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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 태동기|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창가·유성기·신여성의 목소리가 만든 근대 노래의 출발
말씀하신 “전화기의 시대”는 문맥상 태동기의 시대를 뜻하는 것으로 보고 정리합니다. 1900년대부터 1920년대는 아직 오늘날처럼 트로트·발라드·아이돌 음악이 분명히 나뉜 대중가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미 한국 대중가요를 가능하게 한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습니다. 서양식 노래와 학교 교육, 유성기 음반과 근대 매체, 그리고 특정 가수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소비하는 청중의 탄생입니다.
이 시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900년대의 노래는 나라와 학교와 공동체를 가르치는 창가에서 출발했고, 1920년대의 노래는 유성기와 극장, 신문을 타고 개인의 사랑·허무·도시적 욕망을 노래하는 근대적 대중문화로 옮겨 갔습니다.
먼저 알아둘 점|대중가요는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대중가요의 뿌리를 설명할 때 흔히 1930년대를 출발점으로 듭니다. 음반회사와 라디오, 전문 작곡가와 가수, ‘유행가’라는 장르 의식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시기가 1930년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1900~1920년대는 대중가요가 태어날 토양을 마련한 결정적인 시기였습니다.
이때 노래는 전통 민요·판소리·잡가·시조와 같은 기존 음악, 기독교 찬송가와 서양식 창가,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근대 음악, 극장과 유성기에서 유통된 신식 오락이 만나는 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음악을 단순히 “옛날 노래”라고 부르기보다, 전통음악이 근대 대중음악으로 변모하는 과도기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1900년대|유성기가 먼저 왔고, 대중가요는 나중에 왔습니다
1900년대 초 한국 사회는 대한제국 말기와 국권 상실의 위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철도와 우편, 신식 학교, 신문, 교회, 극장, 사진관 같은 근대 문물이 도시를 중심으로 퍼졌습니다. 음악의 변화도 이 흐름 속에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유성기(留聲機), 곧 축음기의 등장입니다. 소리는 원래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지만, 유성기는 목소리를 기록하고 되풀이해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음악사에서 매우 큰 변화였습니다. 누군가의 노래를 한 번 듣고 잊는 시대에서, 특정한 목소리를 음반으로 소유하고 반복해 듣는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유성기 음반이 소개된 기록은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900년대 초에는 상업 목적의 SP 음반이 제작·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미국 콜럼비아와 빅터가 조선 음악가들의 소리를 녹음했고, 1907년에는 이 음반들이 국내에서 시판되었습니다. 한인오, 최홍매, 김화녀 같은 연희인과 송만갑, 박팔괘 같은 명창들이 잡가·시조·가사·판소리 등을 취입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음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초기 음반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의미에서 ‘가요 가수’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판소리 명창, 가객, 기생, 악공 등 전통 공연예술의 전문가였습니다. 대중가요는 기존 음악을 지워 버리고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들의 소리와 창법, 레퍼토리, 스타성이 유성기라는 기술을 만나면서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간 것입니다.
창가의 시대|노래는 근대 시민을 만드는 교과서였습니다
1900년대와 1910년대의 가장 중요한 새 노래 양식은 창가(唱歌)였습니다. 창가는 서양식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부른 근대적 노래를 가리킵니다. 학교와 교회, 청년회, 계몽 단체에서 널리 불렸으며, 개화가사와 신체시 사이를 잇는 근대 시가의 한 형식이기도 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창가’
창가에는 오늘날의 사랑 노래처럼 개인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작품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라와 교육, 위생, 근면, 문명, 청년의 각성을 노래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노래는 즐거움을 위한 오락이면서도, 새 시대의 국민을 가르치는 도구였습니다.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는 시간표와 교과서, 교복처럼 근대적 생활양식을 익히게 했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서양식 화성과 집단 합창의 경험을 넓혔습니다.
창가의 정서는 대체로 밝고 전진적이었습니다. “배우자”, “깨어나자”, “나라를 사랑하자”, “새 문명을 맞이하자”는 의지가 자주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밝음은 시대의 불안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대한제국이 흔들리고, 1910년 국권이 상실되며, 사람들은 노래를 통해 근대화와 민족의 자각을 함께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창가는 단순한 학교 노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식민지 이전과 식민지 초기의 조선인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던 방식이었습니다. 노래는 아직 개인의 사적인 고백보다 공동체의 과제에 더 가까웠습니다.
