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완도군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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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

완도군(莞島郡) 전라남도 최남단에 속하는 곳으로 모두 섬으로 이루어진 군이다. 1968년 12월 완도대교의 개통으로 완도는 섬으로서 기능을 상실했고 이후 신지대교 등이 대거 건설되면서 적지 않은 섬들이 다리를 통해 이동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보길도, 오완도, 대무도, 청사도 등은 여객선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다.

완도군 행정구역 및 지명 유래

이곳에 소개된 지명유래와 연혁은 전라남도 완도군청 홈페이지 ‘읍면소개’에서 수정 없이 가져왔습니다. 각 인용글에는 출처를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완도군청 읍면소개 링크는 문서 하단에 따로 정리했습니다. 출처 표시가 없는 것은 필자가 다른 자료를 통해 정리했거나 각주를 따로 처리했습니다.

완도(莞島)

완도 지명에 대한설은 세 가지가 전해진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왕골 풀과 같다는 설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원도가 완도로 와전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851년 벽골제로 끌려간 청해진 유민들이 고향 생각만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혀 빙그레 웃는 의미를 가진 완(莞)자를 사용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다.

완도읍(莞島邑)

고종 33년(1896년) 설군과 함께 군의 중심지에 있다하여「郡內面」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莞島面」이라 하였고, 1943년 읍승격과 함께[莞島邑]이라 칭하였음.

완도읍 역사
  • 신라 흥덕왕 3년(828년) : 죽청리,장좌리 일대에 청해진을 설치
  • 신라 문성왕 3년(851년) : 청해진 폐진
  • 조선 중종 17년(1522년) : 소가용리에 가리포진을 설치
  • 조선 고종 31년(1894년) : 가리포진 폐진
  • 고종 33년(1896년) : 설군으로 郡內面이라 칭함
  • 1914년 : 행정구역 개편으로 莞島面이라 개칭
  • 1943년 : 邑으로 승격
  • 1973년 : 군외면 대야1 · 2리가 本 邑으로 편입

완도읍 관할 법정리 / 행정리

가용리 / 대가용리, 소가용리, 신기리, 신기1리, 신기2리
군내리 /개포1리, 개포2리, 개포3리, 남성리, 남향리, 노두리, 당산리, 동망리, 망남리, 서성리, 성내리, 용암리, 주도리, 중앙리, 항동리
대신리 / 대구리, 대신리
대야리 / 대야1리, 대야2리
망석리 / 망석리, 석장리
장좌리 / 장좌리
정도리 / 정도리
죽청리 / 죽청리
중도리 / 도암리, 사정리, 중도리
화흥리 / 부흥리, 화개리

금일읍(金日邑)

금일읍은 평일도를 중심으로 유인도가 10개 무인도가 33개에 이른다. 지형을 보면 고흥의 거금도와 장흥군의 회진항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일도는 약산 당목항까지 차로 이동하여 철부선을 타면 된다.

금일읍 역사
  • 고려시대 : 장흥부 관산면에 소속
  • 1621년 : 평일도와 생일도는 고금진에 이속 (금당도는 계속 장흥부에 소속)
  • 1890년 : 여수군 거문진으로 이속
  • 1896년 : 완도군 신설로 평일면, 생일면, 금당면이 설치
  • 1916년 : 평일, 생일, 금당 3개면을 합하여 금일면으로 개칭
  • 1962. 1. 27 : 금당출장소 설치
  • 1971. 5. 24 : 생일출장소 설치
  • 1980. 12. 1 : 금일읍으로 승격
  • 1986. 4. 1 : 금당출장소가 금당면으로 분면
  • 1989. 4. 1 : 생일출장소가 생일면으로 분면

금일읍 관할 법정리 / 행정리
  • 동백리 / 동백리, 황제리
  • 사동리 / 다랑리, 섭부리, 소랑리, 우도리, 죽동리
  • 신구리 / 구동리, 신평리
  • 월송리 / 월송리
  • 장원리 / 장도리, 원도리
  • 장정리 / 도장리, 일정리
  • 척치리 / 신도리, 척치리
  • 충동리 / 궁항리, 동송리, 용항리, 충도리
  • 화목리 / 감목리, 상화전리, 하화전리


