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악양면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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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면(岳陽面)

악양면(岳陽面)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하동군의 면이다. 동쪽으로 적량면, 서쪽으로는 화개면, 남쪽은 하동읍과 섬진강을 건너 광양시 다압면, 북쪽은 청암면과 접하며 1도, 1시, 5읍면과 접하고 있다. 지세는 1면 1촌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지리산 준령의 삼면이 분지형 산악이며 중심부는 악양천이 흐르고 토지는 비옥하다.

하동군 행정구역
하동군 행정지도

행정구역

  • 미점리(美店里)
  • 축지리(丑只里)
  • 신대리(新垈里)
  • 신성리(新星里)
  • 신흥리(新興里)
  • 중대리(中大里)
  • 동매리(東梅里)
  • 등촌리(登村里)
  • 매계리(梅溪里)
  • 정동리(亭東里)
  • 정서리(亭西里)
  • 입석리(立石里)
  • 봉대리(鳳坮里)
  • 평사리(平沙里)

지명유래

악양면

악양면(岳陽面)의 지명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악양현(嶽陽縣)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악양(嶽陽)이라는 이름은 작은 산을 뜻하는 ‘악(岳)’과 볕을 뜻하는 ‘양(陽)’이 합쳐진 것으로, ‘작고 따사로운 곳’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지역은 본래 삼한시대 변한의 낙노국에 속했으며, 삼국 시대에는 소다사현(小多沙縣)으로 불렸습니다. 이후 757년에 악양현으로 개칭되었고, 진주목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악양이라는 이름은 중국 후난성의 웨양(岳陽)과 유사하며, 이와 관련된 여러 지명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점리(美店里)

악양면의 미점리는 미점마을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오래전부터 섬진강을 끼고 형성된 마을입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개치(開峙)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시장이 열리던 곳으로도 유명했습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미점동, 상개치동, 하개치동이 통합되어 현재의 미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미점리의 자연환경은 뒤로 구자산이 솟아 있고, 섬진강이 앞으로 흐르는 풍경을 자랑합니다. 마을은 개치, 미동, 미서로 나뉘어 있으며, 이 지역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축지리(丑只里)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丑只里)는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진 마을로, 변한시대 낙노국의 영역에 속했던 지역입니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진주목 악양현의 일부였으며, 둔위(屯衛) 또는 축촌(丑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702년(숙종 28년)에 하동군 관할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축지동(丑只洞)과 축동동(丑東洞)이 합쳐져 지금의 축지리가 형성되었습니다.1

축지리는 자연적으로 구자산이 뒤를 감싸고 있으며, 넓은 악양들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 지역은 대봉감 시배지로도 유명하며, 축지리 대축마을 뒷산인 아미산에 자리한 문암송(천연기념물 제491호)은 이 마을의 상징적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대리(新垈里)

악양면 신대리는 본래 “새로운 터”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상신대(上新垈)와 하신대(下新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은 변한시대 낙노국의 일부였으며, 새로 개척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새터’ 또는 ‘신대(新垈)’라고 불렸습니다. 1702년(숙종 28년)에 하동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신대, 신중 지역이 합쳐져 오늘날의 신대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비까리와 새모”라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형제봉 때문에 이대, 삼대에 걸친 부자 집안이 형성되지 못하자 형제는 각기 다른 곳으로 이주했습니다. 형이 이주한 곳은 ‘새동네’라는 뜻의 상신대(새모)로, 동생은 형제봉에서 비껴 앉은 하신대(비까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신성리(新星里)

하동군 악양면 신성리(新星里)의 지명은 자연마을인 신덕(新德) 마을과 성두(星斗)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두 마을의 이름은 마을 앞들에 고인돌이 북두칠성처럼 배치되어 있다는 지형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성리는 1702년(숙종 28년) 하동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덕동과 성두동이 합쳐져 신성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악양천을 끼고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농업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신흥리(新興里)

하동군 악양면 신흥리(新興里)는 상흥(上興)과 하흥(下興) 마을이 통합되어 형성된 법정리입니다. 마을의 이름은 ‘새롭게 흥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1702년(숙종 28년)에 하동군에 편입되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흥동과 하흥동이 통합되어 현재의 신흥리가 되었습니다.

신흥리는 악양분지의 왼쪽 지맥인 칠성봉 서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넓은 평야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악양천이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어 농업과 관련된 활동이 발달하였습니다. 문화유적으로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92호인 하동 금봉사 소장 동조 보살 좌상이 있습니다.