1910년대|식민지의 침묵 속에서 노래가 맡은 역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와 강한 검열, 토지 조사와 경제적 수탈, 민족 교육과 언론에 대한 통제가 이어진 시기였습니다. 노래 역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의 공간을 충분히 누리기 어려웠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제강점기’
그렇다고 노래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노래는 학교·교회·청년회·비밀결사·지역 모임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창가는 학생과 청년이 함께 부르기 쉬운 형식이었기에 교육과 계몽, 민족적 연대의 감정을 키우는 데 쓰였습니다. 어떤 노래는 직접적인 정치 언어를 피하면서도 조국과 역사, 언어와 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담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은 노래의 사회적 힘을 보여 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만세 시위와 독립운동의 현장에는 선언문과 구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함께 부르는 노래와 찬송가, 애국적 창가가 있었습니다. 식민 권력은 글과 말뿐 아니라 노래가 만들어 내는 집단적 감정도 경계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행위는 단지 음악적 행위가 아니라, 서로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가수는 아직 오늘날처럼 음반 차트와 방송으로 이름을 알리는 연예인이 아니었습니다. 교사, 성악가, 교회 음악가, 기생, 명창, 극단 배우가 서로 겹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문 가수라는 직업의 경계는 아직 희미했고, 노래는 교육·연극·종교·전통 예능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1920년대|‘문화정치’와 함께 열린 대중문화의 창
3·1운동 이후 일본은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정치로 바꾸었습니다. 통제와 수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신문과 잡지, 출판과 공연, 영화와 라디오 같은 근대 매체의 공간은 이전보다 넓어졌습니다. 1920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문학·연극·청년·여성·아동 문화가 활발해졌습니다.
노래 역시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신식 극장에서는 연극과 노래, 춤이 함께 공연되었고, 배우와 성악가의 이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음악은 더 이상 집안이나 학교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극장에 가서 새로운 가수의 노래를 들었고, 유성기 음반을 통해 특정한 목소리를 반복해 들었습니다.
경성방송국은 1926년 시험 전파를 발사했고, 1927년부터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유성기와 라디오의 등장은 음악을 듣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이전에는 명창이나 연희인을 직접 보아야 했지만, 이제는 가수가 보이지 않아도 그 목소리가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1920년대 이후 대중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유성기와 라디오가 국민적 스타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설명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아주 오래된 아이돌, 임방울’
윤심덕과 〈사의 찬미〉|가수의 목소리가 ‘사건’이 되다
1920년대 대중가요 태동기를 이야기할 때 윤심덕과 〈사의 찬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윤심덕은 성악가이자 배우였고,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여성의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26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 선율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취입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의 찬미’
〈사의 찬미〉는 엄밀히 말하면 서양곡을 번안한 노래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태동기 대중가요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초기 한국 대중가요는 서양 음악, 일본을 경유한 근대 음악, 전통적 성악과 한국어 가사가 얽히며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의 창작은 완전히 새로운 선율을 만드는 일만이 아니라, 외래의 음악을 한국어의 감정과 리듬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노래가 폭발적인 화제가 된 배경에는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대중은 노래만 들은 것이 아니라, 가수의 사랑과 비극, 사진과 신문 기사, 음반 광고를 함께 소비했습니다. 이것은 한국 근대 대중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한 가수의 사적인 삶이 공적 화제가 되고, 그 이야기가 음반 판매와 결합하며, 청중이 음악과 인물의 서사를 함께 기억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의 찬미〉의 음울한 세계관은 1920년대 청년층의 불안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3·1운동 이후의 좌절, 식민지 현실, 도시화 속의 고독, 새로운 사랑과 자유를 꿈꾸는 신세대의 갈등이 이 노래에 투영되었습니다. 창가가 공동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노래였다면, 〈사의 찬미〉는 개인의 내면에서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노래였습니다.
