀군에 속했든데 ‘홀’은 성을 뜻한다. 보성의 성도 성이기 때문에 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 보성인지 정확한 유래가 없다. 아마도 보성지역에 백제시대 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만 할 뿐이다.
벌교읍筏橋邑
벌교읍은 보성군 안에서 가장 먼저 읍으로 승격된 곳으로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가장 돈이 많았고, 부유한 곳이기도 한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한 무대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에는 분령군에 고려시대는 낙안군-양악에 속했다.
벌교라는 지명은 마을 앞에 있던 나무다리(벌교)에서 왔다. 1734년에 지어진 홍교(무지개 돌다리)는 원래 나무다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홍교는 아치형의 무지개 다리를 말한다. 아치교, 홍예교, 무지개 다리 등으로 불린다.2 홍교는 벌교읍 봉림교와 부용교 사이에 있다.
노동면蘆洞面
3조선시대 보성을 가리실이라 불렀다. 가리실은 가곡이란 뜻으로 경치가 좋은 곳이란 의미가 있고, 갈대가 많아 갈대골이란 뜻으로 ‘가리실’이 있다. 보성군의 노동면의 가리실은 갈대라는 뜻이다. 가리실은 노동면 거석리의 옛지명이다.
미력면彌力面
조선말에 미력재에 있던 미륵암(彌勒岩)에 연유하여 미륵면(彌勒面)이라 불렀는데 서기 1919년에 구용문면(舊龍門面)의 우봉(牛峰), 정자(亭子)와 겸백면(兼白面)의 둔기(屯基)부락을 편입시켜 미력면(彌力面)이라 개칭하고 면소재지를 도개리(道開里)에 두었다.4
백제시대 복홀군이라 칭했고, 고려시대는 보성군 미력소로 불렸다. 미력면 소개리와 화방리에 문익점의 위패를 보신 부조묘와 백제시대 복홀군 성지가 있다.
문익점부조묘, 미력면 도개2길 21
문익점의 고향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청이지만 무조묘는 전라남도 보성군 도개리에 있다. 이곳에 남평문씨 종중5이 있기 때문이다.
겸백면兼白面
1914년 겸어면의 금곡, 신기, 대겸 등의 12개리와 복내면 사평리 일부 지역을 병합했다. 이때 겸어면의 겸자와 백야면의 백자를 합하여 겸백면이라 하였다. 겸백면에 대한 이야기는 보성군청 지명유래 <겸백면>에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율어면栗於面
백제시대에는 복홀군(伏忽郡)에, 신라시대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조선시대에는 순천군(順天郡)에 속하였다. 1896년에는 나주부(羅州俯)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보성군 율어면(寶城郡 栗於面)이라 개칭하였고 면소재지를 율어리(栗於里)에 두었으나 6·25이후 문양리(文陽里)로 옮겼다.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나 예부터 밤(栗)이 많아 속칭 “밤어면”의 한자음(漢字音)인 율어면(栗於面)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구전(口傳)이 있으나 지금은 밤이 별로 많지 않다.6
복내면福內面
원봉(圓峰) : 복내면 복내리 복내리는 옛 복성현(福城縣)이 있던 곳으로 전해오며 복성(福城)의 성안(成內)이라고 해서 이를 줄여 복내리(福內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기리, 원봉리, 도화리, 입석리의 각 일부지역으로 병합하여 복내리(福內里)라 하였고 고종31년(1894년) 동학혁명 이 후 복성촌(福城村)을 비봉산 아래 지금의 원봉(圓峰)으로 옮겨 1914년 해정구역 개편시 원봉을 중심으로 복내리를 이루게 되었다. 원봉마을은 오랜 옛적부터 마을을 이루었다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1560년경에 밀양손(密陽孫)씨, 창평고(昌平高)씨가 이주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의 형국이 둥그렇다하여 원봉(圓峰)마을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문덕면文德面
조선중엽(朝鮮中葉)까지 가천현(可川縣)에 속해 있다가 말엽(末葉)에 동복현(同福縣)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동복현(同福縣), 문전면(文田面)의 덕봉(德峰), 척치(尺峙), 옥채(玉釵), 장동(長洞), 백사(白沙), 단양(丹陽), 수월(水月), 가천(可川), 율리(栗里), 신운(新雲), 대운(大雲), 무탄(舞灘), 석동(石洞), 강각(江角), 상죽(上竹), 하죽(下竹), 외동(外洞), 외우(外牛), 내우(內牛), 중우(中牛), 곡천(曲川), 장산(獐山)의 22개리와 보성군(寶城郡) 봉덕면(鳳德面)의 부곡(富谷), 강변(江邊), 내동(內洞), 금천(錦川), 양지(陽地), 법화(法化), 대치(大峙), 동계(東溪), 내판(內板), 축치(축峙), 외교(外橋), 반송(盤松), 마치(馬峙), 반월(半月), 오리(梧里)의 15개리로 개편하여 문전면의 “문”(文)자와 봉덕면의 “덕”(德)자의 이름을 따서 “문덕면”(文德面)이라 개칭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 령(令) 제6542호의 의하여 동교리(東橋里)는 복내면(福內面)으로 한천리(寒天里)는 승주군 송광면 재개편 9개리로 운영되어 오다가 1985년 1월 17일 주암댐 수몰지역으로 고시되어 가구 및 경지면적의 40%가 수몰되는 실정으로 보성군에서 가장 적은 면(面)이 되었다.