중대리(中大里)2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는 본래 상중대(上中大)와 하중대(下中大)라는 두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변한시대에 낙노국의 일부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진주목 악양현에 속해 있었습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상중대동과 하중대동이 통합되어 지금의 중대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중대리는 악양분지 동쪽의 칠성봉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악양천 주변에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어, 주민들이 농업을 중심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중대리는 상중대와 하중대라는 자연마을로 나뉘어 있으며, 총 96가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역사가 오래된 산촌이지만, 외딴 곳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도 악양천을 따라 넓은 농경지가 유지되고 있어, 주민들에게 중요한 생계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동매리(東梅里)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는 약 300~400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지명은 매계리 동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동매(東梅)’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적으로 ‘동국설중매지형국(東國雪中梅)’에서 따왔다고도 하며, 외딴 산이 있어 ‘독매’ 또는 ‘동매’라고 불린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부산시 사하구에도 ‘동매산’이란 지명이 있다. 이곳에서 동매는 ‘동뫼’로 ‘동쪽의 산’이란 뜻이다. [부산시 사하구 지명유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매와 평촌이 합쳐져 현재의 동매리가 형성되었고, 마을은 악양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매리에는 만수대, 당산정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으며, 지금도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매 당산제를 지내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등촌리(登村里)

등촌리(登村里)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오래된 마을 중 하나입니다. 이 마을은 변한시대 낙노국의 일부였으며, 이미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촌락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당시 주민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중심지였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1633년에는 당지촌 혹은 삼가식으로 불렸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산과 기증봉, 청학 등의 지역을 통합하여 현재의 등촌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덕기와 중기라는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풍부한 자연환경과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매계리(梅溪里)

하동군 악양면 매계리(梅溪里)는 매화가 흐르는 계곡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본래 “매골”로 불렸으며, 매화를 음차하여 ‘매(梅)’로 표기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매국대(梅菊臺) 밑에 흐르는 계곡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매계리는 청학동 전설과 관련이 깊으며, 조선시대 산수가 빼어나 청학동으로 지목된 지역입니다. 조선 초기 학자 김종직의 기록에서 이곳을 청학동으로 비정하였으며, 이후 여러 문헌에서 청학동의 실제 위치로 전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매계리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매계동과 노전동이 통합되어 매계리가 형성되었으며, 현재는 매계와 노전 마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환경으로는 성제봉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악양천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어 농경지로 적합한 환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동리(亭東里)

하동군 악양면 정동리(亭東里)는 마을 동쪽에 큰 정자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동리는 청동기 시대부터 형성된 매우 오래된 마을로, 유적이 많고 선진 문물이 일찍이 들어온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부계(鳧溪)와 정동이라는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마을이 합쳐져 지금의 정동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정동리에는 유서 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유물 산포지로서 조선 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정동리 유물 산포지가 있으며, 이 외에도 고종 시절의 효자각과 관련된 유적도 있습니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최치원이 썼다는 “만수동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정서리(亭西里)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亭西里)의 지명은 옛날 마을의 큰 정자인 취간정의 서쪽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 변한의 낙노국 중심지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마을입니다. 정서리 마을은 1680년경 밀양 손씨 가문이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후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정서리는 서쪽으로 지리산 성제봉을 등지고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악양천 주변에는 취간림이라는 아름다운 숲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특히 대봉감의 명산지로 전국에 알려져 있으며, 최참판댁 같은 유명 관광지와도 가깝습니다.

입석리(立石里)

하동군 악양면 입석리(立石里)는 마을 뒤 논에 있는 큰 선돌(立石)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 선돌은 신석기시대 유물로, 높이 약 7m에 이르는 거대한 돌로 마을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입석리는 원래 화개면에 속했던 입석동과 악양면의 하덕동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통합되어 형성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고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온 흔적이 있으며, 마을 주변에서 고인돌과 같은 선사 시대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입석리에서는 매년 동신제라는 제사를 지내며, 입석(선돌)을 중심으로 지역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봉대리(鳳坮里)

봉대리(鳳臺里)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 위치한 마을로, 그 지명은 중국의 금릉 봉황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을의 경관이 아름다워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과 비교되었으며, “봉황이 깃드는 곳”이라는 뜻에서 봉황대(鳳凰臺)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후 ‘황(凰)’자를 생략하고 봉대(鳳臺)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봉대산은 전국에 많이 흩어져 있는데, 대부분 봉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대리는 상고시대 금석병용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온 유서 깊은 마을로, 진주목 화개현의 일부였고, 1702년(숙종 28년) 하동군에 편입되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촌, 하평과 통합되어 현재의 봉대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름다운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유물이 발견된 봉대리 유물 산포지도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마을 남쪽에는 봉황대가 있으며, 주민들은 이곳에서 경치를 즐기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평사리(平沙里)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섬진강이 만들어낸 넓은 평야를 가진 마을로, 그 이름은 중국의 소상팔경 중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본래 진주목 화개현에 속했던 곳으로, 1702년 하동군에 편입되었습니다.

평사리는 특히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주요 무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최참판댁과 같은 관광 명소가 있습니다. 또한, 섬진강과 접한 이 평야는 비옥한 농토로서 오랜 기간 농업이 번성해 온 곳입니다​. 현재도 평사리는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 덕분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며, 특히 가을에는 안개가 낀 들판의 풍경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1. 출처 디지털하동문화대전 ‘축지리’ ↩︎
  2. 중대리의 글은 대부분 디지털하동문화대전 ‘중대리’에서 가져와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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