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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읍(河東邑)
하동읍(河東邑)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행정, 산업, 교통의 중심지로 섬진강 하구로부터 약 30km 상류 동안에 위치한 하항이다. 전라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전주, 김천과 더불어 남부 3대 시장의 하나로 섬진강을 통하여 경상남도 서부와 전라남도 일부의 해산물과 임산물이 집산되는 곳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다. 지금은 경상남도 서부의 관문으로 채소, 담배, 임산물들의 생산량이 많고 지리산의 길목에 위치한 곳으로 변하였다.
하동의 지명유래
하동읍의 지명 유래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이 지역은 변한의 소국 중 하나인 낙노국(樂奴國)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신라 시대에는 “진답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757년 신라 경덕왕 때 하동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하동의 이름은 “강 동쪽”이라는 의미로, 섬진강 동쪽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1906년 “덕양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8년 하동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동읍의 역사
하동읍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시작됩니다. 하동 지역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낙노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진촌”으로 불리다가, 687년 신문왕 7년에 “진답향”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후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진주목에 예속된 하동현이 되었으며, 757년 신라 경덕왕 때 “한다사군”에서 “하동”으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하동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938년 하동면이 하동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하동은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있어 물류와 농산물 교류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지금도 경남 서부의 주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선사시대 – 하동초등학교 뒷산에서 발굴된 돌칼. 돌화살과 목도리 조개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등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정착생활 시작
- 삼한시대 – 변한 낙노국 진촌
- 신라시대 – 687년 신문왕 7년, 진촌에서 진답향으로 개칭
- 고려시대 – 1018년 현종 9년 진답향은 하동군의 속현으로 진주목에 예속
- 조선시대 – 1703년 숙종 29년 진답리를 진답면으로 개칭
- 구한말 – 1906년 9월 1일 진답면을 덕양면으로 개칭
- 일제시대 – 1914년 4월 1일 덕양면을 하동면으로 개칭
- 1938년 10월 1일 하동읍으로 승격
하동읍 행정구역 / 법정리
읍내리(邑內里)
하동군 하동읍의 읍내리는 하동의 중심 지역으로, 그 이름은 역사적으로 읍의 중심지 또는 읍기(邑基)가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덕양면의 여러 지역(읍동, 교동, 선량동)을 통합하여 하동면 읍내리가 되었고, 이후 1938년 하동읍으로 승격하면서 하동읍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읍내리는 1745년(영조 21년) 당시 하동의 중심지였던 두곡리에서 항촌(현재의 서동)으로 읍기가 옮겨지면서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1937년 하동읍사무소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섬진강이 감싸 흐르며, 주변에 충적 평야가 펼쳐진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하동읍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광평리(廣坪里)
하동군 하동읍에 위치한 광평리의 지명은 원래 “너뱅”이라고 불리던 마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넓을 광(廣)”자와 “벌 평(坪)”자를 사용해 광평(廣坪)이라 명명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섬진강이 만들어낸 충적 평야 지대로, 비파제방과 신기제방의 축조 이후 농경지로 개간되었습니다.
광평리는 교통의 요지로서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섬진강을 통한 수운의 중심지로 번성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영남의소가 설치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비파리(琵琶里)
하동군 하동읍 비파리의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가 몽고의 전통 악기인 비파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또한, 마을 뒤편에 있는 숲에 다양한 날짐승이 서식하여 **비아섬(飛鵝島)**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마을은 섬진강을 따라 조성된 작은 섬에 손씨 가문이 정착한 후 점차 형성되었으며, 마을 주변에 백마강과 백마소와 같은 전설적인 이름이 붙은 장소도 있었습니다
신기리(新基里)
하동군 하동읍 신기리의 지명은 “새로운 터”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926년 비파제방이 완공된 이후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수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농경지로 개간된 후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신기리(新基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신기리는 섬진강 변의 충적 평야에 위치하며, 특히 재첩을 주로 잡는 마을로 유명합니다
목도리(牧島里)
하동군 하동읍 목도리의 지명은 두 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목도는 기러기가 많이 날아와 서식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목도(鶩島)”, 즉 기러기의 섬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조선 시대에 이 지역에서 말을 방목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목도(牧島)”, 즉 목장의 섬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현재 목도리는 더 이상 섬이 아니며, 섬진강과 횡천강 사이의 충적 평야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흥룡리(興龍里)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는 예전부터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용소에서 유래하여 “흥룡(興龍)” 또는 “흑룡(黑龍)”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한 마을을 둘러싼 산세가 마치 섬진강을 건너는 용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흥룡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호암동, 흥룡동, 묵점동이 통합되어 하동면 흥룡리가 되었고, 1938년 하동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흥룡리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고분군과 유물 산포지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가 많아, 하동 지역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화심리(花心里)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의 지명 유래는 이 지역의 풍수지리적인 형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750년경 의령 여씨 가문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광비등” 또는 “화심(和深)”이라 불렸습니다. 1872년에 마을의 지형이 마치 꽃의 중심부인 “화심(花心)”을 닮았다고 하여 “화심동(花心洞)”으로 개명되었습니다.
화심리에는 의령 여씨의 집성촌이 있으며, 이곳은 소설 토지에서 여참봉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주요 농업으로는 배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삼국시대 유적지인 화심리 유물 산포지 등이 남아 있습니다.
두곡리(豆谷里)
하동군 하동읍의 두곡리는 과거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으며, 1704년(숙종 30년) 당시 하동군의 읍치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중심 마을로 발전했습니다. 1730년 나동(고동골)으로 읍치가 다시 옮겨질 때까지 하동읍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두곡리라는 지명은 두곡마을에서 유래되었으며, “콩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동동, 두곡동, 율동이 합쳐져 오늘날의 두곡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은 섬진강의 지류와 맞닿아 있어 배산임수 지형을 이루며, 현재도 배와 밤 농사가 주요 산업입니다.
하동읍 주변에서 즐길 수 있는 볼거리와 먹거리
볼거리
최참판댁 촬영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한옥 마을입니다. 14개의 전통 한옥이 조성된 이곳은 조선 후기의 모습을 잘 담고 있으며, 매년 가을에는 토지문학제가 열립니다.
쌍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고즈넉한 사찰로, 벚꽃이 피는 봄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입니다.
동정호: 조용한 호수 연못으로, 산책로를 따라 하동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힐링 명소입니다.
화개장터: 전통시장의 모습과 함께 다양한 특산물과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특히 산나물과 약재, 전라도와 경상도의 특산물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먹거리
재첩국: 하동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섬진강에서 잡은 재첩으로 만든 맑은 국입니다. 화개장터와 주변 재첩 전문 식당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수수부꾸미: 화개장터에서 유명한 주전부리로, 수수 가루를 기름에 구워 만든 떡입니다. 고소하고 쫀득한 맛이 특징입니다.
메밀전병과 녹두빈대떡: 장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통 음식으로, 막걸리와 함께 즐기기 좋습니다.
하동에 관한 더 많은 자료를 하동군 홈페이지에 들러 찾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