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시 봉평동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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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동(鳳坪洞)

봉평동 개요

봉평동은 미륵동에 자리하고 있다. 통영대교를 지나 만나는 곳이 미수동이고, 왼쪽으로 좌회전하여 도남관광단지로 들어가는 길에 자리한 곳이 봉평동이다. 통영 안에서 봉평동은 외진 곳이다. 접근성이 좋지 않고, 환경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도남동은 관광단지가 있고, 미수동은 통영대교와 접하고 있어 그런대로 괜찮지만 봉평동은 여러 면에서 애매한 곳이다.

봉평동은 남서로 미륵산이 자리하고 있고, 북동방향으로 내려가는 형세로 거의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닷가 쪽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가파른 산지 형태로 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지 않다.

하지만 봉평동의 장점도 있다. 먼저는 항구를 접하고 있어 호텔과 다찌, 해변로가 있어 볼거리 먹거리가 많다. 김춘수 유품 전시관이 잇어 김춘수를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

통영시내 지도
통영시내 지도

봉평동 역사

봉평동은 통영에서도 가장 오래된 지역 중의 하나이다. 봉숫골, 해핑이, 서송징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봉숫골은 미륵산에 있던 봉수대에서 유래한 마을이다. 조선시대부터 봉수동으로 불렸고, 일제강점기 때 봉수동, 해평동, 서송동을 통합하여 봉평동이라 하였다.

봉평동 지명유래

1914년 해평동과 봉수 서송동 도산동의 일부가 합쳐져 봉평동이 되었다. 봉평동은 봉수동과 해평동에서 한자씩 가져와 합성한 것이다.

봉숫골

미륵산에 있던 봉수대에서 유래한 마을이다. 지금도 이곳에 올라가면 깊은 산속 느낌이 든다.

해평동

해평이란 지명은 봉평동의 바닷가 마을이며, 고려시대부터 불려진 해빈부곡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동해평동리, 동해평동우로 불리다 줄여서 해평동이라 했다. 해평동에는 해평열녀 이야기가 전해져 오며, 통영말로 이 지역을 ‘해핑이’라고 말한다.

봉평동 유적지 또는 기관

  • 통영고등학교
  • 통영중학교
  • 한려초등학교
  • 남포초등학교

해평열녀사당

  • 경남 통영시 봉평동 52

해평열녀사당은 김춘수유품 전시관 바로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바닷길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다.

해평열녀 (海坪烈女)1

옛날 용화산[彌勒山] 아래의 해평(海坪) 마을에 한 열녀가 있었는데, 그들 부부의 성씨는 물론 생몰 연대 또한 상세히 전하는 바가 없기에 사람들은 다만 그들이 살던 동리 이름을 따서 해평열녀(海坪烈女)라 칭하고 있다. 젊은 부부가 이곳으로 이주해(일설에는 부인이 이 마을로 시집왔다고도 함) 온지 불과 몇 달만에 그녀의 남편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거센 풍랑에 휩쓸려 그만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남편의 사고를 전해 들은 부인은 남편과 같이 배를 타고 갔던 사람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그가 빠진 곳을 향해 곧장 찾아갔으나 바다는 더없이 넓고 아득할 뿐이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한없이 그리다가 결국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러고는 사흘이 지난 후 남편의 시신을 끌어안은 부인의 시체가 다시 바다 위로 떠오르니,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들 경탄하며 과연 열녀라고 칭송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여운 이들 부부의 시신을 거두어 양지 바른 곳에 함께 묻어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동리의 나뭇잎들에는 벌레들이 갉아 먹으면서 『열녀(烈女)』란 두 글자를 뚜렷하게 새겼으며, 이런 기이한 일은 온 산으로 번져 주위의 모든 산들의 나뭇잎에는 모두 이러한 글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통제사가 내아(內衛) 뜰에서 세수를 하려고 하는데 대야에 버들잎이 연이어 떨어지기에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烈女」라고 새겨져 있지 않은가.


분명 무슨 곡절이 있을 것으로 여긴 통제사는 급히 이방을 불러 이를 알아보게 했더니, 해평열녀의 가련한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소상히 아뢰는 것이었다. 통제사는 즉시 해평마을 바닷가에 열녀비와 사당을 세워 그녀의 원혼을 달래는 한편 사회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해평열녀 설화는 이 고장 통영에 전해오는 수많은 열녀이야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설화이다. 그 사당(祠堂)과 기실비(紀實碑)는 지금도 온전히 남아 전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곳 봉평동 해평마을 (속칭「해핑이」)의 「해평열녀각보존회(海坪烈女閣保存會)」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3월 3일(삼짇날)과 9월9일(중양절)에 각각 향사를 지내고 있다.

해평 열녀 유적비문(海坪 烈女 遺蹟碑文)은 다음과 같다.

                                             古海坪烈女紀實碑

龍山之下 海坪里 古有烈女 夫人姓氏年代未能詳知 從其所居里名 世稱海坪烈女矣 夫人嫁于本里 재數月 其夫因漁事 出海

爲風濤所엄 夫人聞變 請其與夫同舟之人 심往其漂沒處 滄海無涯一粟杳然 遂挺身投海 經三日 屍抱夫屍而浮 見者無不驚歎

里人收而同취之 里中樹葉 蟲蝕成篆 昭著烈女二字 遍延四山 事載統制營誌 如非天感之烈 胡能至此 古之曺娥 負父而出

事雖不齊 其至誠所致 殊塗同歸 往在丁亥 士人許珍 於海坪里 捐자建祠而妥靈之 乃若紀實闡明則未遑焉 今者里社諸彦得鄕論

方欲伐石紀實 使同志李鍾彦 屬余爲文 辭不得已 是以之記

                                              壬申二月      日         完山 李鴻默 謹撰
                                                                             監董 幼學 姜時中 崔晟洛
                                                                             幹事      金守鳳 鄭奉勳

봉평동 지석묘(統營 鳳坪洞 支石墓)

  • 경남 통영시 봉평동 67-2

경상남도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 남방식 형태의 고인돌/지석묘이다. 일본 큐슈 지방의 고인돌과 닮은 것을 보면 일본과 교류한 흔적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2 상당수의 지석묘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민가가 들어서면서 훼손되어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는 상태다. 고인돌 사진은 네이버 블로그 [통영시 공식 블로그] 청동기 고인돌이 있는 통영 봉평통 지석묘에 잘 나와 있다.

전혁림 미술관

봄날의책방

통영시 봉평동 소재의 출판사로 주로 남해바다에 관련된 책을 출간하고 있다.

봄날의책방 홈페이지

봄날의 책방, 이미지는 홈페이지 캡쳐

한빛문학관

용화사

  1. 이글은 다음카페 [<통영문화연구소> 해평열녀]에서 가져왔다. 내용을 보면 통영시가 정리한 것을 올려 놓은 것 같다. ↩︎
  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영 봉평동지석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