노화읍(盧花邑)

대당마을에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석묘 북방식 고인돌이 있어 선사시대 이전에 염등마을에 입도하여 거주했을 거라고 추정되며, 시대미상이나마 제염을 하였다고하여 염등마을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논으로 변했으나 마을앞에 300㏊에달하는 갯벌에 갈대가 서식하고 갈대 꽃이 만발하여 노화라 칭하였다 한다.

  • 1694년 영암군에 속함
  • 1870년 삼도진설치(노화도, 보길도, 넙도)
  • 1896. 4. 1 완도군 설치(노화면, 보길면, 넙도면으로 분면)
  • 1916 노화면으로 통합
  • 1964. 8. 24 넙도출장소 설치
  • 1980. 12. 1 노화읍으로 승격(대통령령 제10050호)
  • 1982. 10. 1 보길출장소 설치
  • 1986. 4. 1 보길면 분면

군외면(郡外面)

완도읍과 같은 권역(圈域)에 속해 있었으나 고려 현종 때부터 1855년(정종 6년) 까지는 현재의 군외면(郡外面) 관할구역이 삼분(三分)되어 대창리(大昌里),영풍리(永豊里),불목리(佛目里), 사후도(伺候島), 고마도(古馬島), 토도(兎島)는 강진현 (康津縣)에 속했으며, 남선리(南仙里),황진리(黃津里),용계리(龍溪里),중리(仲里) 달도리(達島里)와 기타 도서는 영암군(靈巖郡)에 속하였고, 당인리(唐仁里)에서 원동(院洞)까지는 해남군 은소면(海南郡 銀所面)에 속했었다.

그후 加里浦鎭이 獨鎭되면서 1855년부터 東西 兩面으로 갈라서 郡外面을 외면(外面) 이라고 중분리(中盆里),정돌리(正突里),화개동(花開洞),부흥리(復興里),대구미(大口味), 신정리(新亭里), 당인리(唐仁里), 두읍리(斗邑里), 삼장리(三莊里), 갈문리(葛文里) 화학동(化鶴洞), 대산리(大山里), 신흥리(新興里), 방축리(防築里), 망리(望里), 석장리 (石場里), 도암리(道岩里)를 관장했었다.

1896년 2월3일 완도군이 설군(設郡)되면서 외면(外面)을 군외면(郡外面)이라 개칭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야리(大也里),영풍리(永豊里),불목리(佛目里),황진리(黃津里) 원동리(院洞里)를 군외면의 관할로 한 반면에 신정리(新亭里)에서 망리(望里)까지의 지역 을 군내면(郡內面)으로 이전하였으며 신정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대문리(大文里)로 옮겼다가

1917년 대문리에서 면사무소를 원동리 현위치로 신축이전하였다.


신지면(新智面)

신라시대 청해부, 고려 ~ 조선 초 장흥부, 이후 강진현에 속함. 현종 대 양마지로 정함. 숙종 7년 송곡리 수군방어진 설치.

1681 1896년 설군과 함께 완도군에 편입 후 신지면 설치.

2005년 12월 14일 신지대교 개통신지대교는 완도읍 가용리~강독리(국도 77호선) 길이는 2,360m 폭은 15.5m로
(연육교 840m 접속교 2개소 180m, 접속도로 1,340m) 사업비는 744억원으로 1998년~2005년의 사업을 거쳐 준공.