조성면鳥城面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동노현(冬老縣)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는 군령현(郡領縣)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조양현(兆陽縣)이라고 하였다. 1396年(朝鮮太祖 4年)에는 고흥군(高興郡)에 속(屬)해 있었으나, 1442年(世宗 23年) 폐현(廢縣)되어 조양면(兆陽面)에 편입(編入) 되었다. 1911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廢合)에 의하여 조양면(兆陽面)과 대곡면(大谷面)을 합(合)하여 조성면(鳥城面)으로 개칭(改稱)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지금 면 소재지는 조성리(鳥城里)로 운영(運營)되고 있다.
득량면得粮面
득량은 득량만의 이름에서 왔다. 득량이란 지명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득랑면 비봉리 앞섬(득량도)에 이순신 장군이 대치하던 중 아군의 식량이 떨어지자 비봉리 선소에서 식량을 조달했다고 한다. 왜군을 퇴치한 후 이곳에서 식량을 얻었다 하여 얻을 득(得), 곡식 량(糧)를 써어서 득량이라 불렀다고 한다. [출처 레일광장7]
회천면會泉面
백제시대에는 마사량현(馬斯良縣)이라 하였으며 당시 읍치(邑治)는 현재 회천면 회령리였고,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년) 복홀군(伏忽郡)이 보성군으로 바뀌고 마사량현이 대로현(代勞縣)으로 바뀌면서 보성군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 태조 23년(940년) 영현인 대로현이 회령현(會寧縣)으로 바뀌었다. 인종2년(1124년)에 영암군의 속령인 정안현(定安縣)을 장흥부(長興府)로 승격시켜 영암에서 독립하면서 보성군에 속한 회령현(會寧縣)을 장흥부(長興府)의 속현으로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장흥군의 회령면(會寧面과 천포면(泉浦面)이 보성군에 편입 되었으며, 1931년 조선총독부령 제100조에 의한 행정구역 변경으로 1932년 3월 회령면과 천포면을 합하여 회천면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웅치면熊峙面
원래 견주에 속해있던 본면(本面)은 1545년(조선인종원년(朝鮮仁宗元年)) 장흥군을 신설하면서 장흥에 속하게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회령·율포 등과 함께 다시 보성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곰재”라는 우리말을 한자음인 웅치(熊峙)로 표기하여 면의 명칭으로 삼았다. 곰재의 유래는 장흥과 접경해 있는 제암산 산영(山嶺)에 곰바위가 있어서 이 고개를 곰재라 부르게 되었다. 소재지인 중산리(中山里)를 포함하여 6개리로 편성되어 있다.
[문서 출처]
이 글은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위키백과 보성군 작성자 장길산
↩︎ - 홍교에 대한 이야기는 국가유산청 <보성 벌교 홍교>에서 더 자세히 읽을 수 있다. ↩︎
- 애광 김현호의 “가리실 노동‘이란 시에 가리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
- 출처 보성군청 지명유래 미력면 ↩︎
- 이 부분은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의 [문익점 부조묘 관련 문서 일괄 (文益漸 不祧廟 關聯 文書 一括)]을 참고 바람 ↩︎
- 보성군홈페이지 지명유래 “율어면” ↩︎
- 보성 득량면 추억의 거리& 가볼만한곳 총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