이애리수와 〈황성옛터〉|식민지의 기억을 노래하다
1920년대 후반에는 한국인이 만든 창작가요도 점차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황성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1928년 무대에서 불렸고, 왕평이 가사를 쓰고 전수린이 곡을 붙였습니다. 고려의 옛 궁터를 바라보는 노랫말은 지나간 왕조의 폐허를 통해 나라를 잃은 시대의 상실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애리수와 〈황성옛터〉의 초기 활동
이 곡은 노골적으로 독립을 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폐허가 된 황성과 사라진 영광을 노래하는 방식은 식민지 조선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직접 말할 수 없는 시대에는 과거의 왕조, 무너진 성, 가을바람, 낡은 터와 같은 이미지가 현재의 상실을 돌아보게 하는 우회적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애리수의 존재도 중요합니다. 그는 배우이자 가수였고, 무대와 음반을 넘나들었습니다. 이는 1920년대 가수가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직업인이 아니라, 근대 극장 문화와 음반 산업, 신문과 대중적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수는 이제 전통 예능의 전승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도시 문화의 얼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 민요는 어떻게 신민요와 유행가로 이어졌는가
1920년대의 음악은 서양식 창가나 번안가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통 민요와 잡가, 판소리 역시 유성기를 통해 새롭게 유통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지역과 현장에서 불리던 노래가 음반에 담기면서 전국의 청중을 만났고, 전통음악의 명창은 근대적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 흐름은 1930년대의 신민요(新民謠)로 이어집니다. 신민요는 전통 민요의 느낌을 살리되, 작사·작곡가가 분명하고 특정 가수가 음반으로 부르는 근대적 대중가요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신민요’라는 장르 명칭과 전성기는 1930년대에 본격화됩니다. 그러므로 1920년대를 신민요의 완성기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1920년대는 전통 민요가 유성기와 극장, 상업 음반의 환경 속에서 새로운 대중음악으로 변할 준비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민요’
이 과정에서 기생과 권번 출신 예능인, 판소리 명창,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 성악가, 극단 배우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 대중가요 초기의 여성들은 단순한 노래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새로운 목소리와 패션, 사랑과 독립성을 보여 준 문화의 주체였습니다. 윤심덕과 이애리수의 활동은 신여성의 등장이 음악과 대중문화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었는지 보여 줍니다.
1900~1920년대 음악의 핵심 성향
이 시기의 노래를 한눈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구분 | 1900~1910년대 | 1920년대 |
|---|---|---|
| 중심 양식 | 창가, 찬송가, 전통 성악과 민요 | 번안가요, 창작가요, 유성기 음반, 극장 노래 |
| 핵심 매체 | 학교, 교회, 신문, 집회 | 유성기, 극장, 신문·잡지, 라디오 |
| 주된 정서 | 계몽, 교육, 애국, 공동체 의식 | 사랑, 허무, 도시적 감수성, 역사적 상실 |
| 대표 인물 | 명창·기생·교사·교회 음악가 | 윤심덕, 이애리수, 극단 배우와 성악가 |
| 역사적 배경 | 대한제국 말기, 국권 상실, 무단통치 | 3·1운동 이후, 문화정치, 도시 대중문화의 성장 |
1900년대의 노래가 “어떤 나라와 어떤 국민이 될 것인가”를 묻는 노래였다면, 1920년대의 노래는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잃었는가”를 묻기 시작한 노래였습니다. 하나는 공동체를 향한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내면으로 향한 목소리였습니다.
맺음말|노래가 상품이 되고, 목소리가 기억이 되다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의 한국 음악사는 대중가요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유성기는 전통 명창의 소리를 음반에 담았고, 창가는 근대 교육과 민족적 각성의 언어가 되었으며, 윤심덕과 이애리수는 노래하는 개인이 어떻게 대중의 기억 속 스타가 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1930년대의 유행가와 신민요, 이후의 트로트와 대중가요는 이 토대 위에서 성장합니다. 한국 대중가요의 첫 장은 화려한 아이돌 무대나 대형 방송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학교의 합창, 교회의 찬송, 극장의 막간 노래, 유성기에서 흘러나온 명창의 소리, 그리고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던 한 여성 가수의 목소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