고금면(古今面)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부속되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탐진현(眈津縣)에 속해 있으면서 828년 완도에 청해진이 설치되어서 그 기간중에는 이웃 신지도와 조약도가 함께 그 관하에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1124년 탐진현에 신설된 장흥부(長興府)에 편입되어 장흥부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 1417년(태종 17년) 도강군(道康郡)과 탐진현을 합하여 강진현(康津縣) 으로 개편됨으로써 대구면 고금도로 1896년 본군이 설군되기까지 480년간 강진에 속해 있었다.고금도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절략의 요충지로 1598년 2월 18일 덕동(德洞)에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수군본영을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왜적을 전멸한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그 후 1600년(宣祖 33년) 소모별장(召募別將) 진을 두었 다가 곧 없애고 1673년 별장(別將)진을 베풀었다. 여기서 별장(別將)이라함은 산성(山城), 도진(渡津), 포구(浦口), 보첩(保疊), 소도(小島)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 벼슬을 말한다.

1681년 고금도진(鎭)을 덕동에 비로소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두어 조약도, 평일도, 생일도 등을 관장하고 해상을 방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생일도, 평일도는 거문도진에 이속하고 1895년 7월 15일 군제개혁으로 215년간의 고금도진은 없어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도명(島名)을 고이도라고 하였는데 차차 변하여 고이도가 되었다 고금도(古今島)로 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여지승람 경국대전). 군이 생기기 이전 강진현에 속해 있어면서 1681년(숙종 7년)고근도진이 설치된 후부터는 호적과 사송(詞訟)은 강진현에서, 군무와 기타 행정은 고금도진에서 관장하였으며 징세(徵稅)와 행정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농소면과 남면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군이 설립된 후 1910년에 고금면으로 통합하였다.

그 당시 본 도의 총 지세(地稅)는 220結로 농소면의 95결은 강진현 호조에 봉납 하고 남면의 125결중 98결은 양청(糧廳;寧平君 地 徵稅)에 상납하고 남은 27결은 신지진 호조가 맡았으나 1886년부터 원장과 함께 관왕묘(關王廟)로 이관했다. 이관된 이 제도는 설군 후에도 둔전(屯田) 및 사토제로 존속되어 1910년까지 지속되었었다. 농상리에 두었던 고금면사무소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조약면을 폐합하여 덕동리로 면사무소를 신축 이전하였으며 이때부터 상근 집무가 시작되었다. 해방후 1949년 4월 1일 조약도가 본 면에서 분면되어 약산면으로 독립되어 나가고 면사무소는 다시 농상리로 이전하였다.

  • 1384년 용초리에 천씨가 입도 거주
  • 1598년 덕동에 고금진 설치 (강진에 예속)
  • 1896년 완도군 설군으로 완도군에 편입
  • 1949년 고금면에서 약산면이 분면과 동시 면사무소를 덕동리에서 농상리로 이전
  • 1977년 현 청사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약산면(藥山面)

청산면(靑山面)

청산면(靑山面)은 한때 仙山(선산), 仙源(선원)이라 불렸으며 신라시대 (新羅時代)부터 많은 주민이 살았다는 것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되나 구전(口傳)에 의한 것이며 기록은 찾아볼수 없고, 고려(高麗)때는 탐진현 (현 강진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임진왜란으로 외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정부에서 도서금주령을 내려 한때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선조 41년(1608년)에 처음 入島 거주하였으며, 숙종 7년(1681년) . 수군만호진이 설치된 이후부터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서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고종 3년(1866년)에는 당리에 독진을 설치하여 왜구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그후 고종 33년(1896년) 완도군(莞島郡) 창설 (創設)에 따라 완도군(莞島郡) 산하 청산면(靑山面)이 되었다.

1964년 10월 1일 대모도 동리에 모도출장소를 설치 하였고 빼어난 자연 경관으로 인하여 1981년 12월 23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구전에 의하면 청산도는 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청(靑 푸를청) 산(山 뫼산)자를 따서 청산이라 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1608년 (선조 41년) – 입도 거주
  • 1681년 (숙종 7년) – 수군만호진 설치
  • 1866년 (고종 3년) – 당리에 진 설치
  • 1896년 (고종 33년) – 완도군 설군으로 청산면 설치
  • 1964년 10월 1일 – 모도출장소 설치
  • 1981년 12월 23일 –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 2007년 12월 1일 –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승인
  • 2011년 국제슬로시티연맹 세계슬로길 1호 등록
  • 2013년 구들장 논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 선정
  • 2013년 6월 – 국제슬로시티 연맹 슬로시티 재인증
  • 2014년 4월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소안면(所安面)

소안도(所安島)가 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숙종 10년(1684) 6월 9일;김석주가 산산의 궁방의 땅과 금위영이 사들인 영암 땅의 소안도(所安島)와 비미도에 관해 말하다」의 1684년이다. 1627년의 이진진 설치는 단순히 국방의 임무만이 아닌 제주 내왕업무도 관장하였다. 옛날에 강진 탐진포와 해남 관두포에서 제주내왕을 관장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진에서 제주를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소안도 월항리(月項里)를 거쳐 오가도록 하였다. 이진과 소안 사아에는 잔잔한 바다이나 제주와 소안 사이는 가없는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치게 된다. 이렇듯 소안은 관헌들의 입에서 입으로 또 조정으로 번져가 결국 관찬(官撰) 지명으로 이진진 설치(1627년) 이후에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발생된 지명이다.

또한 섬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기개가 용맹함으로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한여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바소(所), 편안안(安) 섬도(島) 소안도 라 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피난민이 이주하면서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았던 섬” 이라고 할 정도로 항일 민족 해방운동의 역사가 곳곳에 스며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도명(島名)은 소안(所安)이나 민불안(民不安)이요, 산명(山名)은 가학(駕鶴)이나 학불래(鶴不來)’라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항일투쟁의 함성이 드높았던 선열들의 애국심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 소안도의 또 하나의 자랑이다.

금당면(金塘面)

금당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삼국시대에 금일읍, 생일면과 함께 오차현(烏次懸)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아현(烏兒懸)에 속하였다.고려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했다가 1896년에 완도군 설군으로 평일면.생일면과 함께 금당면으로 완도군에 소속되었다

그후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금당면.평일면.생일면3개면을 합하여 금일면으로 개편되어, 1962년 1월 27일에 금당도에 금일면 금당출장소가 설치되었다.1980년에 금일읍 승격으로 금일읍 금당출장소로 개칭되다가 1986년 4월1일 금당도와 비견도, 허우도, 화도의 4개 유인도와 부속 무인도를 그 구역으로하여 금당면으로 분리.승격되었다.

보길면(甫吉面)

보길도의 지명유래 설

보길도(甫吉島) – 배골두, 보고리, 보고래 / 보길도’라는 표기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에 등장하고 있어 그 구전 명칭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전래 고유어 지명을 고산(孤山)이 한자로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추측한 것은 잘못이다.

‘뵈골두~배골두’라 부르는 학설 / 바구리의 옛말 ‘보고리’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의 보길도는 백도 쪽을 제외하면 바구니 모양이다. 인근 도서민들이 바구리 섬이라고 부르곤 했다.

‘보고래’로 부르는 학설 / 보+가래’로 분석될 것으로 보인다. ‘보’는 나무와 관련된 형태소로 짐작되며, ‘삽’을 뜻하는 고어로 보인다. 나무로 만든 보습의 방언형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습이란 쟁기를 뜻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 영암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 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겼다 한다. 부자는 월출산에 있는 한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군데가 있는데 10군데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군데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이 섬을 보길도라 불렀다고도 한다.

  • 1896 年 고종 33년 설군으로 보길면 설치
  • 1914年 3月 노화면으로 통합
  • 1980年 12月 1日 노화면이 노화읍으로 승격
  • 1982年 10月 1日 보길출장소 설치
  • 1986年 4月 1日 보길면으로 승격

생일면(生日面)

  • 1896년(고종33년) 완도군 설군 – 생일면 설립
  • 1916년 평일.생일.금당을 합하여 금일면이라 칭함
  • 1980년 금일읍 승격으로 금일읍 생일출장소로 개칭
  • 1989년 4월 1일 생일출장소 → 생일면으로 승격

[참고 자료]

완도군청 읍면소개

위키백과 완도군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 전라 제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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